茶山 丁若鏞의 文學 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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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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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茶山의 生涯 3. 茶山의 文章論 |
4. 茶山의 朝鮮詩 5. 맺음말 | |||
1. 머리말
茶山 丁若鏞은 星湖 李瀷의 뒤를 이어 朝鮮 後期의 腐敗하고 疲弊된 社會 狀態를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를 당장 고치지 아니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라고 銳利하게 觀察하고, 批判하면서 當面한 諸 問題에 관하여 자신의 經綸과 理想을 500餘 卷의 著作을 통해서 披瀝하여 새로운 經世致用의 學風을 이룩한 大學者였다. 茶山은 自身의 이 尨大한 著作에 대하여 自撰墓地銘에서 스스로 평하기를 ‘六經四書로써 修己하고, 一表二書로써 天下國家를 위할 本末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은 이미 적고, 이를 꾸짖는 사람은 많다. 만약 天下가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단번에 불살라 버려도 좋다.(六經四書以之修己 일표이서지위천하국가 所以備本末也 然知者旣寡嗔者以衆 若天下不允 雖一炬以焚之可也)고 할 만큼 自負 또한 강했다.
實學의 兩大學派로서 燕巖學派와 茶山을 包含하는 星湖學派는 文學藝術에 대한 基本 立場面에서 서로 對照的인 바가 있었다. 前者는 化學技術 및 商業流通의 發展을 통한 生活의 向上을 主張하면서 自己들의 地積 創造活動을 文學藝術의 世界에 기울인 反面, 後者는 經世致用의 學을 주로 하여 文學藝術을 多分히 非生産的인 것으로 생각하였고, 小說文學에 대해서는 대단히 批判的인 見解를 내세웠다.
이제까지의 實學파 文學 硏究에서 燕巖의 文學은 活潑히 硏究가 되어왔으나, 茶山은 經學과 經濟的인 側面을 强調해 온 까닭에 2,500餘 首에 이르는 詩를 비롯한 文學的이 側面은 看過되어 오다가 最近에 들어와서 그의 文學思想과 詩에 대한 觀心이 늘어나고 있는 處地이다. 尨大한 量의 詩를 飜譯할 수도 없어서 지금까지 飜譯은 一部에 局限되어 出版되었을 뿐이다.
本稿에서는 茶山의 生涯를 簡略히 살펴보고, 文體策과 五學論 중 文章之學과 家戒와 贈言 등에 散在하는 文章論과 主體文學이라고 할 수 있는 朝鮮詩 宣言에 대해서 考察하고자 한다.
2. 茶山의 生涯
茶山 丁若鏞(1762~1836)의 本貫은 押海이며, 字는 美庸, 頌甫이며, 號는 俟菴, 三美, 籜翁, 茶山 등이 있으며, 與猶堂이란 堂號는 老子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取해 왔다고 한다. 또 洌水라는 號도 있으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1762년(英祖36.6.16) 아버지 丁載遠과 어머니 海南尹氏 사이에서 四男으로 京畿道 廣州郡 草阜面 馬峴에서 出生하였다. 7세에 벌써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이라 詩를 지었다 하며 10세에 三眉集을 엮었다. 13세에는 杜甫의 詩에서 次韻하여 수백 수를 짓기도 했다 한다. 15세에 洪和輔의 딸 豐産洪氏와 結婚하여 60년 後 結婚한 날 죽을 때까지 6男3女를 낳아 2男 1女를 길렀으며 「農家月令歌」의 作者인 學游는 그의 次男이다.
22세에 會試에 合格하여 正祖를 謁見하고 「中庸講義」 80餘 條를 지어 王에게서 學問的 力量을 認定받았다 하며, 李蘗을 만나 天主敎를 接하게 되었다. 28세 때 殿試 甲科에 2등하여 그후 抄啓文臣 時節 稗官雜書에서 緣由된 文章의 스타일을 醇正한 文章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文體反正論을 主張하였다. 33세에 京畿道 暗行御史가 되어 疲弊한 農村과 굶주리는 百姓의 慘狀을 體驗하고 以衆民生 以尊國法을 正祖에게 建意하며 34세에(1795) 兵曹參議가 되었고, 舟文謨 事件으로 忠淸道 金井道察訪으로 座遷되고, 35세 때 「辨謗辭同副承旨疏」로 背敎者란 말을 듣게 된다. 39세 때 正祖가 昇遐하자 40세(1801) 때 辛酉邪獄으로 慶尙北道 長鬐로 귀양갔다가 그 해 10월 黃嗣영 帛書事件으로 서울로 押送되었다가 全羅南道 康津으로 流刑의 길을 떠나 長長 18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大部分의 著作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58세에 解配되어 鄕吏에 돌아와서도 「欽欽新書」「雅言覺非」 등을 著述하다가, 75세의 回婚日에 500여 卷의 尨大한 著書를 남기고 그의 經綸을 펴보지도 못한 채 他界하고 만다. 1883년 高宗의 命으로 「與猶堂全書」가 轉寫되어 內閣에 收藏되었고 1910년 正二品正憲大夫奎章閣提學에 追贈되고 文度란 諡號가 내려졌다.
