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감(坎)
【傳】 習坎은 序卦에 物不可以終過라 故受之以坎하니 坎者는 陷也라 하니라 理无過而不已하고 過極則必陷이니 坎所以次大過也라 習은 謂重習이니 他卦雖重이나 不加其名이어늘 獨坎加習者는 見其重險이니 險中復有險하여 其義大也라 卦中一陽이요 上下二陰이니 陽實陰虛하여 上下无據하여 一陽이 陷於二陰之中이라 故爲坎陷之義라 陽居陰中則爲陷이요 陰居陽中則爲麗(리)라 凡陽在上者는 止之象이요 在中은 陷之象이요 在下는 動之象이며 陰在上은 說之象이요 在中은 麗之象이요 在下는 巽之象이니 陷則爲險이라 習은 重也니 如學習溫習이 皆重複之義也요 坎은 陷[一作險]也니 卦之所言은 處險難之道라 坎은 水也니 一始於中하여 有生之最先者也라 故爲水니 陷은 水之體也라.
습감괘(習坎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사물은 끝내 과(過)할 수 없으므로 감괘(坎卦)로 받았으니, 감(坎)은 빠짐이다.” 하였다. 이치는 과(過)하고서 그치지 않음이 없고 과함이 지극하면 반드시 빠지니, 감괘(坎卦)가 이 때문에 대과괘(大過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습(習)은 중습(重習)을 이르니, 다른 괘(卦)는 비록 거듭하였더라도 그 이름을 더하지 않았는데 유독 감괘(坎卦)에만 습자(習字)를 더한 것은, 중험(重險)이라서 험한 가운데에 다시 험함이 있어 그 의(義)가 큼을 나타낸 것이다. 괘(卦)가 가운데에 하나의 양(陽)이 있고 위아래에 두 음(陰)이 있으니, 양(陽)은 실(實)하고 음(陰)은 허(虛)하여 위아래에 의거할 곳이 없어 하나의 양(陽)이 두 음(陰)의 가운데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감함(坎陷)의 뜻이 된 것이다. 양(陽)이 음(陰) 가운데에 있으면 빠짐이 되고, 음(陰)이 양(陽) 가운데에 있으면 걸림〔離〕이 된다. 무릇 양(陽)이 위에 있는 것은 멈추는 상(象)이요, 가운데에 있는 것은 빠지는 상(象)이요, 아래에 있는 것은 동하는 상(象)이며, 음(陰)이 위에 있는 것은 기뻐하는 상(象)이요, 가운데에 있는 것은 걸려 있는 상(象)이요, 아래에 있는 것은 공손한 상(象)이니, 빠지면 험함이 된다. 습(習)은 거듭함이니, 학습(學習)과 온습(溫習) 같은 것이 모두 중복(重複)하는 뜻이요, 감(坎)은 빠짐이니, 괘(卦)에서 말한 것은 험난함에 대처하는 도(道)이다. 감(坎)은 물〔水〕이니, 하나가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태어남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므로 물이 되었으니, 함(陷)은 물의 체(體)이다.
習坎은 有孚하여 維心亨이니 行하면 有尙이리라.
습감(習坎)은 정성이 있어 마음 때문에 형통(亨通)하니, 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
【傳】 陽實이 在中하니 爲中有孚信이라 維心亨은 維其心誠一이라 故能亨通이라 至誠은 可以通金石, 蹈水火하니 何險難之不可亨也리오 行有尙은 謂以誠一而行이면 則能出險하여 有可嘉尙이니 謂有功也라 不行則常在險中矣리라.
양실(陽實)이 가운데에 있으니, 가운데에 부신(孚信)이 있는 것이 된다. ‘유심형(維心亨)’은 마음이 정성스럽고 전일하기 때문에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지성(至誠)은 금석(金石)을 관통하고 수화(水火)를 헤쳐 나갈 수 있으니, 무슨 험난함인들 형통(亨通)하지 못하겠는가. ‘행유상(行有尙)’은 정성과 전일함으로 간다면 험함을 벗어나 가상(嘉尙)할 만함이 있음을 이르니, 공(功)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가지 않는다면 항상 험한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本義】 習은 重習也요 坎은 險陷也니 其象爲水라 陽陷陰中하니 外虛而中實也라 此卦上下皆坎이니 是爲重險이라 中實은 爲有孚心亨之象이니 以是而行이면 必有功矣라 故其占如此하니라.
