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복(復)
【傳】 復은 序卦에 物不可以終盡이니 剝이 窮上反下라 故受之以復이라 하니라 物无剝盡之理라 故剝極則復來[一无來字]하고 陰極則陽生하나니 陽剝極於上而復生於下는 窮上而反下也니 復所以次剝也라 爲卦 一陽이 生於五陰之下하니 陰極而陽復也라 歲十月에 陰盛旣極이라가 冬至則一陽復生於地中이라 故爲復也라 陽은 君子之道니 陽消極而復反은 君子之道消極而復長也라 故爲反善之義니라.
복괘(復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사물은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박(剝)이 위에서 궁극하면 아래로 돌아오므로 복괘(復卦)로 받았다.” 하였다. 사물은 박진(剝盡)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박(剝)이 지극하면 복(復)이 오고, 음(陰)이 지극하면 양(陽)이 생기니, 양(陽)의 소멸(消蔑)이 위에서 지극하여 다시 아래에서 생겨남은 위에서 지극함에 아래로 돌아옴이니, 복괘(復卦)가 이 때문에 박괘(剝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하나의 양(陽)이 다섯 음(陰)의 아래에서 생기니, 음(陰)이 지극함에 양(陽)이 회복한 것이다. 10월에 음(陰)의 성함이 이미 지극하였다가 동지(冬至)가 되면 한 양(陽)이 다시 땅 속에서 생기므로 복(復)이라 한 것이다. 양(陽)은 군자(君子)의 도(道)이니, 양(陽)의 사라짐이 지극하다가 다시 돌아옴은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짐이 지극하다가 다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으로 돌아오는 뜻이 된다.
復은 亨하여 出入에 无疾하여 朋來라야 无咎리라.
복(復)은 형통하여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어서 벗이 와야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復은 亨하니 出入에 无疾하며 朋來에 无咎니라.
【본의】 복(復)은 형통하니, 나가고 들어옴에 병이 없으며 벗이 옴에 허물이 없다.
【傳】 復亨은 旣復則亨也라 陽氣復生於下하면 漸亨盛而生育萬物하며 君子之道旣復이면 則漸以亨通하여 澤於天下라 故復則有亨盛之理也라 出入无疾은 出入은 謂生長이니 復生於內는 入也요 長進於外는 出也니 先云出은 語順耳라 陽生은 非自外也로되 來於內라 故謂之入이라 物之始生에 其氣至微라 故多屯艱하고 陽之始生에 其氣至微라 故多摧折하니 春陽之發에 爲陰寒所折하니 觀草木於朝暮則可見矣라 出入无疾은 謂微陽生長에 无害之者也니 旣无害之요 而其類漸進而來면 則將亨盛이라 故无咎也니 所謂咎는 在氣則爲差忒이요 在君子[一有之道字]則爲抑塞하여 不得盡其理라 陽之當復에 雖使有疾之나 固不能止其復也요 但爲阻礙耳며 而卦之才有无疾之義하니 乃復道之善也라 一陽이 始生至微하니 固未能勝群陰而發生萬物이요 必待諸陽之來然後에 能成生物之功而无差忒하니 以朋來而无咎也라 三陽子丑寅之氣 生成萬物은 衆陽之功也니 若君子之道 旣消而復에 豈能便勝於小人이리오 必待其朋類漸盛이면 則能協力以勝之也라