3. 茶山의 文章論
茶山은 文章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文章이라는 學問은 우리 道를 크게 해치는 것이다. 大抵 文章이란 어떤 것인가? ― 中略 ― 天地의 바른 理致에 통하고 萬物의 衆情을 두루 갖추어서 그 知識이 마음에 쌓이면, 땅이 짊어지며 바다가 包容하고 구름이 모이고 우레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되어서 마침내는 숨길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 후에 이것과 서로 만나는 것이 있어서 서로 드나들고, 接觸해서 이를 激動시키고 흔들면 퍼져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닷물처럼 출렁이고 번개치듯이 찬란하게 된다. 가까이는 사람을 感動시키고 멀리는 天地를 움직이고 鬼神을 激動시킨다. 이런 것을 文章이라 한다.
文章의 成立過程과 文字의 外形, 文章의 機能을 말하고 있다. 또한 茶山의 「爲李仁榮贈言」에서 文章을 이루는 마음(中)은 ‘事物과 서로 만나고, 事物과 서로 닿고 是非와 서로 接觸하고 利害와 서로 形態를 이룬다’고 했다.
文學 作品은 마음(中)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世界(事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마음과 世界가 서로 照應하여 이루어진 對立的인 構造인 것이다. 곧 茶山이 말하는 퍼져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닷물처럼 출렁이고 번개치듯이 燦爛하게 된다는 것과 相通하는 것이다.
茶山은 ‘文章은 우주 사이에서 精微하고 巧妙한 것이다.(文章之在宇宙之間 其精微巧妙者)라고 하여 「周易」 「詩經」「書經」「禮記」 등의 古典을 들어서 文學이 갖추어야 할 典範으로서의 客觀性을 立證하려 했던 것이다. 茶山의 생각은 複合的인 性格을 지니고 있다. 그가 말한 文學 危機도 二重의 意味를 지니고 있다. 文學의 危機는 文學이 古典的 規範에서 離脫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道學的 文學觀을 再確立함으로써 克服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自己 時代의 現實的 問題와 正面에서 부딪쳐야 克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茶山은 文章이란 外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참 문장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文章은 技巧보다 主題가 더 重要하다는 것이며, 柳宗元이나 韓愈는 文章을 修飾을 爲主로 했기 때문에 華麗하기는 하지만 사람에게 敎養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韓愈, 柳宗元이 비록 文章을 中興시킨 始祖라고 하나, 事實인즉 속에서 우러나는 文章이 아니고 겉으로부터 꾸며 놓은 文章으로 그런 文章을 가지고 大家라고 自處한다. 韓愈나 柳宗元, 歐陽修, 蘇軾이 지은 書․記는 華麗한 것 같지만 內容이 없어서 奇異한 듯하나 바르지 않으니 어린 사람이 읽어서 기쁘게는 하나 그것으로는 안에서 몸을 닦고 어버이를 섬기고 밖으로는 임금을 바르게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힘을 주지 못한다.
위로는 임금을 輔佐하여 나라를 다스릴 方策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一世의 旗鼓가 될 것을 생각한 후에라야 바야흐로 녹녹지 않을 것이다.
「五學論 三 - 文章之學」에서 韓悠, 柳宗元, 歐陽修, 蘇軾의 文學만으로는 爲天下國家할 수 없다고 본 이유는 그들의 文學이 華麗하나 實質이 없고 奇異하나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茶山이 否定했던 것은 ‘無實과 不正’이요, ‘實質이 있고 正大하면’ 된다는 뜻이다. 茶山은 가장 理想的인 文章을 六藝와 孟子, 老子 등에서 찾았으며 安身立名은 勿論이거니와 性命之本과 民國之務를 잃지 않는 實用의 文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文章만이 사람을 感動시키고 天地를 움직이며 鬼神을 感動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茶山은 匡濟一世에 其餘할 만한 文章의 典範을 다음과 같이 列擧하고 있다.
