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대축(大畜)
【傳】 大畜은 序卦에 有无妄然後可畜이라 故受之以大畜이라 하니라 无妄則爲有實이라 故可畜聚니 大畜所以次无妄也라 爲卦艮上乾下하여 天而在於山中하니 所畜至大之象이라 畜은 爲畜止요 又爲畜聚니 止則聚矣라[一有又字] 取天在山中之象則爲蘊畜이요 取艮之止乾則爲畜止니 止而後有積이라 故止爲畜義니라.
대축괘(大畜卦)는 〈서괘전(序卦傳)〉에 “무망(无妄)이 있은 뒤에 모일 수 있으므로 대축괘(大畜卦)로 받았다.” 하였다. 무망(无妄)이면 진실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축취(畜聚)할 수 있으니, 대축괘(大畜卦)가 이 때문에 무망괘(无妄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간(艮)이 위에 있고 건(乾)이 아래에 있어서 하늘이 산(山) 가운데에 있으니, 모인 바가 지극히 큰 상(象)이다. 축(畜)은 축지(畜止)함이 되고 또 축취(畜聚)가 되니, 멈추면 모인다. 하늘이 산(山) 가운데에 있는 상(象)을 취하면 온축(蘊畜)함이 되고, 간(艮)이 건(乾)을 저지함을 취하면 축지(畜止)가 되니, 멈춘 뒤에 쌓임이 있으므로 지(止)가 쌓는 뜻이 되는 것이다.
大畜은 利貞하니 不家食하면 吉하니 利涉大川하니라.
대축(大畜)은 정(貞)함이 이로우니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길(吉)하니,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다.
【本義】 不家食하여 吉하고,
【본의】 집에서 밥을 먹지 아니하여 길하고,
【傳】 莫大於天而在山中하고 艮在上而止乾於下하니 皆蘊畜至大之象也라 在人에 爲學術道德이 充積於內하니 乃所畜之大也니 凡所畜聚皆是로되 專言其大者라 人之蘊畜은 宜得正道라 故云利貞이니 若夫異端偏學은 所畜至多而不正者 固有矣라 旣道德充積於內면 宜在上位하여 以(亨)[享]天祿하여 施爲於天下니 則不獨於[一无於字]一身之吉이요 天下之吉也라 若窮處而自食於家면 道之否也라 故不家食則吉이라 所畜旣大면 宜施之於時하여 濟天下之艱險이니 乃大畜之用也라 故利涉大川이라 此는 只據大畜之義而言이요 彖은 更以卦之才德而言하며 諸爻則惟有止畜之義하니 蓋易은 體道隨宜하여 取明且近者라.
하늘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하늘이 산(山) 가운데에 있고, 간(艮)이 위에 있으면서 건(乾)을 아래에 그치게 하니, 모두 온축(蘊畜)함이 지극히 큰 상(象)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술과 도덕이 내면에 충적(充積)함이 되니 이는 쌓인 바가 큰 것이니, 무릇 축취(畜聚)하는 것이 모두 해당되지만 오로지 그 큰 것만을 말하였다. 사람의 온축(蘊畜)은 마땅히 정도(正道)를 얻어야 하므로 정(貞)함이 이롭다고 말한 것이니, 이단(異端)과 편벽(偏僻)된 학문은 쌓은 것이 지극히 많더라도 바르지 못한 경우가 진실로 있다. 이미 도덕이 안에 충적(充積)되었으면 마땅히 높은 지위에 있어서 천록(天祿)을 누려 천하(天下)에 베풀면 다만 한 몸이 길(吉)할 뿐만 아니요, 천하(天下)가 길(吉)하다. 만약 곤궁하게 살아 스스로 집에서 밥을 먹으면 도(道)가 비색(否塞)하다. 그러므로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길(吉)한 것이다. 쌓인 바가 이미 크면 마땅히 세상에 베풀어서 천하(天下)의 어려움과 험함을 구제하여야 하니, 이것이 대축(大畜)의 쓰임이다. 그러므로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대축(大畜)의 뜻을 근거하여 말하였고, 〈단전(彖傳)〉에서는 다시 괘(卦)의 재질과 덕(德)을 가지고 말하였으며, 여러 효(爻)는 오직 지축(止畜)의 뜻만 있으니, 역(易)은 도(道)를 체행(體行)하고 마땅함을 따라 분명하고 또 가까운 것을 취하였다.
【本義】 大는 陽也니 以艮畜乾은 又畜之大者也라 又以內乾剛健하고 外艮篤實輝光이라 是以能日新其德而爲畜之大也라 以卦變言하면 此卦自需而來하여 九自五而上하고 以卦體言하면 六五尊而尙之하고 以卦德言하면 又能止健이니 皆非大正이면 不能이라 故其占이 爲利貞而不家食吉也라 又六五下應於乾하여 爲應乎天이라 故其占이 又爲利涉大川也라 不家食은 謂食祿於朝하고 不食於家也라.