습(習)은 중습(重習)이요 감(坎)은 험함(險陷)이니, 그 상(象)은 물이 된다. 양(陽)이 음(陰) 가운데에 빠져 있으니, 밖은 허하고 가운데는 실하다. 이 괘(卦)는 위아래가 다 감(坎)이니, 이것은 중험(重險)이 된다. 가운데가 실함은 부신(孚信)이 있어 마음 때문에 형통(亨通)한 상(象)이 되니, 이러한 방법으로 가면 반드시 공(功)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彖曰 習坎은 重險也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습감(習坎)은 거듭 험함이니,
【本義】 釋卦名義라.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水流而不盈하며 行險而不失其信이니,
물이 흘러가나 가득차지 않으며 험함을 행하되 신의(信義)를 잃지 않으니,
【傳】 習坎者는 謂重險也니 上下皆坎은 兩險相重也라 初六云坎窞이라 하니 是는 坎中之坎이니 重險也라 水流而不盈은 陽動於險中而未出於險하니 乃水性之流行而未盈於坎이니 旣盈則出乎坎矣라 行險而不失其信은 陽剛中實로 居險之中하니 行險而不失其信者也라 坎中實과 水就下는 皆爲信義니 有孚也라.
습감(習坎)은 중험(重險)을 이르니, 위아래가 모두 감(坎)인 것은 두 험함이 서로 중복된 것이다. 초육(初六)에는 ‘감담(坎窞)’이라 말하였으니, 이는 구덩이 가운데의 구덩이이므로 험하고 험한 것이다. ‘수류이불영(水流而不盈)’은 양(陽)이 험한 가운데에서 동하나 아직 험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물의 성질이 흘러가나 아직 구덩이에 가득차지 않은 것이니, 이미 가득찼다면 구덩이에서 나올 것이다. ‘행험이불실기신(行險而不失其信)’은 양강중실(陽剛中實)로 험한 가운데에 처하였으니, 험함을 행하나 신의를 잃지 않는 것이다. 감(坎)이 가운데가 실(實)함과 물이 아래로 내려감은 모두 신의(信義)가 되니, 부신(孚信)이 있는 것이다.
【本義】 以卦象으로 釋有孚之義하니 言內實而行有常也라.
괘상(卦象)으로 ‘유부(有孚)’의 뜻을 해석하였으니, 안이 진실하고 행실에 떳떳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維心亨은 乃以剛中也요,
마음 때문에 형통(亨通)하다는 것은 강중(剛中) 때문이요,
【본의】 강(剛)이 중(中)에 있기 때문이요,
【傳】 維其心可以亨通者는 乃以其剛中也일새라 中實은 爲有孚之象이니 至誠之道 何所不通[一作亨]이리오 以剛中之道而行이면 則可以濟險難而亨通也라.
그 마음이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은 강중(剛中) 때문이다. 중실(中實)은 유부(有孚)의 상(象)이 되니, 지성(至誠)의 도(道)는 어느 곳인들 통하지 못하겠는가. 강중(剛中)의 도(道)로써 행하면 험난함을 구제하여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行有尙은 往有功也라.
가면 가상(嘉尙)함이 있다는 것은 가면 공(功)이 있는 것이다.
【傳】 以其剛中之才而往이면 則有功이라 故可嘉尙이니 若止而不行이면 則常在險中矣[一作也] 리라 坎은 以能行爲功이라.
강중(剛中)의 재질로 가면 공이 있을 것이므로 가상(嘉尙)할 만한 것이니, 만약 멈추고 가지 않는다면 항상 험한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감(坎)은 가는 것을 공(功)으로 삼는다.
【本義】 以剛在中은 心亨之象이니 如是而往이면 必有功也라.
강(剛)으로서 중(中)에 있음은 마음 때문에 형통(亨通)한 상(象)이니, 이와 같이 하여 가면 반드시 공(功)이 있을 것이다.
天險은 不可升也요 地險은 山川丘陵也니 王公이 設險하여 以守其國하나니 險之時用이 大矣哉라.
하늘의 험함은 오를 수 없고 땅의 험함은 산천(山川)과 구릉(丘陵)이니, 왕공(王公)이 험함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니, 험(險)의 때와 용(用)이 크다.”
【傳】 高不可升者는 天之險也요 山川丘陵은 地之險也라 王公君人者 觀坎之象하여 知險之不可陵也라 故設爲城郭溝池之險하여 以守其國하고 保其民人하니 是有用險之時에 其用甚大라 故贊其大矣哉라 山河城池는 設險之大端也요 若夫尊卑之辨과 貴賤之分으로 明等威, 異物采하여 凡所以杜絶陵僭, 限隔上下者는 皆體險之用也라.
