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비(賁)
【傳】 賁는 序卦에 嗑者는 合也니 物不可以苟合而已라 故受之以賁하니 賁者는 飾也라 하니라 物之合則必有文하니 文은 乃飾也라 如人之合聚則有威儀上下하고 物之合聚則有次序行列하여 合則必有文也하니 賁所以次噬嗑也라 爲卦 山下有火하니 山者는 草木百物之所聚也요 下有火하면 則照見其上하여 草木品彙皆被其光彩하니 有賁飾之象이라 故爲賁也라.
비괘(賁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합(嗑)은 합함이니, 사물은 구차히 합할 뿐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비괘(賁卦)로 받았으니, 비(賁)는 꾸밈이다.” 하였다. 사물이 합하면 반드시 문문채가 있으니, 문(文)은 바로 꾸밈이다. 사람이 모이면 위의(威儀)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있고 사물이 모이면 차서(次序)와 행렬(行列)이 있어서 합하면 반드시 문(文)이 있으니, 비괘(賁卦)가 이 때문에 서합괘(噬嗑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산(山) 아래에 불이 있으니, 산(山)은 초목(草木)과 온갖 사물이 모이는 곳이요, 아래에 불이 있으면 그 위를 비춰서 초목(草木)과 물건들이 모두 그 광채를 입으니, 꾸미는 상(象)이 있다. 이 때문에 비(賁)라 한 것이다.
賁는 亨하니 小利有攸往하니라.
비(賁)는 형통(亨通)하니,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롭다.
【本義】 賁는 亨하고,
【본의】 비(賁)는 형통하고,
【傳】 物有飾而後能亨이라 故曰 无本不立이요 无文不行이라 하니 有實而加飾이면 則可以亨矣라 文飾之道는 可增其光彩라 故能小利於進也라.
사물은 꾸밈이 있은 뒤에 형통(亨通)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근본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문(文)이 없으면 행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실(實)이 있고 꾸밈을 더하면 형통(亨通)할 수 있다. 문식(文飾)하는 도(道)는 광채를 더할 수 있으므로 나아감에 조금 이로운 것이다.
【本義】 賁는 飾也라 卦自損來者는 柔自三來而文二하고 剛自二上而文三하며 自旣濟而來者는 柔自上來而文五하고 剛自五上而文上하며 又內離而外艮하니 有文明而各得其分之象이라 故爲賁라 占者以其柔來文剛하여 陽得陰助而離明於內라 故爲亨이요 以其剛上文柔而艮止於外라 故小利有攸往이라.
비(賁)는 꾸밈이다. 괘(卦)가 손괘(損卦)[ ]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삼(三)에서 와서 이(二)를 문식(文飾)하고 강(剛)이 이(二)에서 올라가 삼(三)을 문식(文飾)하며, 기제괘(旣濟卦)[ ]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상(上)에서 와서 오(五)를 문식(文飾)하고 강(剛)이 오(五)에서 올라가 상(上)을 문식(文飾)하며, 또 안은 이(離)이고 밖은 간(艮)이니, 문명(文明)하면서 각각 그 분수를 얻은 상(象)이 있다. 그러므로 비(賁)라 한 것이다. 점치는 이는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文飾)하여 양(陽)이 음(陰)의 도움을 얻고 이(離)가 안에서 밝으므로 형통(亨通)한 것이요, 강(剛)이 올라가 유(柔)를 문식(文飾)하고 간(艮)이 밖에 멈춰 있으므로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운 것이다.
彖曰 賁亨은,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비(賁)가 형통(亨通)함은,
【本義】 亨字는 疑衍이라.
형자(亨字)는 연문(衍文)인 듯하다.
柔來而文剛이라 故로 亨하고 分剛하여 上而文柔라 故로 小利有攸往하니 天文也요.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文飾)하기 때문에 형통(亨通)하고, 강(剛)을 나누어 올라가 유(柔)를 문식(文飾)하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운 것이니, 이는 천문(天文)이요,
【本義】 以卦變으로 釋卦辭라 剛柔之交는 自然之象이라 故曰天文이라 先儒說天文上에 當有剛柔交錯四字라 하니 理或然也라.
괘변(卦變)으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강유(剛柔)가 사귐은 자연(自然)의 상(象)이므로 ‘천문(天文)’이라 한 것이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문(天文)의 위에 마땅히 ‘강유교착(剛柔交錯)’ 네 글자가 있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치가 혹 그럴 듯하다.