대(大)는 양(陽)이니, 간(艮)으로 건(乾)을 저지함은 또 저지함이 큰 것이다. 또 안의 건(乾)은 강건(剛健)하고 밖의 간(艮)은 독실(篤實)하고 빛난다. 이 때문에 날로 덕(德)을 새롭게 하여 쌓임이 큰 것이다. 괘변(卦變)으로 말하면 이 괘(卦)가 수괘(需卦)[ ]로부터 와서 구(九)가 오(五)에서 위로 올라갔고, 괘체(卦體)로 말하면 육오(六五)가 높으면서 상구(上九)를 높여주며, 괘덕(卦德)으로 말하면 또 강건(剛健)함을 저지하니, 모두 크게 바름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정(貞)함이 이롭고 집에서 밥을 먹지 아니하여 길(吉)한 것이다. 또 육오(六五)가 아래로 건(乾)에 응(應)하여 천도(天道)에 응(應)함이 되므로 그 점(占)이 또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불가식(不家食)’은 조정(朝廷)에서 녹(祿)을 먹고 집에서 밥을 먹지 않음을 이른다.
彖曰 大畜은 剛健하고 篤實하고 輝光하여 日新其德이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대축(大畜)은 강건(剛健)하고 독실(篤實)하고 빛나서 날로 덕(德)을 새롭게 하니,
【傳】 以卦之才德而言也라 乾體剛健하고 艮體篤實하니 人之才剛健篤實이면 則所畜能大하여 充實而有輝光하니 畜之不已면 則其德日新也라.
괘(卦)의 재질과 덕(德)으로 말하였다. 건체(乾體)는 강건(剛健)하고 간체(艮體)는 독실(篤實)하니, 사람의 재주가 강건(剛健)하고 독실(篤實)하면 쌓인 바가 커서 충실(充實)하고 빛남이 있으니, 쌓기를 그치지 않으면 덕(德)이 날로 새로워진다.
【本義】 以卦德으로 釋卦名義라.
괘덕(卦德)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剛上而尙賢하고 能止健이 大正也라.
강(剛)이 위에 있고 어진이를 높이고 강건함을 저지함이 크게 바른 것이다.
【傳】 剛上은 陽居上也라 陽剛이 居尊位之上하니 爲尙賢之義요 止居健上하니 爲能止健之義라 止乎健者는 非大正則安能이리오 以剛陽在上與尊尙賢德과 能止至健은 皆大正之道也라.
‘강상(剛上)’은 양(陽)이 위에 거한 것이다. 양강(陽剛)이 존위(尊位)의 위에 거하였으니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되고, 지(止)가 건(健)의 위에 거하였으니 강건함을 저지하는 뜻이 된다. 강건함을 저지함은 크게 바름이 아니면 어찌 능하겠는가. 강양(剛陽)으로 위에 있는 것과 현덕(賢德)이 있는 이를 높이는 것과 지극히 강건함을 저지하는 것은 모두 크게 바른 도(道)이다.
【本義】 以卦變卦體로 釋卦辭라.
괘변(卦變)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不家食吉은 養賢也요,
‘불가식길(不家食吉)’은 어진이를 기르는 것이요,
【本義】 亦取尙賢之象이라.
또한 어진이를 높이는 상(象)을 취하였다.
利涉大川은 應乎天也라.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로움은 하늘에 응(應)하는 것이다.”
【傳】 大畜之人은 所宜施其所畜하여 以濟天下라 故不食於家則吉이니 謂居天位, 享天祿也니 國家養賢하면 賢者得行其道也라 利涉大川은 謂大有蘊畜之人은 宜濟天下之艱險也라 彖은 更發明卦才하여 云所以能涉大川者는 以應乎天也라 六五는 君也니 下應乾之中爻는 乃大畜之君이 應乾而行也라 所行이 能應乎天이면 无艱險之不可濟어든 況其他乎아.
크게 쌓은 사람은 마땅히 그 쌓은 바를 베풀어서 천하(天下)를 구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길(吉)한 것이니, 천위(天位)에 거하여 천록(天祿)을 누림을 이르는 바, 국가(國家)에서 어진이를 기르면 현자(賢者)가 도(道)를 행하게 된다.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다는 것은 크게 온축(蘊畜)함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천하(天下)의 어려움과 험함을 구제하여야 함을 말한 것이다. 〈단전(彖傳)〉에서는 다시 괘(卦)의 재질을 발명(發明)하여 이르기를 “대천(大川)을 건널 수 있는 까닭은 하늘에 응(應)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육오(六五)는 군주(君主)이니, 아래로 건(乾)의 중효(中爻)에 응(應)함은 바로 대축(大畜)의 군주(君主)가 건(乾)에 응(應)하여 행하는 것이다. 행하는 바가 하늘에 응(應)하면 구제하지 못할 어려움과 험함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랴.
【本義】 亦以卦體而言이라.