‘복형(復亨)’은 이미 회복하면 형통하는 것이다. 양기(陽氣)가 아래에서 다시 생겨나면 점점 형통하고 성하여 만물(萬物)을 생육(生育)하며, 군자(君子)의 도(道)가 이미 회복하면 점점 형통하여 천하(天下)에 은택을 내린다. 그러므로 복(復)에 형성(亨盛)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출입무질(出入无疾)’의 출입(出入)은 생장(生長)을 이르니, 양(陽)이 다시 안에서 생김은 들어옴이요 자라나서 밖으로 나아감은 나감이니, 먼저 출(出)을 말한 것은 말이 순해서일 뿐이다. 양(陽)이 생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나 안으로 오기 때문에 입(入)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물이 처음 생겨날 때에는 그 기운이 지극히 미미하므로 어려움이 많고, 양(陽)이 처음 생겨날 때에는 그 기운이 지극히 미미하므로 꺾임이 많으니, 봄의 양기(陽氣)가 발할 적에 음(陰)의 한기(寒氣)에게 꺾임을 당하니, 초목(草木)을 아침저녁에 보면 이것을 볼 수 있다. ‘출입무질(出入无疾)’은 미미한 양(陽)이 생장함에 해치는 것이 없음을 이르니, 이미 해치는 것이 없고 붕류(朋類)가 점진(漸進)하여 오면 장차 형성(亨盛)해지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허물이란 것은 기운에 있어서는 어그러짐이 되고, 군자(君子)에게 있어서는 꺾이고 막힘이 되어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陽)이 회복할 때에 비록 가령 병들게 함이 있더라도 진실로 그 회복함을 저지하지는 못하고 다만 장애가 될 뿐이며, 괘(卦)의 재질에 병이 없는 뜻이 있으니, 바로 회복하는 도(道)에 선(善)한 것이다. 하나의 양(陽)이 처음 생겨 지극히 미미하니, 진실로 여러 음(陰)을 이겨 만물(萬物)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반드시 여러 양(陽)이 오기를 기다린 뒤에야 물건을 낳는 공을 이루어 어그러짐이 없으니, 벗이 와야 허물이 없는 것이다. 세 양(陽)인 자(子)·축(丑)·인(寅)의 기운이 만물(萬物)을 생성(生成)함은 여러 양(陽)의 공(功)이니, 군자(君子)의 도(道)가 이미 소멸되었다가 회복함에 어찌 곧바로 소인(小人)을 이기겠는가. 반드시 붕류(朋類)가 점점 성해지기를 기다리면 협력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이다.
反復其道하여 七日에 來復하니 利有攸往이니라.
그 도(道)를 반복하여 7일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本義】 七日來復이요.
【본의】 7일만에 와서 회복하고
【傳】 謂消長之道 反復迭至니 陽之消 至七日而來復이라 姤는 陽之始消也니 七變而成復이라 故云七日이니 謂七更也라 臨云八月有凶은 謂陽長至於陰長에 歷八月也라 陽進則陰退하고 君子道長則小人道消라 故利有攸往也라.
소장(消長)의 도(道)가 반복하여 번갈아 이름을 말하였으니, 양(陽)의 사라짐이 7일에 이르러 와서 회복하는 것이다. 구괘(姤卦)는 양(陽)이 처음 사라지는 것이니, 일곱 번 변하여 복괘(復卦)를 이루므로 7일이라 말하였으니, 일곱 번 바뀜을 이른다. 임괘(臨卦)에 “팔월(八月)에 흉함이 있다.”고 말한 것은 양(陽)이 자라남으로부터 음(陰)이 자라남에 이르기까지 8개월이 걸리는 것을 이른다. 양(陽)이 나아가면 음(陰)이 물러가고,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면 소인(小人)의 도(道)가 사라지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本義】 復은 陽復生於下也라 剝盡則爲純坤十月之卦而陽氣已生於下矣니 積之踰月然後에 一陽之體 始成而來復이라 故十有一月이 其卦爲復이라 以其陽旣往而復反이라 故有亨道요 又內震外坤하여 有陽動於下而以順上行之象이라 故其占이 又爲己之出入에 旣得无疾하고 朋類之來에 亦得无咎라 又自五月姤卦一陰始生으로 至此七爻而一陽來復하니 乃天運之自然이라 故其占이 又爲反復其道하여 至於七日이면 當得來復이요 又以剛德方長이라 故其占이 又爲利有攸往也라 反復其道는 往而復來, 來而復往之意라 七日者는 所占來復之期也라.