文明以止하니 人文也니,
문명(文明)에 그치니 인문(人文)이니,
【본의】 문명(文明)하고,
【傳】 卦爲賁飾之象은 以上下二體剛柔交하여 相[一作相交]爲文飾也라 下體本乾이어늘 柔來文其中而爲離하고 上體本坤이어늘 剛往文其上而爲艮하니 乃爲山下有火하여 止於文明而成賁也라 天下之事无飾不行이라 故賁則能亨也라 柔來而文剛故亨은 柔來文於剛而成文明之象하니 文明이 所以爲賁也며 賁之道能致亨은 實由飾而能亨也라 分剛上而文柔故小利有攸往은 分乾之中爻하여 往文於艮之上也라 事由飾而加盛하고 由飾而能行이라 故小利有攸往이라 夫往而能利者는 以有本也일새니 賁飾之道는 非能增其實也요 但加之文彩耳니 事由文而顯盛이라 故爲小利有攸往이라.
이 괘(卦)가 비식(賁飾)의 상(象)이 된 것은, 상하(上下) 두 체(體)의 강유(剛柔)가 사귀어 서로 문식(文飾)을 하기 때문이다. 하체(下體)는 본래 건(乾)인데 유(柔)가 와서 그 가운데를 문식(文飾)하여 이(離)가 되었고, 상체(上體)는 본래 곤(坤)인데 강(剛)이 가서 그 상(上)을 문식(文飾)하여 간(艮)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산(山) 아래에 불이 있음이 되어 문명(文明)에 그쳐 비(賁)를 이룬 것이다. 천하(天下)의 일은 문식이 없으면 행해지지 못하므로 꾸미면 형통(亨通)한 것이다. ‘유래이문강고형(柔來而文剛故亨)’은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文飾)하여 문명(文明)의 상(象)을 이루었으니, 문명(文明)이 이 때문에 비(賁)가 되는 것이며, 비(賁)의 도(道)가 형통(亨通)을 이룸은 실로 문식함으로 말미암아 형통(亨通)할 수 있다. ‘분강상이문유고소리유유왕(分剛上而文柔故小利有攸往)’은 건(乾)의 중효(中爻)를 나누어 가서 간(艮)의 상(上)을 문식(文飾)하였으니, 일은 꾸밈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하고 꾸밈으로 말미암아 행해진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운 것이다. 가서 이로운 것은 근본이 있기 때문이니, 비식(賁飾)하는 도(道)는 그 실제를 더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문채(文彩)를 가(加)할 뿐이니, 일은 문채(文彩)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성해지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로운 것이다.
亨者는 亨通也요 往者는 加進也라 二卦之變이 共成賁義어늘 而彖分言[一无言字]上下하여 各主一事者는 蓋離明은 足以致亨이요 文柔는 又能小進也일새라 天文也文明以止人文也는 此承上文하여 言陰陽剛柔相文者는 天之文也요 止於文明者는 人之文也니 止는 謂處於文明也라 質必有文은 自然之理요 理必有對待는 生生之本也라 有上則有下하고 有此則[一作必字]有彼하고 有質則有文하여 一不獨立이요 二則爲文이니 非知道者면 孰能識之리오 天文은 天之理也요 人文은 人之道也라.
형(亨)은 형통(亨通)함이요, 왕(往)은 더 나아감이다. 두 괘(卦)의 변(變)이 함께 비식(賁飾)의 뜻을 이루었는데, 〈단전(彖傳)〉에서는 상(上)·하(下)로 나누어 말하여 각각 한 가지 일을 주장한 것은, 이명(離明)은 형통(亨通)함을 이룰 수 있고 유(柔)를 문식함은 또 다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야문명이지인문야(天文也文明以止人文也)’는 이는 상문(上文)을 이어서 음양(陰陽)과 강유(剛柔)가 서로 문식(文飾)함은 하늘의 문(文)이요, 문명(文明)에 그침은 사람의 문(文)임을 말한 것이니, 지(止)는 문명(文明)에 머묾을 이른다. 질(質)에 반드시 문(文)이 있음은 자연의 이치이고, 이치에 반드시 대대(對待)가 있음은 생생(生生)의 근본이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질(質)이 있으면 문(文)이 있어서 하나는 홀로 서지 못하고 둘이면 문(文)이 되니, 도(道)를 아는 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천문(天文)은 하늘의 이치이고, 인문(人文)은 사람의 도(道)이다.
【本義】 又以卦德言之라 止는 謂各得其分이라.
또 괘덕(卦德)으로 말하였다. 지(止)는 각각 그 분수를 얻음을 이른다.
觀乎天文하여 以察時變하며,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며,
【傳】 天文은 謂日月星辰之錯列과 寒暑陰陽之代變이니 觀其運行하여 以察四時之遷改也라.
천문(天文)은 일(日)·월(月)·성신(星辰)이 뒤섞여 나열됨과 한서(寒暑)와 음양(陰陽)이 교대로 변함을 이르니, 그 운행(運行)을 관찰하여 사시(四時)의 변천을 살피는 것이다.
觀乎人文하여 以化成天下하나니라.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天下)를 교화하여 이룬다.”