精微하고 巧妙한 것은 主役이다. 溫柔하고 激切한 것은 詩經이며 典雅하고 縝密한 것은 書經이며, 詳細하고 亂하지 않은 것이 禮記이며, 條目이 茂盛해도 섞일 수 없는 것은 周禮이며, 珍奇한 것을 드러내고 거두어들여 굽힐 수 없는 것은 春秋左氏傳이며, 슬기롭고 성스러워 缺點이 없는 것은 論語이며, 性道의 本體를 참으로 알아서 갖가지 經書를 分析한 것은 孟子이며, 깊고 奧妙한 理致를 따지고 새긴 것은 老子이다.
이처럼 茶山은 道文合一을 主張하여 道로 말미암아 文章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文以載道說을 취했던 것이며 茶山은 當時의 文章이란 羅貫中, 施耐菴, 金聖歎 等이 稗官小說類를 宗師로 만들어서 凄凉하고 슬프고 흐느끼고 어그러지고 險하여 한결같이 넋이 빠지고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것으로서, 文章을 지어 놓고서는 自怡自尊하면서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茶山은 文은 道를 실어서 堯舜主公의 文으로 回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認識했다. 따라서 茶山이 小說을 해로운 것으로 認識하고 이를 排斥한 것은 當然한 歸結이라 할 수 있다.
羅貫中을 祧廟로 여기고 施耐菴, 金聖歎을 昭穆으로 여겨서 조잘거리는 원숭이와 앵무새의 혀처럼 이리저리 놀려서 그 淫亂하고 怪狀스런 말들을 꾸며놓고 저 혼자 기뻐하면서 즐거워한다.
茶山의 文章에 대한 見解는 文以載道에 徹底히 젖어 있으며, 文章의 本質을 밖으로부터 얻어지는(外襲)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充滿되어 나오는 것(內發)으로 把握했으며, 그 機能은 匡濟一世에 寄與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고 當代의 文壇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고, 또 自身은 그것을 實踐하려 했었다고 할 수 있겠다.
4. 茶山의 朝鮮詩
茶山은 스스로 ‘天性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余性不喜詩律)’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詩는 緊要한 것이 아니나 性情을 陶冶하는 데 無益한 것은 아니다.(詩非要勞然陶詠性情不爲無益)'라고 하여 詩의 重要性을 認定했다. 또한 詩는 나라를 사랑하고 百姓을 위하며 時代를 걱정하고 社會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면 참다운 詩가 아니라 했다. 忠臣 孝子 烈婦 親友들의 思想을 表現한 詩經 300餘 篇의 詩精神을 잘 이어받은 杜甫를 孔子처럼 崇尙하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詩思想이 茶山의 大部分의 詩의 基底에 깔려 있는 告發과 抵抗精神이 된 것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은 것은 詩가 아니다. 어지러운 世上을 아파하고 頹廢한 習俗을 痛憤히 여기지 않은 것은 詩가 아니며, 眞實을 讚美하고 虛僞를 諷刺하며 善을 傳하고 惡을 懲戒하지 않은 것은 詩가 아니다. 그러므로 意志가 確立되지 못하고 學識이 醇正하지 못하며, 큰 道를 알지 못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百姓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는 者는 詩를 쓰지 못한다.
무릇 詩의 根本은 父子 君臣 夫婦의 倫理에 있다. 그 즐거운 뜻을 宣揚하기도 하고 그 怨望과 思慕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에 憂世恤民하여야 한다. 언제나 無力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者를 救濟하고 惻隱하게 彷徨하는 者를 버리지 않으려는 뜻을 가져야 바야흐로 詩다. 自己의 利害만 생각하는 것은 詩가 아니다.
理解와 感興만을 노래한 것은 詩가 아니며, 現實的인 問題를 다루며 無力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뜻을 바르게 가져야 詩를 쓸 수 있다는 것은 詩人의 資質에 관한 言及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도 茶山의 實學 思想을 確認할 수가 있으며 現實參與라는 暴露와 抵抗이라는 側面을 理解할 수가 있을 것이다.