복(復)은 양(陽)이 다시 아래에서 생기는 것이다. 깎여 다하면 순곤(純坤)인 10월의 괘(卦)가 되는데, 양기(陽氣)가 이미 아래에서 생기니, 쌓아서 한 달이 지난 뒤에야 하나의 양(陽)의 체(體)가 비로소 이루어져 와서 회복한다. 그러므로 11월은 그 괘(卦)가 복(復)이 된 것이다. 양(陽)이 이미 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므로 형통할 도(道)가 있고, 또 안은 진(震)이고 밖은 곤(坤)이어서 양(陽)이 아래에서 동하여 순히 위로 행하는 상(象)이 있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또 자신이 출입(出入)함에 이미 병이 없고, 붕류(朋類)들이 옴에 또 무구(无咎)가 되는 것이다. 또 5월의 구괘(姤卦)에 하나의 음(陰)이 처음 생김으로부터 이 일곱 효(爻)에 이르면 하나의 양(陽)이 와서 회복하니, 이는 바로 천운(天運)의 자연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또 도(道)를 반복하여 7일에 이르면 마땅히 와서 회복함을 얻는 것이며, 또 강(剛)의 덕(德)이 막 자라나기 때문에 그 점(占)이 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반복기도(反復其道)’는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는 뜻이다. ‘7일’은 점(占)에 와서 회복할 시기인 것이다.
彖曰 復亨은 剛反이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복(復)이 형통함은 강(剛)이 돌아오기 때문이니,
【本義】 剛反則亨이라.
강(剛)이 돌아오면 형통한다.
動而以順行이라 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니라.
동하여 순함으로 행하기 때문에 ‘출입무질붕래무구(出入无疾朋來无咎)’가 된 것이다.
【傳】 復亨은 謂剛反而亨也라 陽剛消極而來反하니 旣來反則漸長盛而亨通矣라 動而以順行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는 以卦才로 言其所以然也니 下動而上順은 是動而以順行也라 陽剛反하고 以順動이라 是以得出入无疾하여 朋來而无咎也요 朋之來도 亦順動也라.
‘복형(復亨)’은 강(剛)이 돌아와 형통함을 이른다. 양강(陽剛)이 소진(消盡)함이 지극하였다가 와서 회복하니, 이미 와서 회복하면 점점 장성(長盛)하여 형통한다. ‘동이이순행(動而以順行) 시이출입무질붕래무구(是以出入无疾朋來无咎)’는 괘(卦)의 재질로 그 소이연(所以然)을 말한 것이니, 아래가 동하고 위가 순함은 동하여 순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양강(陽剛)이 돌아오고 순히 동하기 때문에 출입(出入)함에 병이 없어서 붕류(朋類)들이 와 허물이 없는 것이며, 붕류(朋類)들이 오는 것도 역시 순히 동하는 것이다.
【本義】 以卦德而言이라.
괘덕(卦德)으로 말하였다.
反復其道七日來復은 天行也요,
그 도(道)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함은 하늘의 운행(運行)이요,
【本義】 陰陽消息은 天運然也라.
음양(陰陽)의 사라지고 자라남은 하늘의 운행(運行)이 그러한 것이다.
利有攸往은 剛長也일새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움은 강(剛)이 자라나기 때문이니,
【本義】 以卦體而言이니 旣生則漸長矣라.
괘체(卦體)로 말하였으니, 이미 생기면 점점 자라난다.
復에 其見天地之心乎인저.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傳】 其道反復往來하여 迭消迭息[一有也字]이라 七日而來復者는 天地之運行如是也니 消長相因은 天之理也라 陽剛君子之道長이라 故利有攸往이라 一陽復於下는 乃天地生物之心也라 先儒皆以靜爲見天地之心이라 하니 蓋不知動之端이 乃天地之心也라 非知道者면 孰能識之리오.