높아서 올라갈 수 없는 것은 하늘의 험함이요, 산천(山川)과 구릉(丘陵)은 땅의 험함이다. 왕공(王公)으로서 인군(人君)이 된 이는 감(坎)의 상(象)을 보고서 험한 것을 능멸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성곽(城郭)과 구지(溝池)의 험한 것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고 인민(人民)을 보호하니, 이는 험함을 쓸 때에 그 쓰임이 심히 큰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재(大矣哉)’라고 찬미한 것이다. 산하(山河)와 성지(城池)는 험함을 설치하는 큰 단서이며, 존비(尊卑)의 구분과 귀천(貴賤)의 신분으로 등위(等威)를 밝히고 물채(物采)를 달리하여 모든 능멸함과 참람함을 막고 상하(上下)를 한격(限隔)하는 것은 모두 험(險)을 체행(體行)하는 용(用)이다.
【本義】 極言之而贊其大也라.
극언(極言)하고 그 큼을 찬미하였다.
象曰 水洊至習坎이니 君子以하여 常德行하며 習敎事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 습감(習坎)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덕행(德行)을 항상하며 가르치는 일을 익힌다.”
【傳】 坎爲水니 水流仍洊而至니 兩坎相習은 水流仍洊之象也라 水自涓滴으로 至於尋丈하고 至於江海하여 洊習而不驟[一作讓]者也라 其因勢就下 信而有常이라 故君子觀坎水之象하여 取其有常이면 則常久其德行하나니 人之德行은 不常則僞也라 故當如水之有常이라 取其洊習相受면 則以習熟其敎令之事하나니 夫發政行敎는 必使民熟於聞聽然後能從이라 故三令五申之하나니 若驟告未喩에 遽責其從이면 雖嚴刑以驅之[一无之字]라도 不能也라 故當如水之洊習이라.
감(坎)은 물이 되고, 물의 흐름이 계속하고 거듭하여 이르니, 두 감(坎)이 서로 중복됨은 물의 흐름이 거듭하는 상(象)이다. 물은 한 방울로부터 심장(尋丈)에 이르고, 강해(江海)에 이르러서 거듭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는다. 지세(地勢)를 따라 아래로 내려감이 미덥고 항상함이 있으므로 군자(君子)가 감수(坎水)의 상(象)을 관찰하여 항상함이 있음을 취하면 덕행(德行)을 항상하고 오래하니, 사람의 덕행(德行)이 항상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물처럼 항상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듭하여 서로 받음을 취하면 교령(敎令)의 일을 익혀서 익숙하게 하니, 정사(政事)를 발하고 가르침을 행함은 반드시 백성이 듣기를 익숙히 한 뒤에야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거듭하는 것이니, 만약 갑자기 말하여 깨닫지 못했을 때에 대번에 따르기를 책한다면 비록 형벌을 엄히 시행하여 몰더라도 능히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물처럼 거듭하여야 하는 것이다.
【本義】 治己治人을 皆必重習然後에 熟而安之라.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다스림을 모두 반드시 거듭한 뒤에야 익숙하여 편안한 것이다.
初六은 習坎에 入于坎窞이니 凶하니라.
초육(初六)은 습감(習坎)에 깊은 구덩이로 들어감이니, 흉하다.
【傳】 初以陰柔[一无柔字]로 居坎險之下하여 柔弱无援而處不得當하니 非能出乎險也요 唯益陷於深險耳라 窞은 坎中之陷處니 已在習坎中이어늘 更入坎窞이면 其凶可知라.
초(初)가 음유(陰柔)로 감험(坎險)의 아래에 거하여 유약(柔弱)하고 원조(援助)가 없으며 처함이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험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깊은 험함으로 더욱 빠져들어갈 뿐이다. 담(窞)은 구덩이 가운데 깊이 들어간 곳이니, 이미 습감(習坎)의 가운데에 있는데, 다시 감담(坎窞)으로 들어갔다면 그 흉함을 알 만하다.
【本義】 以陰柔로 居重險之下하여 其陷益深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음유(陰柔)로 중험(重險)의 아래에 거하여 그 빠짐이 더욱 깊으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習坎入坎은 失道라 凶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습감(習坎)에 깊은 구덩이로 들어감은 도(道)를 잃은 것이어서 흉하다.”
【傳】 由習坎而更入坎窞은 失道也라 是以凶이니 能出於險이라야 乃不失道也라.