【傳】 人文은 人理之倫序니 觀人文하여 以敎化天下하여 天[一无天字]下[一无下字]成其禮俗은 乃聖人用賁之道也라 賁之象은 取山下有火하고 又取卦變의 柔來文剛, 剛上文柔라 凡卦有以二體之義及二象而[一无而字]成者하니 如屯取動乎險中與雲雷와 訟取上剛下險與天水違行이 是也요 有取一爻者成卦之由也하니 柔得位而上下應之曰小畜과 柔得尊位大中而上下應之曰大有 是也라 有取二體하고 又取消長之義者하니 雷在地中復과 山附於地剝이 是也요 有取二象하고 兼取二爻交變爲義者하니 風雷益은 兼取損上益下하고 山下有澤損은 兼取損下益上이 是也요 有旣以二象成卦하고 復取爻之義者하니 夬之剛決柔와 姤之柔遇剛이 是也요 有以用成卦者하니 巽乎水而上水井과 木上有火鼎이 是也니 鼎은 又以卦形爲象이라 有以形爲象者하니 山下有雷頤와 頤中有物曰噬嗑이 是也니 此成卦之義也라.
인문(人文)은 인리(人理)의 차례이니,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天下)를 교화해서 천하(天下)가 예(禮)스러운 풍속을 이룸은 바로 성인(聖人)이 비(賁)를 쓰는 도(道)이다. 비(賁)의 상(象)은 산(山) 아래에 불이 있음을 취하였고, 또 괘변(卦變)에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文飾)하고 강(剛)이 올라가 유(柔)를 문식(文飾)함을 취하였다. 무릇 괘(卦)는 두 체(體)의 뜻과 두 상(象)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 둔괘(屯卦)는 험한 가운데에서 동함과 운뢰(雲雷)를 취하였고, 송괘(訟卦)는 위는 강(剛)하고 아래는 험한 것과 하늘〔天〕과 물〔水〕이 따로 감을 취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하나의 효(爻)가 괘(卦)를 이룬 이유가 된 것을 취한 것이 있으니, 유(柔)가 지위를 얻고 상하(上下)가 응함을 소축(小畜)이라 하며, 유(柔)가 존위(尊位)를 얻고 크게 중(中)하며 상하(上下)가 응(應)함을 대유(大有)라 한 것이 이것이다. 두 체(體)를 취하고 또 소장(消長)의 뜻을 취한 것이 있으니, 우레〔雷〕가 땅〔地〕 속에 있는 것이 복(復)이 되고, 산(山)이 땅〔地〕에 붙어 있는 것이 박(剝)이 됨이 이것이다. 두 상(象)을 취하고 겸하여 두 효(爻)가 서로 변하여 뜻이 된 것을 취한 것이 있으니, 풍뢰(風雷)인 익(益)은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탬을 겸하여 취하였고, 산하유택(山下有澤)인 손(損)은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탬을 겸하여 취한 것이 이것이다. 이미 두 상(象)으로 괘(卦)를 이루었는데 다시 효(爻)의 뜻을 취한 것이 있으니, 쾌괘(夬卦)의 강(剛)이 유(柔)를 터놓은 것과 구괘(姤卦)의 유(柔)가 강(剛)을 만남이 이것이다. 쓰임으로 괘(卦)를 이룬 것이 있으니, 물〔水〕에 들어가 물을 퍼올림이 정(井)이란 것과 나무〔木〕 위에 불〔火〕이 있음이 정(鼎)이란 것이 이것이니, 정괘(鼎卦)는 또 괘(卦)의 형체(形體)로 상(象)을 삼았다. 형체(形體)로 상(象)을 삼은 것이 있으니, 산(山) 아래에 우레〔雷〕가 있음이 이(頤)란 것과 입안에 물건이 있음이 서합(噬嗑)이란 것이 이것이니, 이는 괘(卦)를 이룬 뜻이다.
如剛上柔下, 損上益下는 謂剛居上, 柔在下하고 損於上, 益於下니 據成卦而言이요 非謂就卦中升降也라 如訟, 无妄에 云剛來가 豈自上體而來也리오 凡以柔居五者는 皆云柔進而上行하니 柔는 居下者也어늘 乃居尊位면 是進而上也니 非謂自下體而上也라 卦之變은 皆自乾坤이어늘 先儒不達이라 故謂賁本是泰卦라 하니 豈有乾坤重而爲泰하고 又由泰而變之理리오 下離는 本乾中爻 變而成離요 上艮은 本坤上爻 變而成艮이니 離在內라 故云柔來요 艮在上이라 故云剛上이니 非自下體而上也라 乾坤變而爲六子하고 八卦重而爲六十四하니 皆由乾坤之變也라.