文學은 自己 時代 問題를 다루는 것을 使命으로 삼는 것인 만큼 中國文學의 古典的 典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現實과 부딪치는 데서 惹起되는 感興을 生動感 넘치게 表現하는 것이 올바른 文學觀이라는 茶山은 當時의 嚴格한 律格에서 벗어나 뜻하는 바를 自由롭게 나타내면서 朝鮮詩를 지어야 하며 用事도 朝鮮 것을 使用해야 한다는 것이다. 朝鮮 사람이 朝鮮詩를 쓰는 것은 當然한 일이고, 朝鮮 사람은 朝鮮詩를 써야 한다는 自我意識을 가지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른 文學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老人一快事
縱筆寫狂詞
競病不必狗
推敲不必遲
興到卽運意
意到卽寫之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卿當用卿法
迃哉議者誰
區區格與律
遠人何得知
凌凌李攀龍
嘲我爲車夷
袁尤槌雪樓
海內無異辭
背有挾彈子
爰暇枯蟬窺
我慕山石句
恐受女郞嗤
焉能飾棲黯
辛苦斷腸爲
梨橘各殊味
嗜好唯其宜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미친 듯 시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퇴고하느라 더디지도 않고
흥 나면 뜻 싣고
뜻 이루면 바로 시 쓰네.
나는 朝鮮 사람이기에
즐거이 朝鮮시를 쓴다.
그대는 마땅히 그대의 법을 쓰면 되지
시작법에 어긋난다고 하는 자 누군가.
중국시의 구구한 격과 율을
먼 곳의 우리가 어이 알까.
우리를 업신여긴 이반룡은
우리 오랑캐라 비웃었네.
원우가 설루를 친 것은
해내에는 다른 말이 없다.
朝鮮 사람 등에는 중국 띠매어 업은 것을
매미 허물 벗듯 함을 여느 겨를에 볼까
나는 수식없이 자연스레 된 시를 좋아하나니
계집아이 같은 자들의 비웃음 두려우랴.
어찌 처절하고 어두운 것 꾸미면서
괴로워 애간장 태우는고.
배와 귤 그 맛 다르듯
오직 입맛 따를 뿐이네.
以後로는 詩를 지을 때는 반드시 用事를 爲主로 하라.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中國의 古事만을 使用하는데 이는 亦是 鄙陋한 文風이다. 반드시 <三國史記>〈高麗史〉〈國朝寶鑑〉〈輿地勝覽〉〈懲毖錄〉〈練藜室記述〉와 其他 우리나라 著作들에서 그 古事를 採取하여 그 地方의 事實을 考究한 다음 詩에 使用해야만 바야흐로 後世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詩精神에서의 民族 主體性 곧 自己 尊重의 思想을 强調하고, 詩에 用事를 하되 痕迹이 없게 무르녹도록 使用해야 하며, 그것도 우리나라의 文獻과 傳統에서 찾아 事實 與否를 確認한 다음 使用하라는 것이다.
茶山 自身은 詩를 좋아하는 性品이 아니라고 하면서 2,500餘 首에 달하는 尨大한 量의 詩를 남겼다. 그의 詩精神은 곧 人倫에 바탕을 두고 아프고 苦痛스런 現實을 赤裸裸하게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씌워진 것들인 만큼 應當 實學 思想과 接合이 되어서 朝鮮人에게 맞는 朝鮮시의 主張이 나옴직한 것이다.
5. 맺음말
茶山의 著作은 자그만치 500餘 卷에 달한다. 그 中 詩文集만의 分量도 大端하다. 처음의 意圖는 한 部分이라도 옳게 파고들고 싶었으나 時間만 虛費할 뿐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已往에 發表된 論文과 著作들을 주워모으는 동안에 어렴풋이나마 方向이 보이는 듯하기는 했다. 抵抗意識에 關心을 가지고 그에 대한 詩들을 보려 했으나 전혀 손도 대지 못하고 말았다.
<參考文獻>
․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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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單行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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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論叢乙酉文化社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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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茶山의 生涯와 思想博英社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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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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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洪「茶山의 文學思想」東洋學弟10集1980
金相洪「丁茶山의 樂府詩 硏究」檀大論文集13輯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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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載邵「茶山의 <朝鮮詩>에 대하여」韓國漢文學硏究1982
〃茶山의 詩硏究國語國文學391977
金智勇茶山文學論國語國文學1966
〃茶山文學의 事實性國語國文學72,73호1976
〃實事求是文學의 推移國語國文學28호1965
〃丁茶山의 實事求是的詩考아카데미論叢51977
〃丁茶山 文學의 硏究 廣場681979
金興圭茶山의 詩意識과 詩經論民族文化硏究141979
金泳茶山의 讀書論江原大論文集15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