도(道)는 반복하고 왕래하여 번갈아 사라지고 번갈아 자라난다. 7일만에 와서 회복한다는 것은 천지(天地)의 운행이 이와 같은 것이니, 소장(消長)이 서로 인함은 하늘의 이치이다. 양강군자(陽剛君子)의 도(道)가 자라나기 때문에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하나의 양(陽)이 아래에서 회복함은 바로 천지(天地)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선유(先儒)들은 모두 이르기를 “정(靜)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동(動)의 단서가 바로 천지(天地)의 마음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도(道)를 아는 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本義】 積陰之下에 一陽復生하니 天地生物之心이 幾於滅息而至此乃復을 可見이요 在人則爲靜極而動, 惡極而善하여 本心幾息而復見(현)之端也라 程子論之詳矣요 而邵子之詩에 亦曰 冬至子之半에 天心无改移라 一陽初動處요 萬物未生時라 玄酒味方淡이요 大音聲正希라 此言如不信이어든 更請問包羲라 하니 至哉라 言也여 學者宜盡心焉이니라.
쌓인 음(陰)의 아래에 하나의 양(陽)이 다시 생기니, 천지(天地)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거의 멸식(滅息)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다시 회복됨을 볼 수 있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靜)이 지극함에 동(動)하고 악(惡)이 지극함에 선(善)해져서, 본심(本心)이 거의 종식(終熄)되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단서가 된다. 정자(程子)의 의논이 상세하며, 소자(邵子)의 시(詩)에 또 이르기를 “동지(冬至)의 자시(子時) 반(半)에 천심(天心)은 고치거나 옮김이 없구나. 하나의 양(陽)이 처음 동하는 곳이요, 만물(萬物)이 아직 생기지 않은 때이로다. 현주(玄酒)는 맛이 담담하고 대음(大音)은 소리가 없는 법이다. 이 말을 만일 믿지 않거든 다시 복희(伏羲)에게 물어 보라.” 하였으니, 지극하다, 이 말씀이여!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象曰 雷在地中이 復이니 先王이 以하여 至日에 閉關하여 商旅不行하며 后不省方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우레가 땅 가운데 있음이 복(復)이니, 선왕(先王)이 이로써 동짓날에 관문(關門)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며 임금은 사방을 시찰하지 않는다.”
【傳】 雷者는 陰陽相薄而成聲이나 當陽之微하여 未能發也니라 雷在地中은 陽始復之時也라 陽始生於下而甚微하니 安靜[一作順]而後能長이라 先王順天道하여 當至日陽之始生하면 安靜以養之라 故閉關하여 使商旅不得行하고 人君不省視四方하나니 觀復之象而順天道也라 在一人之身에도 亦然하니 當安靜以養其陽也라.
우레는 음양(陰陽)이 서로 부딪쳐 소리를 이루는 것이나, 양(陽)이 미미할 때를 당하여 아직 발하지 못한다. 우레가 땅 속에 있음은 양(陽)이 처음 회복하는 때이다. 양(陽)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 심히 미미하니, 안정한 뒤에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선왕(先王)은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동짓날 양(陽)이 처음 생길 때를 당하면 안정(安靜)하여 양(陽)을 기른다. 그러므로 관문(關門)을 닫아 장사꾼과 여행자가 다니지 못하게 하고 인군(人君)은 사방을 시찰하지 않으니, 이는 복괘(復卦)의 상(象)을 보고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니, 마땅히 안정(安靜)하여 양(陽)을 길러야 한다.
【本義】 安靜以養微陽也라 月令에 是月齋戒掩身하여 以待陰陽之所定이라 하니라.
안정(安靜)하여 미미한 양(陽)을 기르는 것이다. 《예기(禮記)》〈월령(月令)〉에 “이 달에 재계(齋戒)하고 몸을 가려서 음양(陰陽)이 정해지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初九는 不遠復이라 无祗悔니 元吉하니라.