강상유하(剛上柔下)와 손상익하(損上益下)는 강(剛)이 위에 거하고 유(柔)가 아래에 있으며,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주는 것이니, 성괘(成卦)를 근거하여 말한 것이요 괘(卦) 가운데에 나아가 오르내림을 말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송괘(訟卦)와 무망괘(无妄卦)에서 강(剛)이 온다고 말한 것이 어찌 상체(上體)로부터 온 것이겠는가. 무릇 유(柔)가 오(五)에 거한 것은 모두 유(柔)가 나아가 위로 행한다고 말하였으니, 유(柔)는 아래에 있는 것인데 존위(尊位)에 거하였다면 이는 나아가 올라간 것이니, 하체(下體)로부터 올라감을 말한 것이 아니다. 괘(卦)가 변함은 모두 건(乾)·곤(坤)으로부터 왔는데, 선유(先儒)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괘(賁卦)는 본래 태괘(泰卦)였다.”고 말하니, 어찌 건(乾)과 곤(坤)이 겹쳐서 태괘(泰卦)가 되었는데, 또 태괘(泰卦)로 말미암아 변할 수가 있겠는가. 하체(下體)의 이(離)는 본래 건(乾)의 중효(中爻)가 변하여 이(離)를 이룬 것이고, 상체(上體)의 간(艮)은 본래 곤(坤)의 상효(上爻)가 변하여 간(艮)을 이룬 것이니, 이(離)는 안에 있기 때문에 유(柔)가 왔다고 말한 것이며, 간(艮)은 위에 있기 때문에 강(剛)이 올라갔다고 말한 것이니, 하체(下體)로부터 올라간 것은 아니다. 건곤(乾坤)이 변하여 육자(六子)가 되었고 팔괘(八卦)가 겹쳐서 육십사괘(六十四卦)가 되었으니, 모두 건곤(乾坤)의 변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本義】極言賁道之大也라.
비도(賁道)의 큼을 극언(極言)하였다.
象曰 山下有火賁니 君子以하여 明庶政하되 无敢折獄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산(山) 아래에 불이 있는 것이 비(賁)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여러 정사(政事)를 밝히되 감히 옥사(獄事)를 결단(決斷)하지 않는다.”
【本義】 明庶政하고,
【본의】 여러 정사(政事)를 밝히고,
【傳】 山者는 草木百物之[一无之字]所聚生也니 火在其[一无其字]下而上照庶類하여 皆被其光明하니 爲賁飾之象也라 君子觀山下有火明照之象하여 以修明其庶政하여 成文明之治호되 而无果敢於折獄也라 折獄者는 人君之所致愼也니 豈可恃其[一无其字]明而輕自用乎아 乃聖人之用心也니 爲戒深矣로다 象之所取는 唯以山下有火하여 明照庶物하여 以用明爲戒요 而賁亦自有无敢折獄之義라 折獄者는 專用情實이니 有文飾則沒其情矣라 故无敢用文以折獄也라.
산(山)은 초목(草木)과 온갖 사물이 모여서 자라는 곳이니, 불이 그 아래에 있으면서 위로 여러 종류를 비추어 모두 광명(光明)함을 입으니, 이는 비식(賁飾)하는 상(象)이 된다. 군자(君子)가 산(山) 아래에 불이 있어 밝게 비추는 상(象)을 보고서, 여러 정사(政事)를 수명(修明)하여 문명(文明)한 정치를 이루되 옥사(獄事)를 결단함에 과감하게 하지 않는다.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것은 인군(人君)이 지극히 신중히 하는 바이니, 어찌 밝음을 믿고서 가볍게 스스로 쓰겠는가. 이는 성인(聖人)의 마음씀이니, 경계함이 깊다. 상(象)에서 취한 것은 오직 산(山) 아래에 불이 있어 여러 물건을 밝게 비춘다 하여 밝음을 쓰는 것을 경계하였고, 비(賁)에 또한 스스로 절옥(折獄)을 과감히 하지 않는 뜻이 있다.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것은 오로지 실정(實情)을 써야 하니, 문식(文飾)이 있으면 그 실정(實情)을 없애게 된다. 그러므로 감히 문식(文飾)을 써서 옥사(獄事)를 결단하지 않는 것이다.
【本義】 山下有火에 明不及遠하니 明庶政은 事之小者요 折獄은 事之大者라 內離明而外艮止라 故取象如此하니라.
산(山) 아래에 불이 있어 밝음이 먼 곳에 미치지 못하니, 여러 정사(政事)를 밝힘은 작은 일이요, 옥사(獄事)를 결단함은 큰 일이다. 안은 이(離)라서 밝고 밖은 간(艮)이라서 그치므로 상(象)을 취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初九는 賁其趾니 舍車而徒로다.
초구(初九)는 발을 꾸밈이니,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걷도다.
【傳】 初九以剛陽居明體而處下하니 君子有剛明之德而在下者也라 君子在无位之地하여 無所施於天下요 唯自賁飾其所行而已니 趾는 取在下而所以行也라 君子修飾之道는 正其所行하고 守節處義하여 其行不苟하니 義或不當이면 則舍車輿而寧徒行하나니 衆人之所羞나 而君子以爲賁也라 舍車而徒之義는 兼於比應取之라 初比二而應四하니 應四는 正也요 與二는 非正也라 九之剛明守義하여 不近與於二而遠應於四하여 舍易而從難하니 如舍車而徒行也라 守節義는 君子之賁也라 是故로 君子所賁는 世俗所羞요 世俗所貴[一作賁]는 君子所賤이라 以車徒爲言者는 因趾與行爲義也라.