습감(習坎)으로 말미암아 다시 감담(坎窞)으로 들어감은 도(道)를 잃은 것이다. 이 때문에 흉하니, 험함에서 나와야 도(道)를 잃지 않는다.
九二는 坎에 有險하나 求를 小得하리라.
구이(九二)는 감(坎)에 험함이 있으나 구함을 조금 얻으리라.
【傳】 二當坎險之時하여 陷上下二陰之中하니 乃至險之地니 是有險也라 然其剛中之才로 雖未能出乎險中이나 亦可小自濟하여 不至如初의 益陷入于深險하니 是所求小得也라 君子處險難而能自保者는 剛中而已니 剛則才足自衛요 中則動不失宜니라.
이(二)가 감험(坎險)의 때를 당하여 위아래 두 음(陰)의 가운데에 빠졌으니, 지극히 험한 자리이니, 이는 험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중(剛中)의 재질로 험한 가운데에서 나올 수는 없으나 다소 스스로 구제할 수가 있어서 초육(初六)처럼 더욱 깊은 험함으로 빠져듦에는 이르지 않으니, 이는 구하는 바를 조금 얻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험난함에 처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은 강(剛)하고 중도(中道)에 맞게 할 뿐이니, 강(剛)하면 재주가 스스로 보위할 수 있고, 중도(中道)에 맞으면 동함에 마땅함을 잃지 않는다.
【本義】 處重險之中하여 未能自出이라 故爲有險之象이라 然剛而得中이라 故其占이 可以求小得也라.
중험(重險)한 가운데에 처하여 스스로 나오지 못하므로 험함이 있는 상(象)이 된다. 그러나 강(剛)하면서 중(中)을 얻었으므로 그 점(占)이 구하는 것을 조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象曰 求小得은 未出中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함을 조금 얻음은 험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傳】 方爲二陰所陷하여 在險之地로되 以剛中之才로 不至陷於深險하니 是所求小得이나 然未能出坎中之險也라.
막 두 음(陰)에게 빠진 바가 되어 험한 자리에 있으나 강중(剛中)의 재질로 깊은 험함에 빠짐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이는 구하는 바를 조금 얻은 것이나 감중(坎中)의 험함에서 나오지는 못한 것이다.
六三은 來之에 坎坎하며 險에 且枕하여 入于坎窞이니 勿用이니라.
육삼(六三)은 오고 감이 험하고 험하며, 험함에 또 의지하여 감담(坎窞)에 들어가니, 쓰지 말아야 한다.
【本義】 來之坎坎하여 險且枕하여,
【본의】 오고 감이 험하고 험하여, 험하고 또 베고 있어
【傳】 六三은 在坎陷[一作險]之時하여 以陰柔而居不中正하니 其處不善하여 進退與居 皆不可者也라 來下則入于險之中하고 之上則重險也니 退來與進之皆險이라 故云來之坎坎이라 하니 旣進退皆險而居亦險이라 枕은 謂支倚니 居險而支倚以處는 不安之甚也라 所處如此하니 唯益入於深險耳라 故云入于坎窞이요 如三所處之道[一无之道字]는 不可用也라 故戒勿用하니라.
육삼(六三)은 감함(坎陷)의 때에 있으면서 음유(陰柔)로서 거함이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처함이 선(善)하지 못하여 진퇴(進退)와 거처함이 모두 불가(不可)한 것이다. 아래로 오면 험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위로 가면 거듭 험하니, 물러나거나 나아감이 모두 험하므로 ‘내지감감(來之坎坎)’이라 하였으니, 이미 진퇴(進退)가 모두 험하고 거함이 또한 험한 것이다. 침(枕)은 의지하고 기댐을 이르니, 험(險)함에 거하여 의지하고 기대어 처함은 불안함이 심한 것이다. 처한 바가 이와 같으니, 오직 더욱 깊은 험함으로 빠져들어갈 뿐이므로 감담(坎窞)에 들어갔다고 말하였고, 육삼(六三)이 처한 바와 같은 도(道)는 쓸 수 없으므로 쓰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本義】 以陰柔不中正而履重險之間하여 來往皆險하여 前險而後枕하여 其陷益深하니 不可用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枕은 倚著(착)未安之意라.
음유(陰柔)로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중험(重險)의 사이를 밟고 있어 오고 감이 모두 험하여 앞에 험이 있고 뒤에 베고 있어 그 빠짐이 더욱 깊으니, 쓸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침(枕)은 의지하여 붙음이 편안하지 못한 뜻이다.