초구(初九)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지라 뉘우침에 이름이 없으니,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다.
【傳】 復者는 陽反來復也니 陽은 君子之道라 故復爲反善之義라 初는 剛陽來復하여 處卦之初하니 復之最先者也니 是不遠而復也라 失而後有復이니 不失則何復之有리오 唯失之不遠而復이면 則不至於悔니 大善而吉也라 祗는 宜音柢니 抵也라 玉篇云適也라 하니 義亦同하니 无祗悔는 不至於悔也라 坎卦曰 祗旣平无咎라 하니 謂至旣平也라 顔子无形顯之過일새 夫子謂其庶幾라 하시니 乃无祗悔也라 過旣未形而改면 何悔之有리오 旣未能不勉而中하고 所欲不踰矩면 是有過也나 然其明而剛이라 故一有不善이면 未嘗不知요 旣知면 未嘗不遽改라 故不至於悔하니 乃不遠復也라 祗는 陸德明音支라 하고 玉篇, 五經文字, 群經音辨에 見衣部하니라.
복(復)은 양(陽)이 돌아와서 회복함이니, 양(陽)은 군자(君子)의 도(道)이므로 복(復)은 선(善)으로 돌아오는 뜻이 된다. 초(初)는 강양(剛陽)이 와서 회복하여 괘(卦)의 초(初)에 처하였으니, 돌아오기를 가장 먼저한 것이니, 이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잃은 뒤에 돌아옴이 있는 것이니, 잃지 않았다면 무슨 돌아옴이 있겠는가. 오직 잃기를 멀리 하지 않고 돌아오면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이는 크게 선(善)하여 길(吉)한 것이다. 지(祗)는 마땅히 음(音)이 저(柢)여야 하니, 이름이다. 《옥편(玉篇)》에는 ‘적(適)’이라 하였는데 뜻이 역시 같으니, ‘무지회(无祗悔)’는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이미 평함에 이르러 허물이 없다.”라 하였으니, 이미 평(平)함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안자(顔子)는 드러난 과실이 없으므로 부자(夫子)가 “도(道)에 가깝다.”고 이르셨으니, 바로 뉘우침에 이름이 없는 것이다. 과실이 이미 드러나기 전에 고치면 무슨 뉘우침이 있겠는가. 이미 힘쓰지 않고 도(道)에 맞지 못하며 하고자 하는 바가 법도를 넘지 않게 하지 못한다면 이는 허물이 있는 것이나, 밝고 강(剛)하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불선(不善)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함이 없고, 이미 알면 일찍이 급히 고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은 것이니, 바로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지(祗)는 육덕명(陸德明)은 음(音)이 지(支)라 하였고, 《옥편(玉篇)》과 《오경문자(五經文字)》와 《군경음변(群經音辨)》에는 모두 의부(衣部)에 보인다.
【本義】 一陽復生於下하니 復之主也라 祗는 抵也라 又居事初하여 失之未遠에 能復於善하여 不抵於悔하니 大善而吉之道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하나의 양(陽)이 다시 아래에서 생기니, 복(復)의 주체이다. 지(祗)는 이름이다. 또 일의 초기에 있어 잃기를 멀리하기 전에 다시 선(善)으로 돌아와서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크게 선(善)하여 길(吉)한 방도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不遠之復은 以修身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옴은 이로써 몸을 닦는 것이다.”
【傳】 不遠而復者는 君子所以修其身之道也라 學問[一无問字]之道는 无他也라 唯其知不善이면 則速改以從善而已니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옴은 군자(君子)가 몸을 닦는 도(道)이다. 학문(學問)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없다. 오직 불선(不善)임을 알면 빨리 고쳐 선(善)을 따를 뿐이다.
六二는 休復이니 吉하니라.
육이(六二)는 아름다운 돌아옴이니, 길(吉)하다.