초구(初九)가 강양(剛陽)으로 명체(明體)에 거하고 아래에 처하였으니, 군자(君子)로서 강명(剛明)한 덕(德)이 있으면서 아래에 있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지위가 없는 자리에 있어서 천하(天下)에 베풀 수가 없고 오직 스스로 그 행하는 바를 꾸밀 뿐이니, 지(趾)는 아래에 있으면서 걸어가는 것을 취하였다. 군자(君子)가 수식(修飾)하는 도(道)는 행하는 바를 바르게 하고 절개를 지키며 의(義)에 처하여 그 행실이 구차하지 않아서 의(義)에 혹 마땅하지 않으면 수레를 버리고 차라리 도보로 걸어가니, 중인(衆人)들은 부끄럽게 여기나 군자(君子)는 꾸밈으로 여기는 것이다.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걷는다는 뜻은 비(比)와 응(應)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초(初)는 이(二)와 가까이 있으면서 사(四)와 응(應)하니, 사(四)에 응(應)함은 정도(正道)이고 이(二)와 더붊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구(九)가 강명(剛明)하여 의(義)를 지켜서 가까이 이(二)와 더불지 않고 멀리 사(四)와 응(應)하여, 쉬운 것을 버리고 어려운 것을 따르니,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걷는 것과 같다. 절의(節義)를 지킴은 군자(君子)의 꾸밈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꾸미는 것은 세속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세속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군자(君子)가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수레와 도보로 말한 것은 발과 걸어가는 것을 인해서 뜻을 삼은 것이다.
【本義】 剛德明體로 自賁於下하니 爲舍非道之車而安於徒步之象이니 占者自處를 當如是也라.
강(剛)한 덕(德)과 밝은 체(體)로 스스로 아래에서 꾸미니, 도리(道理)가 아닌 수레를 버리고 도보를 편안히 여기는 상(象)이 된다. 점치는 이는 자처하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象曰 舍車而徒는 義弗乘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가는 것은 의리상 수레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傳】 舍車而徒行者는 於義에 不可以乘也일새라 初應四는 正也요 從二는 非正也니 近舍二之易而從四之難이 舍車而徒行也라 君子之賁는 守其義而已라.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가는 것은 의(義)에 수레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초(初)가 사(四)에 응(應)함은 정도(正道)이고 이(二)를 따름은 정도(正道)가 아니니, 가까이 이(二)의 쉬움을 버리고 사(四)의 어려움을 따름이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가는 것이다. 군자(君子)의 꾸밈은 그 의(義)를 지킬 뿐이다.
【本義】 君子之取舍는 決於義而已라.
군자(君子)의 취하고 버림은 의(義)로 결단할 뿐이다.
六二는 賁其須(鬚)로다.
육이(六二)는 수염을 꾸미도다.
【傳】 卦之爲賁 雖由兩爻之變이나 而文明之義爲重하니 二實賁之主也라 故主言賁之道하니라 飾於物者는 不能大變其質也요 因其質而加飾耳라 故取須義하니 須는 隨頤而動者也라 動止惟係於[一无於字]所附하니 猶善惡不由於賁也라 二之文明은 唯爲賁飾이요 善惡則係其質也라.
괘(卦)가 비(賁)가 됨이 비록 두 효(爻)의 변함으로 말미암았으나 문명(文明)의 뜻이 중하니, 이(二)는 실로 비(賁)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꾸미는 도(道)를 주장하여 말하였다. 사물을 꾸미는 것은 그 바탕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바탕을 따라 꾸밈을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수염의 뜻을 취하였으니, 수염은 턱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고 멈춤이 오직 붙어있는 바에 매어 있으니, 선악(善惡)이 꾸밈에 말미암지 않는 것과 같다. 이(二)의 문명(文明)은 다만 비식(賁飾)이 될 뿐이고, 선악(善惡)은 그 바탕에 매어 있다.
【本義】 二以陰柔로 居中正하고 三以陽剛而得正하여 皆无應與라 故二附三而動하니 有賁須之象이라 占者宜從上之陽剛而動也라.
이(二)는 음유(陰柔)로 중정(中正)에 거하고 삼(三)은 양강(陽剛)으로 정(正)을 얻어 모두 응여(應與)가 없다. 그러므로 이(二)가 삼(三)에게 붙어 움직이니, 수염을 꾸미는 상(象)이 있다. 점치는 이는 마땅히 위의 양강(陽剛)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象曰 賁其須는 與上興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수염을 꾸밈은 위와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다.”
【傳】 以須爲象者는 謂其與上同興也라 隨上而動하여 動止를 唯係所附也하니 猶加飾於物에 因其質而賁之하여 善惡在其質也라.