象曰 來之坎坎은 終无功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내지감감(來之坎坎)’은 끝내 공(功)이 없으리라.”
【傳】 進退皆險하고 處又不安하니 若用此道면 當益入于險이니 終豈能有功乎아 以陰柔로 處不中正하니 雖平易之地라도 尙致悔咎어든 況處險乎아 險者는 人之所欲出也로되 必得其道라야 乃能去之니 求去而失其道면 益困窮耳라 故聖人이 戒如三所處는 不可用也시니라.
나아가고 물러남이 모두 험하고 처함이 또 불안하니, 만약 이러한 도(道)를 쓴다면 더욱 험함에 들어갈 것이니, 끝내 어찌 공(功)이 있겠는가. 음유(陰柔)로서 처함이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비록 평이(平易)한 곳이라도 오히려 뉘우침과 허물을 이룰 것인데 하물며 험함에 있어서랴. 험(險)은 사람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바이나 반드시 그 도(道)를 얻어야 벗어날 수 있으니, 벗어나기를 구하면서 도(道)를 잃으면 더욱 곤궁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삼(三)이 처한 바와 같은 것은 쓸 수 없다고 경계하신 것이다.
六四는 樽酒와 簋貳를 用缶하고 納約自牖면 終无咎하리라.
육사(六四)는 동이의 술과 궤(簋) 둘을 질그릇으로 사용하고,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樽酒簋요 貳用缶하고 納約自牖니
【본의】 동이의 술과 궤(簋)요, 더하되 질그릇을 사용하고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으로부터 함이니,
【傳】 六四陰柔而下无助하니 非能濟天下之險者로되 以其在高位라 故言爲臣處險之道하니라 大臣이 當險難之時하여 唯至誠見信於君하여 其交固而不可間이요 又能開明君心이면 則可保无咎矣[一作也]라 夫欲上之篤信인댄 唯當盡其質實而已니 多儀而尙飾은 莫如燕享之禮라 故以燕享喩之하니 言當不尙浮飾이요 唯以質實이라.
육사(六四)는 음유(陰柔)로서 아래에 돕는 이가 없으니 천하(天下)의 험함을 구제할 수 있는 것가 아니나,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신하(臣下)가 되어 험함에 대처하는 도리를 말하였다. 대신(大臣)이 험난한 때를 당하여 오직 지성(至誠)으로 군주(君主)에게 신임을 받아서 교분이 견고하여 이간질할 수 없고, 또 군주(君主)의 마음을 열어 밝게 하면 무구(无咎)를 보전할 수 있다. 윗사람이 자신을 돈독히 신임하기를 바란다면 오직 질실(質實)을 다할 뿐이니, 의식이 많고 꾸밈을 숭상함은 연향(燕享)의 예(禮)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연향(燕享)으로 비유하였으니, 마땅히 부화(浮華)한 꾸밈을 숭상하지 말고 오직 질실(質實)로써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所用一樽之酒와 二簋之食에 復以瓦缶爲器면 質之至也라 其質實如此요 又須納約自牖니 納約은 謂進結於君之道요 牖는[一有有字]開通之義라 室之暗也라 故設牖하니 所以通明이라 自牖는 言自通明之處니 以況君心所明處라 詩云 天之牖民이 如壎如篪라 한대 毛公訓牖爲道(導)하니 亦開通之謂[一作義]라 人臣以忠信善道로 結於君心인댄 必自其所明處라야 乃能入也라 人心이 有所蔽하고 有所通하니 所蔽者는 暗處也요 所通者는 明處也니 當就其明處而告之하여 求信則易也라 故云納約自牖니 能如是면 則雖艱險之時라도 終得无咎也라.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밥을 사용하되 다시 질그릇을 그릇으로 삼았다면 질박(質朴)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 질실(質實)함이 이와 같고, 또 모름지기 맺음을 드리되 통한 곳으로부터 하여야 하니, ‘납약(納約)’은 군주(君主)에게 나아가 맺는 도(道)를 말하고, 유(牖)는 개통(開通)의 뜻이다. 방이 어둡기 때문에 창문을 설치하니, 통명(通明)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自牖)’는 통명(通明)한 곳으로부터 함을 말한 것이니, 군주(君主)의 마음에 밝은 곳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百姓)을 인도함이 질나팔과 같고 지(篪)와 같다.” 하였는데, 모공(毛公)은 유(牖)를 도(導)로 풀이하였으니, 역시 개통(開通)함을 이른다. 인신(人臣)이 충신(忠信)과 선(善)한 방도로 군주(君主)의 마음을 맺으려 한다면 반드시 임금이 밝게 아는 곳으로부터 하여야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가리운 바가 있고 통한 바가 있으니, 가리운 바는 어두운 곳이고 통한 바는 밝게 아는 곳이니, 마땅히 밝게 아는 곳에 나아가 아뢰어서 신임(信任)하기를 구하면 쉽다. 그러므로 ‘납약자유(納約自牖)’라 한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어렵고 험한 때라도 끝내 무구(无咎)를 얻을 것이다.