【傳】 二雖陰爻나 處中正而切比於初하여 志從於陽하니 能下仁也니 復之休美者也라 復者는 復於禮也니 復禮則爲仁이라 初陽復은 復於仁也어늘 二比而下之라 所以美而吉也라.
이(二)가 비록 음효(陰爻)이나 중정(中正)에 처하였고 초(初)와 매우 가까이 있어 뜻이 양(陽)을 따르니, 인자(仁者)에게 몸을 낮춤이니, 돌아옴에 아름다운 이이다. 복(復)은 예(禮)에 돌아옴이니, 예(禮)에 돌아오면 인(仁)이 된다. 초양(初陽)이 돌아옴은 인(仁)에 돌아옴인데, 이(二)가 초(初)에 가까이 있어 몸을 낮추기 때문에 아름다워 길(吉)한 것이다.
【本義】 柔順中正하고 近於初九而能下之하니 復之休美니 吉之道也라.
유순중정(柔順中正)하고 초구(初九)에 가까이 있으면서 낮추니, 돌아옴의 아름다움이니, 길(吉)한 방도이다.
象曰 休復之吉은 以下仁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휴복(休復)의 길(吉)함은 인자(仁者)에게 낮추기 때문이다.”
【傳】 爲復之休美而吉者는 以其能下仁也니 仁者는 天下之公이요 善之本也라 初復於仁이어늘 二能親而下之라 是以吉也라.
돌아옴이 아름다워 길(吉)함이 되는 것은 능히 인자(仁者)에게 낮추기 때문이니, 인(仁)은 천하(天下)의 공(公)이요 선(善)의 근본(根本)이다. 초(初)가 인(仁)에 돌아왔는데 이(二)가 가까이 하여 낮추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六三은 頻復이니 厲하나 无咎리라.
육삼(六三)은 돌아오기를 자주함이니,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
【傳】 三以陰躁로 處動之極하니 復之頻數(삭)而不能固者也라 復貴安固하니 頻復頻失이면 不安於復也라 復善而屢失은 危之道也니 聖人開遷善之道하여 與其復而危其屢失이라 故云厲无咎라하니 不可以頻失而戒其復也라 頻失則爲危어니와 屢復이 何咎리오 過在失而不在復也니라.
삼(三)은 음(陰)의 조급함으로 동(動)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돌아오기를 자주하여 견고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돌아옴은 편안하고 견고함을 귀히 여기니, 자주 돌아왔다가 자주 잃으면 돌아옴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선(善)으로 돌아왔다가 자주 잃음은 위태로운 방도이니, 성인(聖人)이 천선(遷善)의 길을 열어놓아 돌아옴을 허여(許與)하고 자주 잃음을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므로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고 말씀하였으니, 자주 잃는다 하여 그 돌아옴을 경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주 잃음은 위태로움이 되거니와 자주 돌아옴이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은 잃음에 있고 돌아옴에 있지 않다.
【本義】 以陰居陽하여 不中不正하고 又處動極하여 復而不固하니 屢失屢復之象이라 屢失故危요 復則无咎라 故其占又如此하니라.
음(陰)으로서 양위(陽位)에 거하여 중정(中正)하지 못하고 또 동(動)의 극(極)에 처하여 돌아오나 견고하지 못하니, 자주 잃고 자주 돌아오는 상(象)이다. 자주 잃으므로 위태롭고 돌아오면 허물이 없으므로 그 점(占)이 또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頻復之厲는 義无咎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빈복(頻復)의 위태로움은 의(義)에 허물이 없다.”
【傳】 頻復頻失이 雖爲危厲나 然復善之義는 則无咎也라.
자주 돌아오고 자주 잃음은 비록 위태로움이 되나 선(善)에 돌아오는 의(義)에는 허물이 없다.
六四는 中行하되 獨復이로다.
육사(六四)는 음(陰) 가운데를 행하나 홀로 돌아오도다.