수염으로 상(象)을 삼은 것은 위와 함께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위를 따라 움직여 움직이고 멈춤이 오직 붙어있는 바에 매어 있으니, 마치 사물에 꾸밈을 가(加)할 적에 그 바탕을 따라 꾸며서 선악(善惡)이 그 바탕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九三은 賁如濡如하니 永貞하면 吉하리라.
구삼(九三)은 꾸밈이 윤택하니, 영구(永久)히 하고 정정(貞正)하면 길(吉)하리라.
【傳】 三은 處文明之極하여 與二四二陰으로 間處相賁하니 賁之盛者也라 故云賁如니 如는 辭助也라 賁飾之盛하여 光彩潤澤이라 故云濡如라 光彩之盛則有潤澤이니 詩云麀鹿濯濯이라 하니라 永貞吉은 三與二四非正應이어늘 相比而成相賁라 故戒以常永貞正이라 賁者는 飾也니 賁[一作修]飾之事는 難乎常也라 故永貞則吉이라 三與四相賁하고 又下比於二하니 二柔文一剛하여 上下交賁하니 爲賁之盛也라.
삼(三)은 문명(文明)의 극(極)에 처하여 이(二)와 사(四) 두 음효(陰爻) 사이에 처하여 서로 꾸미니, 꾸밈이 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여(賁如)’라 말했으니, 여(如)는 어조사(語助辭)이다. 꾸밈이 성하여 광채가 윤택하므로 ‘유여(濡如)’라 말하였다. 광채가 성하면 윤택함이 있으니, 《시경(詩經)》에 “암사슴과 숫사슴이 탁탁(濯濯)하다.” 하였다. ‘영정길(永貞吉)’은 삼(三)이 이(二)와 사(四)는 정응(正應)이 아닌데 서로 가까이 있어서 서로 꾸밈을 이루므로 상영(常永)하고 정정(貞正)하라고 경계한 것이다. 비(賁)는 꾸밈이니, 꾸미는 일은 항상하기 어려우므로 영정(永貞)하면 길(吉)한 것이다. 삼(三)이 사(四)와 서로 꾸미고 또 아래로 이(二)와 가까이 있으니, 두 유(柔)가 하나의 강(剛)을 문식(文飾)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꾸미니, 꾸밈이 성한 것이다.
【本義】 一陽이 居二陰之間하여 得其賁[而]潤澤者也라 然不可溺於所安이라 故有永貞之戒하니라.
한 양(陽)이 두 음(陰의 사이에 거하여 그 꾸밈을 얻어 윤택한 것이다. 그러나 편안한 바에 빠져서는 안 되므로 영정(永貞)하라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象曰 永貞之吉은 終莫之陵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영정(永貞)의 길(吉)함은 끝내 능멸(陵蔑)하는 이가 없는 것이다.”
【傳】 飾而不常하고 且非正이면[一有則字] 人所陵侮也라 故戒能永正則吉也라 其賁旣常而正이면 誰能陵之乎아.
꾸미되 항상하지 못하고 또 정도(正道)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능멸(陵蔑)과 업신여김을 당한다. 그러므로 영정(永正)하면 길(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그 꾸밈이 이미 항상되고 올바르면 누가 능멸(陵蔑)하겠는가.
六四는 賁如皤如하며 白馬翰如하니 匪寇면 婚媾리라.
육사(六四)는 꾸밈이 희며 백마(白馬)가 나는 듯이 달려가니, 도둑이 아니면 혼구(婚媾)리라.
【本義】 匪寇라 婚媾니라.
【본의】 도둑이 아니라 혼구(婚媾)이다.
【傳】 四與初爲正應하여 相賁者也니 本當賁如로되 而爲三所隔이라 故不獲相賁而皤如라 皤는 白也니 未獲賁也라 馬는 在下而動者也니 未獲相賁라 故云白馬요 其從正應之志如飛라 故云翰如라 匪爲九三之寇讐所隔이면 則婚媾遂其相親矣라 己之所乘과 與動於下者는 馬之象也라 初四는 正應이니 終必獲親이로되 第始爲其間隔耳라.
사(四)는 초(初)와 정응(正應)이 되어 서로 꾸미는 것이니, 본래 꾸며야 할 것이나 삼(三)에게 막혔으므로 서로 꾸밈을 얻지 못하여 흰 것이다. 파(皤)는 흼이니, 꾸밈을 얻지 못한 것이다. 말〔馬〕은 아래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니, 서로 꾸밈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백마(白馬)’라 하였고, 정응(正應)을 따르는 뜻이 나는 듯하므로 ‘한여(翰如)’라 하였다. 구삼(九三)의 구수(寇讐)에게 막힌 바가 되지 않으면 혼구(婚媾)가 서로 친함을 이룰 것이다. 자기가 타고 있는 것과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은 말의 상(象)이다. 초(初)와 사(四)는 정응(正應)이니, 끝내 반드시 친함을 얻을 것이나 다만 처음에 〈구삼(九三)에게〉 막히게 되었을 뿐이다.