且如君心이 蔽於荒樂은 唯其蔽也故爾니 雖力詆其荒樂之非라도 如其不省에 何오 必於所不蔽之事에 推而及之면 則能悟其心矣라 自古로 能諫其君者는 未有不因其所明者也라 故訐直强勁者는 率多取忤하고 而溫厚明辯者는 其說多行이라 且如漢祖愛戚姬하여 將易太子하니 是其所蔽也라 群臣爭之者衆矣니 嫡庶之義와 長幼[一作少長]之序를 非不明也로되 如其蔽而不察에 何오 四老者는 高祖素知其賢而重之하니 此其不蔽之明心也라 故因其所明而及其事엔 則悟之如反手라 且四老人之力이 孰與張良群公卿及天下之士며 其言之切이 孰與周昌叔孫通이리오 然而不從彼而從此者는 由攻其蔽與就其明之異耳라 又如趙王太后愛其少子長安君하여 不肯使質於齊하니 此其蔽於私愛也라 大臣諫之雖强이나 旣曰蔽矣니 其能聽乎아 愛其子而欲使之長久富貴者는 其心之所明也라 故左師觸龍이 因其[一有所字]明而導之以長久之計라 故其聽也如響이라 非惟告於君者如此요 爲敎者亦然이라 夫敎는 必就人之所長이니 所長者는 心之所明也라 從其心之所明而入然後에 推及其餘니 孟子所謂成德達才是也라.
또 군주(君主)의 마음이 황락(荒樂)에 가려짐은 오직 마음에 가리워졌기 때문이니, 비록 황락(荒樂)의 나쁨을 강력히 비판하더라도 군주가 살펴보지 않음에 어쩌겠는가. 반드시 가리워지지 않은 일에 미루어 언급하면 그 마음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군주(君主)에게 간하는 이는 군주(君主)가 밝게 아는 바를 인하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실을 곧바로 지적하고 강경(强勁)한 이는 대부분 거스름을 취하고, 온후(溫厚)하고 밝게 변론(辯論)하는 이는 그 말이 행해짐이 많았다. 또 한고조(漢高祖)가 척희(戚姬)를 사랑하여 장차 태자(太子)를 바꾸려 하였으니, 이는 사랑에 가리워진 것이다. 군신(群臣)들이 간쟁한 이가 많았으니, 적서(嫡庶)의 의리와 장유(長幼)의 차례를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임금이 사랑에 가리워져 살펴보지 않음에 어쩌겠는가. 네 노인(老人)은 고조(高祖)가 평소에 그들의 어짊을 알고 소중히 여겼으니, 이는 가리워지지 않은 밝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밝게 아는 바를 인하여 그 일을 언급하자, 깨우침이 손을 뒤집는 것 같았다. 또 네 노인(老人)의 힘이 어찌 장량(張良) 등의 여러 공경(公卿)과 천하(天下)의 선비만 하겠으며, 말의 간절함이 어찌 주창(周昌)과 숙손통(叔孫通)만 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저들을 따르지 않고 이들을 따른 것은 그 가리워진 것을 공격함과 그 밝게 아는 것에 나아감의 차이 때문이다. 또 조왕(趙王)의 태후(太后)가 작은 아들인 장안군(長安君)을 사랑하여 제(齊)나라에 인질로 보내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사로운 사랑에 가리워진 것이다. 대신(大臣)들이 간(諫)하기를 비록 강력히 하였으나, 이미 마음이 가리워졌으니 그 말을 듣겠는가. 아들을 사랑하여 장구(長久)히 부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마음에 밝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사(左師)인 촉룡(觸龍)은 밝게 아는 것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계책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을 따름이 메아리처럼 빨랐던 것이다. 이는 다만 군주(君主)에게 아뢰는 이가 이와 같이 할 뿐만이 아니요, 사람을 가르치는 이 또한 그러하다. 가르침은 반드시 그 사람이 잘하는 바에 나아가야 하니, 잘하는 것은 마음에 밝게 아는 것이다. 그 마음에 밝게 아는 바를 따라 들어간 뒤에야 미루어 그 나머지에 미칠 수 있으니, 《맹자(孟子)》에 이른바 “덕(德)을 이루게 하고 재주를 통달(通達)하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本義】 鼂氏云 先儒讀樽酒簋爲一句하고 貳用缶爲一句라 하니 今從之라 貳는 益之也라 周禮大祭에 三貳라 하고 弟子職에 左執虛豆하고 右執挾匕하여 周旋而貳 是也라 九五는 尊位어늘 六四近之하니 在險之時에 剛柔相際라 故有但用薄禮하고 益以誠心進結自牖之象이라 牖는 非所由之正이요 而室之所以受明也니 始雖艱阻나 終得无咎라 故其占如此하니라.