【傳】 此爻之義를 最宜詳玩이라 四行群陰之中而獨能復하여 自處於正하고 下應於陽剛하니 其志可謂善矣라 不言吉凶者는 蓋四以柔로 居群陰之間하고 初方甚微하여 不足以相援하니 无可濟之理라 故聖人이 但稱其能獨復이요 而不欲言其獨從道而必凶也라 曰 然則不言无咎는 何也오 曰 以陰居陰하여 柔弱之甚하여 雖有從陽之志나 終不克濟하니 非无咎也일새니라.
이 효(爻)의 뜻을 가장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사(四)가 군음(群陰)의 가운데를 행하나 홀로 돌아와서 스스로 바름에 처하고 아래로 양강(陽剛)[초구(初九)]에 응(應)하니, 그 뜻이 선(善)하다고 이를 만하다. 길흉(吉凶)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사(四)가 유(柔)로서 군음(群陰)의 사이에 처하고 초(初)가 심히 미약하여 서로 구원하지 못하니, 이룰 수 있는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다만 홀로 돌아옴을 칭찬하고, 홀로 도(道)를 따르다가 반드시 흉하게 됨을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구(无咎)라고 말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음(陰)으로서 음위(陰位)에 거하여 유약(柔弱)함이 심하여 비록 양(陽)을 따르는 뜻이 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니, 무구(无咎)가 아니기 때문이다.”
【本義】 四處群陰之中而獨與初應하니 爲與衆俱行而獨能從善之象이라 當此之時하여 陽氣甚微하여 未足以有爲라 故不言吉이라 然理所當然이니 吉凶은 非所論也라 董子曰 仁人者는 正其義하고 不謀其利하며 明其道하고 不計其功이라 하니 於剝之六三及此爻에 見之라.
사(四)가 군음(群陰)의 가운데에 처하여 홀로 초(初)와 응(應)하니, 무리와 함께 가나 홀로 선(善)을 따르는 상(象)이 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양기(陽氣)가 매우 미약하여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길(吉)함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도리에 당연한 것이니, 길흉(吉凶)은 논할 바가 아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인인(仁人)은 의(義)를 바루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박괘(剝卦)의 육삼효(六三爻)와 이 효(爻)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象曰 中行獨復은 以從道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중행독복(中行獨復)’은 도(道)를 따르기 때문이다.”
【傳】 稱其獨復者는 以其從陽剛君子之善道也라.
홀로 돌아옴을 칭찬한 것은 양강군자(陽剛君子)의 선(善)한 도(道)를 따르기 때문이다.
六五는 敦復이니 无悔하니라.
육오(六五)는 돌아옴에 도타움이니, 뉘우침이 없다.
【傳】 六五以中順之德으로 處君位하여 能敦篤於復善者也라 故无悔라 雖本善이나 戒亦在其中矣라 陽復方微之時에 以柔居尊하고 下復无助하여 未能致亨吉也니 能无悔而已라.
육오(六五)는 중순(中順)한 덕으로 군위(君位)에 처하여 선(善)에 돌아오기를 돈독히 하는 이이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비록 본래 선(善)하나 경계가 역시 그 안에 들어 있다. 양(陽)의 회복함이 미약할 때에 유(柔)로 존위(尊位)에 거하고 아래에 다시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형통하여 길함을 이룰 수 없으니, 뉘우침이 없을 뿐이다.
【本義】 以中順居尊而當復之時하여 敦復之象이니 无悔之道也라.
중순(中順)으로 존위(尊位)에 거하고 복(復)의 때를 당하여 돌아오기를 도타히 하는 상(象)이니, 뉘우침이 없는 도(道)이다.
象曰 敦復无悔는 中以自考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돈복무회(敦復无悔)’는 중도(中道)로써 스스로 이룸이다.”