【本義】 皤는 白也요 馬는 人所乘이니 人白則馬亦白矣라 四與初相賁者로되 乃爲九三所隔而不得遂라 故皤如요 而其往求之心이 如飛翰之疾也라 然九三이 剛正하여 非爲寇者也요 乃求婚媾耳라 故其象如此하니라.
파(皤)는 흼이요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니, 사람이 희면 말 역시 희다. 사(四)는 초(初)와 서로 꾸며주는 것이나 구삼(九三)에게 막힌 바가 되어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희며, 가서 구하려는 마음이 나는 듯이 빠른 것이다. 그러나 구삼(九三)은 강정(剛正)이어서 적이 되는 것가 아니요, 바로 혼구(婚媾)를 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六四는 當位疑也니 匪寇婚媾는 終无尤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사(六四)는 당한 자리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니, ‘비구혼구(匪寇婚媾)’는 끝내 원망이 없는 것이다.”
【본의】 끝내 화구(禍咎)가 없는 것이다.
【傳】 四與初相遠而三介於其間하니 是所當之位爲[一无爲字]可疑也라 雖爲三寇讐所隔하여 未得親於婚媾나 然其正應이 理直義勝하여 終必得合이라 故云終无尤也라 尤는 怨也니 終得相賁라 故无怨尤也라.
사(四)는 초(初)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삼(三)이 그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이는 당한 바의 자리가 의심스러울 만한 것이다. 비록 구수(寇讐)인 구삼(九三)에게 막힌 바가 되어 혼구를 가까이 할 수 없으나, 정응(正應)이 이치가 곧고 의리가 우세하여 끝내 반드시 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끝내 원망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尤)는 원망이니, 끝내 서로 꾸밈을 얻기 때문에 원망이 없는 것이다.
【本義】 當位疑는 謂所當之位可疑也요 終无尤는 謂若守正而不與면 亦无他患也라.
‘당위의(當位疑)’는 당한 바의 자리가 의심스러울 만함을 말한 것이요, ‘종불우(終不尤)’는 만약 정도(正道)를 지키고 더불지 않으면 역시 다른 화구(禍咎)가 없음을 이른 것이다.
六五는 賁于丘園이니 束帛이 戔戔이면 吝하나 終吉이리라.
육오(六五)는 구원(丘園)에서 꾸밈이니, 묶어놓은 비단이 재단되어 있듯이 하면 부끄러우나 끝내 길(吉)하리라.
【本義】 賁于丘園이나 束帛戔戔이니,
【본의】 구원(丘園)을 꾸미나 묶어놓은 비단이 적으니,
【傳】 六五以陰柔之質로 密比於上九剛陽之賢하니 陰比於陽하고 復无所係應하여 從之者也니 受賁於上九也라 自古設險守國이라 故城壘多依丘坂하니 丘는 謂在外而近且高者라 園圃之地는 最近城邑하니 亦在外而近者라 丘園은 謂在外而近者니 指上九也라 六五雖居君位나 而陰柔之才라 不足自守하고 與上之剛陽으로 相比而志從焉하여 獲賁於外比之賢하니 賁于丘園也라 若能受賁於上九하여 受[一作隨]其裁制하여 如束帛而[一无而字]戔戔이면 則雖其柔弱하여 不能自爲하여 爲可吝少나 然能從於人하여 成賁之功하니 終獲其吉也라 戔戔은 翦裁分裂之狀이라 帛은 未用則束之라 故謂之束帛이요 及其制爲衣服하여는 必翦裁分裂을 戔戔然이라 束帛은 喩六五本質이요 戔戔은 謂受人翦製而成用也라 其資於人은 與蒙同이로되 而蒙不言吝者는 蓋童蒙而賴於人은 乃其宜也어니와 非童幼而資賁於人은 爲可吝耳라 然享其功하니 終爲吉也라.