조씨(鼂氏)는 이르기를 “선유(先儒)가 ‘준주궤(樽酒簋)’를 한 구(句)로 읽고 ‘이용부(貳用缶)’를 한 구(句)로 읽었다.” 하였으니, 지금 그 말을 따른다. 이(貳)는 더함이다. 《주례(周禮)》에 “큰 제사(祭祀)에 세 번 더한다.” 하고, 〈제자직(弟子職)〉에 “왼쪽으로는 빈 그릇을 잡고 오른쪽으로는 숟가락을 잡아 주선(周旋)하여 더한다.” 한 것이 이것이다. 구오(九五)는 존위(尊位)인데 육사(六四)가 가까이 있으니, 험한 때에 있어서 강유(剛柔)가 서로 교제하므로 다만 박한 예(禮)를 쓰고, 더욱 성심(誠心)으로 나아가 맺되 유(牖)로부터 하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유(牖)는 다니는 바른 문은 아니고 방이 밝음을 받는 곳이니, 처음은 비록 어렵고 막히나 끝내 무구(无咎)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樽酒簋貳는 剛柔際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준주궤이(樽酒簋貳)’는 강(剛)과 유(柔)가 교제하기 때문이다.”
【傳】 象에 只擧首句하니 如此比多矣라 樽酒簋貳는 質實之至니 剛柔相際接之道能如此면 則可終保无咎라 君臣之交 能固而常者는 在誠實而已라 剛柔는 指四與五니 謂君臣之交際也라.
〈상전(象傳)〉에 다만 첫 구(句)만을 들었으니, 이와 같은 비례(比例)가 많다. ‘준주궤이(樽酒簋貳)’는 질실(質實)함이 지극하니, 강(剛)과 유(柔)가 서로 교제하고 접하는 도(道)가 이와 같으면 끝내 무구(无咎)를 보존할 수 있다. 군신(君臣)의 사귐이 견고하고 항상할 수 있는 것은 성실(誠實)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강(剛)과 유(柔)는 사(四)와 오(五)를 가리키니, 군신간(君臣間)의 교제를 이른다.
【本義】 鼂氏曰 陸氏釋文本에 无貳字하니 今從之라.
조씨(鼂氏)가 말하였다. “육씨(陸氏)의 석문본(釋文本)에 이자(貳字)가 없으니, 지금 이를 따른다.”
九五는 坎不盈하니 祗旣平하면 无咎리라.
구오(九五)는 구덩이가 차지 못하였으니,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坎不盈이나 祗旣平이니,
【본의】 구덩이가 차지 못하였으나 이미 평함에 이르니,
【傳】 九五在坎之中하니 是不盈也니 盈則平而出矣라 祗는 宜音柢니 抵也라 復卦云 无祗悔라하니라 必抵於已平則无咎어니와 旣曰不盈이면 則是未平而[一无而字]尙在險中이니 未得无咎也라 以九五剛中之才로 居尊位면 宜可以濟於險이나 然下无助也라 二陷於險中하여 未能出하고 餘皆陰柔하여 无[一作非]濟險之才하니 人君雖才나 安能獨濟天下之險이리오 居君位而不能致天下出於險이면 則爲有咎니 必祗旣平이라야 乃得无咎라.