【傳】 以中道自成也라 五以陰居尊하여 處中而體順하니 能敦篤其志하여 以中道自成이면 則可以无悔也라 自成은 謂成其中順之德이라.
중도(中道)로써 스스로 이루는 것이다. 오(五)가 음(陰)으로 존위(尊位)에 거하여 중(中)에 처하고 체(體)가 순(順)하니, 그 뜻을 돈독히 해서 중도(中道)로써 스스로 이루면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중순(中順)한 덕(德)을 이룸을 이른다.
【本義】 考는 成也라.
고(考)는 이룸이다.
上六은 迷復이라 凶하니 有災眚하여 用行師면 終有大敗하고 以其國이면 君이 凶하여 至于十年히 不克征하리라.
상육(上六)은 돌아옴에 혼미하므로 흉하니, 재생(災眚)이 있어서 군(軍)을 동원하는 데에 쓰면 끝내 대패(大敗)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쓰면 군주(君主)가 흉하여 10년에 이르도록 능히 가지 못하리라.
【本義】 終有大敗하여 以其國君凶하여,
【본의】 끝내 대패(大敗)가 있어 국군(國君)과 더불어 흉하여,
【傳】 以陰柔居復之終하니 終迷不復者也니 迷而不復이면 其凶可知라 有災眚은 災는 天災니 自外來요 眚은 己過니 由自作이라 旣迷不復善하니 在己則動皆過失이요 災禍亦自外而至니 蓋所招也라 迷道不復은 无施而可니 用以行師則終有大敗요 以之爲國則君之凶也라 十年者는 數之終이니 至於十年不克征은 謂終不能行이라 旣迷於道하니 何時而可行也리오.
음유(陰柔)로 복괘(復卦)의 종(終)에 거하니 끝내 혼미(昏迷)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니, 혼미해서 돌아오지 못하면 흉함을 알 만하다. 재생(災眚)이 있다는 것은 재(災)는 천재(天災)이니 밖으로부터 온 것이요, 생(眚)은 자기의 허물이니 자기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이미 혼미하여 선(善)에 돌아오지 못하니, 자신에게 있어서는 동함이 모두 과실(過失)이요, 재화(災禍) 역시 밖으로부터 이르니 자기가 부른 것이다. 도(道)에 혼미하여 돌아오지 못함은 어느 곳에 시행해도 가(可)한 것이 없으니, 이로써 군(軍)을 출동하면 끝내 대패(大敗)가 있고,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군주(君主)가 흉하다. 10년이란 수(數)의 마지막이니, 10년에 이르도록 능히 가지 못한다는 것은 끝내 행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이미 도(道)에 혼미하니, 어느 때에 행할 수 있겠는가.
【本義】 以陰柔居復終하여 終迷不復之象이니 凶之道也라 故其占如此하니라 以는 猶及也라.
음유(陰柔)로 복(復)의 마지막에 거해서 끝내 혼미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상(象)이니, 흉한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以)는 급(及)과 같다.
象曰 迷復之凶은 反君道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미복(迷復)의 흉함은 군주(君主)의 도(道)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傳】 復則合道어늘 旣迷於復이면 與道相反也니 其凶可知라 以其國君凶은 謂其反君道也라 人君이 居上而治衆에 當從天下之善이어늘 乃迷於復하니 反君之道也라 非止人君이요 凡人迷於復者는 皆反道而凶也니라.
돌아오면 도(道)에 합하는데 이미 돌아옴에 혼미하면 도(道)와 상반(相反)되니,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이기국군흉(以其國君凶)’은 군주(君主)의 도(道)에 위반됨을 이른다. 인군(人君)이 위에 거하여 무리를 다스림에 마땅히 천하(天下)의 선(善)을 따라야 하는데, 돌아옴에 혼미하니 군주(君主)의 도(道)에 위반되는 것이다. 이는 다만 인군(人君)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요, 돌아옴에 혼미한 이는 모두 도(道)에 위반되어 흉하다.

24. 복(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