육오(六五)가 음유(陰柔)한 자질로 강양(剛陽)한 현자(賢者)인 상구(上九)와 매우 가까이 있으니, 음(陰)이 양(陽)과 가까이 있고 또 계응(係應)하는 바가 없어 상구(上九)를 따르는 것이므로 상구(上九)에게 꾸밈을 받는 것이다. 예로부터 험고(險固)한 곳을 만들어 나라를 지켰다. 이 때문에 성루(城壘)는 구판(丘坂)을 이용함이 많으니, 구(丘)는 밖에 있으면서 가깝고도 높은 곳을 이른다. 원포(園圃)의 땅은 성읍(城邑)과 가장 가까우니, 역시 밖에 있으면서 가깝다. 구원(丘園)은 밖에 있으면서 가까운 곳을 이르니, 상구(上九)를 가리킨다. 육오(六五)가 비록 군위(君位)에 거하였으나 음유(陰柔)한 자질이라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위의 강양(剛陽)과 서로 가까이 있어 뜻이 따라서 밖에 가까이 있는 현자(賢者)에게 꾸밈을 얻으니, 구원(丘園)에서 꾸미는 것이다. 만약 상구(上九)에게 꾸밈을 받아 그의 제재를 받아 묶어놓은 비단이 잔잔(戔戔)하듯이 하면 비록 유약(幼弱)하여 스스로 일을 하지 못해서 부끄러울 만하나 남을 따라서 꾸미는 공(功)은 이룰 수 있으니, 끝내는 그 길(吉)함을 얻게 된다. 잔잔(戔戔)은 비단을 재단하여 분열(分裂)하는 모양이다. 비단은 사용하지 않으면 묶어놓기 때문에 ‘속백(束帛)’이라 하였고, 재단하여 의복을 만들게 되면 반드시 재단하여 분열(分裂)하기를 잔잔(戔戔)하게 한다. 속백(束帛)은 육오(六五)의 본질을 비유한 것이며, 잔잔(戔戔)은 남의 재단을 받아 쓰임을 이룸을 말한 것이다. 남에게 의뢰함은 몽괘(蒙卦)와 같으나 몽괘(蒙卦)에서는 부끄러움을 말하지 않은 것은 동몽(童蒙)이 남에게 의뢰함은 당연하거니와 동유(童幼)가 아니면서 남에게 꾸밈을 의뢰함은 부끄러울 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功)을 누리니, 끝내 길(吉)함이 된다.
【本義】 六五柔中으로 爲賁之主하여 敦本尙實하니 得賁之道라 故有丘園之象이라 然陰性吝嗇이라 故有束帛戔戔之象이라 束帛은 薄物이요 戔戔은 淺小之意니 人而如此면 雖可羞吝이나 然禮奢寧儉이라 故得終吉이라.
육오(六五)가 유중(柔中)으로 비(賁)의 주체가 되어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니, 꾸미는 도(道)를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丘園)’의 상(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음(陰)의 성질은 인색하기 때문에 ‘속백잔잔(束帛戔戔)’의 상(象)이 있는 것이다. 속백(束帛)은 박한 물건이요 잔잔(戔戔)은 작다는 뜻이니, 사람으로서 이와 같으면 비록 부끄러울 만하나 예(禮)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므로 끝내 길(吉)함을 얻는 것이다.
象曰 六五之吉은 有喜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오(六五)의 길(吉)함은 기쁨이 있는 것이다.”
【傳】 能從人以成賁之功하여 享其吉美하니 是有喜也라.
남을 따라서 꾸미는 공(功)을 이루어 그 길(吉)함과 아름다움을 누리니, 이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上九는 白賁면 无咎리라.
상구(上九)는 꾸밈을 희게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白賁니,
【본의】 꾸밈이 희니,
【傳】 上九는 賁之極也니 賁飾之極이면 則失於華僞하니 唯能質白其賁면 則无過失之咎라 白은 素也니 尙質素면 則不失其本眞이라 所謂尙質素者는 非无飾也요 不使華沒實耳라.
상구(上九)는 비(賁)의 극(極)이니, 비식(賁飾)이 지극하면 화려하고 거짓됨에 잘못된다. 오직 그 꾸밈을 질백(質白)하게 하면 과실(過失)의 허물이 없다. 백(白)은 흼이니, 질소(質素)를 숭상하면 본질(本質)을 잃지 않는다. 이른바 ‘질소(質素)를 숭상한다’는 것은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요, 화려함이 실질을 없애지 않게 할 뿐이다.
【本義】 賁極反本하여 復於无色하니 善補過矣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비(賁)가 극에 이르러 근본으로 돌아와 무색(无色)에 돌아오니, 잘못을 잘 보충하였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白賁无咎는 上得志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백비무구(白賁无咎)’는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은 것이다.”
【傳】 白賁无咎는 以其在上而得志也라 上九爲得志者는 在上而文柔하여 成賁之功하고 六五之君이 又受其賁라 故雖居无位之地나 而實尸賁之功하여 爲得志也니 與他卦居極者異矣라 旣在上而得志하고 處賁之極하니 將有華僞失實之咎라 故戒以質素則无咎하니 飾不可過也라.
‘백비무구(白賁无咎)’는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었기 때문이다. 상구(上九)가 뜻을 얻음이 되는 것은 위에 있으면서 유(柔)를 문식(文飾)하여 꾸밈의 공(功)을 이루고, 육오(六五)의 군주(君主)가 또 그 꾸밈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위가 없는 자리에 거하였으나 실로 꾸미는 공(功)을 주관하여 뜻을 얻음이 되는 것이니, 다른 괘(卦)의 극(極)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고 비(賁)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장차 화려하고 거짓되어 실질을 잃는 허물이 있을 것이므로 ‘질소(質素)하면 허물이 없다’고 경계한 것이니, 꾸밈은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

22. 비(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