구오(九五)가 감(坎)의 가운데에 있으니, 이는 가득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차면 평평하여 구덩이에서 나올 것이다. 지(祗)는 마땅히 음(音)이 저(柢)여야 하니, 이름〔抵〕이다. 복괘(復卦)에 이르기를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하였다. 반드시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을 수 있거니와 이미 가득차지 않았다고 말했으면 이는 평평하지 못하여 아직도 험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무구(无咎)일 수 없다. 구오(九五)의 강중(剛中)한 재질로 존위(尊位)에 거했으면 마땅히 험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나 아래에 돕는 이가 없다. 이(二)는 험한 가운데에 빠져 탈출하지 못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음유(陰柔)여서 험함을 구제할 재주가 없으니, 인군(人君)이 비록 재주가 있으나 어찌 홀로 천하(天下)의 험함을 구제하겠는가. 군주(君主)의 지위에 있으면서 천하(天下)를 험함에서 구출하지 못한다면 유구(有咎)가 되니, 반드시 이미 평평함에 이르러서야 무구(无咎)를 얻게 될 것이다.
【本義】 九五雖在坎中이나 然以陽剛中正으로 居尊位而時亦將出矣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구오(九五)가 비록 감(坎)의 가운데에 있으나 양강중정(陽剛中正)으로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며, 때가 또한 장차 나오게 되었으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坎不盈은 中이 未大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덩이가 차지 못하였음은 강중(剛中)이 광대(光大)하지 못한 것이다.”
【傳】 九五는 剛中之才而得尊位하니 當濟天下之險難이나 而坎尙不盈하니 乃未能平乎險難이니 是其剛中之道 未光大也라 險難之時에 非君臣協力이면 其能濟乎아 五之道未大는 以无臣也라 人君之道는 不能濟天下之險難이면 則爲未大니 不稱其位也라.
구오(九五)는 강중(剛中)의 재질로 존위(尊位)를 얻었으니 마땅히 천하(天下)의 험난함을 구제하여야 하나, 구덩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바로 험난함을 평평하지 못한 것이니, 이는 강중(剛中)의 도(道)가 아직 광대(光大)하지 못한 것이다. 험난한 때에 군신(君臣)이 협력하지 않으면 구제할 수 있겠는가. 오(五)의 도(道)가 광대(光大)하지 못함은 신하(臣下)가 없기 때문이다. 인군(人君)의 도(道)는 천하(天下)의 험난함을 구제하지 못하면 광대(光大)하지 못함이 되니, 그 지위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本義】 有中德而未大라.
중덕(中德)이 있으나 크지 못하다.
上六은 係用徽纆하여 寘于叢棘하여 三歲라도 不得이니 凶하니라.
상육(上六)은 매되 동아줄을 사용하여 가시나무 숲속에 가둬두어 3년이 되어도 면하지 못하니, 흉하다.
【傳】 上六이 以陰柔而居險之極하니 其陷之深者也니 以其陷之深으로 取牢獄爲喩라 如係縛之以徽纆하여 囚寘於叢棘之中하니 陰柔而陷之深하여 其不能出矣라 故云 至于三歲之久라도 不得免也라 하니 其凶可知니라.
상육(上六)은 음유(陰柔)로서 험(險)의 극(極)에 처하여 빠짐이 깊은 것이니, 빠짐이 깊기 때문에 뇌옥(牢獄)을 취하여 비유하였다. 이는 마치 동아줄로 붙잡아 매서 가시나무 숲 속에 가둬둔 것과 같으니, 음유(陰柔)로서 빠짐이 깊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3년의 오램에 이르러도 면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本義】 以陰柔로 居險極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음유(陰柔)로 험(險)의 극(極)에 처하였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上六失道는 凶三歲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상육(上六)이 도(道)를 잃음은 흉함이 3년에 이르리라.”
【傳】 以陰柔而自處極險之地하니 是其失道也라 故其凶이 至于三歲也라 三歲之久而不得免焉하니 終凶之辭也라 言久에 有曰十, 有曰三하니 隨其事也라 陷于獄하여 至于三歲는 久之極也라 他卦에 以年數言者도 亦各以其事也니 如三歲不興, 十年乃字 是也라.
음유(陰柔)로서 스스로 지극히 험한 자리에 처하였으니, 이는 도(道)를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흉함이 3년에 이른 것이다. 3년이나 오래도록 면하지 못하였으니, 끝내 흉하다는 말이다. 오램을 말할 때에 10이라 말한 경우가 있고 3이라 말한 경우가 있으니, 그 일에 따른 것이다. 옥(獄)에 빠져 3년에 이름은 오램이 지극한 것이다. 다른 괘(卦)에 연수(年數)로 말한 것도 역시 각기 그 일에 따른 것이니, 예를 들면 동인괘(同人卦)의 “3년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함이다.〔三歲不興〕”는 것과 둔괘(屯卦)의 “10년이 되어서야 생육한다.〔十年乃字〕”는 것이 이것이다.

29. 감(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