또한 괘체(卦體)로 말하였다.
象曰 天在山中이 大畜이니 君子以하여 多識前言往行하여 以畜其德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하늘이 산(山)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大畜)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옛 성현(聖賢)들의 말씀과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 덕(德)을 쌓는다.”
【傳】 天爲至大而在山之中은 所畜至大之象이니 君子觀象하여 以大其蘊畜이라 人之蘊畜은 由學而大하나니 在多聞前古聖賢之言與行하여 考跡以觀其用하고 察言以求其心하여 識而得之하여 以畜成其德이니 乃大畜之義也라.
하늘은 지극히 큰 것인데 산(山) 가운데에 있음은 쌓인 바가 지극히 큰 상(象)이니, 군자(君子)가 이 상(象)을 보고서 온축(蘊畜)하기를 크게 한다. 사람의 온축(蘊畜)은 학문(學問)으로 말미암아 커지니, 옛 성현(聖賢)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들어서 자취를 상고하여 쓰임을 관찰하고 말을 살펴 마음을 찾아서 알고 얻어 덕(德)을 쌓아 이룸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대축(大畜)의 뜻이다.
【本義】 天在山中은 不必實有是事요 但以其象言之耳라.
하늘이 산(山) 가운데 있다는 것은 반드시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괘(卦)의 상(象)을 가지고 말했을 뿐이다.
初九는 有厲리니 利已니라.
초구(初九)는 위태로움이 있으리니, 중지함이 이롭다.
【傳】 大畜은 艮止畜乾也라 故乾三爻는 皆取被止[一作止之]爲義요 艮三爻는 皆取止之爲義라 初以陽剛으로 又健體而居下하니 必上進者也로되 六四在上하여 畜止於己하니 安能敵在上得位之勢리오 若犯之而進則有危厲라 故利在已而不進也라 在他卦則四與初爲正應하여 相援者也로되 在大畜則相應이 乃爲相止畜이라 上與三皆陽則爲合志니 蓋陽은 皆上進之物이라 故有同志之象이요 而无相止之義라.
대축(大畜)은 간(艮)이 건(乾)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乾)의 세 효(爻)는 모두 저지당함을 취하여 뜻을 삼았고, 간(艮)의 세 효(爻)는 모두 저지함을 취하여 뜻을 삼았다. 초(初)는 양강(陽剛)으로 또 건체(健體)이면서 아래에 거하였으니 반드시 위로 나아갈 것이나, 육사(六四)가 위에 있으면서 자기를 저지하니, 위에 있어 지위를 얻은 이의 형세를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는가. 만약 범하고 나아가면 위태로움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로움이 중지하고 나아가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다른 괘(卦)에 있어서는 사(四)와 초(初)는 정응(正應)이 되어 서로 원조(援助)하는 것이나 대축괘(大畜卦)에 있어서는 서로 응(應)함이 바로 서로 저지함이 되는 것이다. 상(上)과 삼(三)은 모두 양효(陽爻)라서 뜻이 합함이 되니, 양(陽)은 모두 위로 나아가는 물건이므로 동지(同志)의 상(象)이 있고 서로 저지하는 뜻이 없는 것이다.
【本義】 乾之三陽이 爲艮所止라 故內外之卦 各取其義라 初九爲六四所止라 故其占이 往則有危而利於止也라.
건(乾)의 세 양(陽)이 간(艮)에게 저지 당하므로 내외(內外)의 괘(卦)가 각기 그 뜻을 취하였다. 초구(初九)는 육사(六四)에게 저지 당하므로 그 점(占)이 가면 위태로움이 있어 중지함이 이로운 것이다.
象曰 有厲利已는 不犯災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유려이이(有厲利已)’는 재앙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傳】 有危則宜已니 不可犯災危而行也라 不度(탁)其勢而進이면 有災必矣라.
위태로움이 있으면 마땅히 중지하여야 하니, 재앙과 위태로움을 범하고 가서는 안 된다.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나아가면 재앙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
九二는 輿說(脫)輹이로다.
구이(九二)는 수레가 바퀴통이 빠졌도다.
【傳】 二爲六五所畜止하여 勢不可進也라 五據在上之勢하니 豈可犯也리오 二雖剛健之體나 然其處得中道라 故進止无失하여 雖志於進이나 度其勢之不可하고 則止而不行하니 如車輿脫去[一有其字]輪輹이니 謂不行也라.
이(二)가 육오(六五)에게 저지당하여 형세가 위로 나아갈 수 없다. 오(五)가 위에 있는 형세를 점거하였으니,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 이(二)가 비록 강건(剛健)의 체(體)이나 처함이 중도(中道)를 얻었으므로 나아가고 멈춤이 잘못이 없어서 비록 나아감에 뜻을 두나 형세가 불가(不可)함을 헤아리고 중지하여 가지 않으니, 수레가 바퀴통이 빠진 것과 같으니, 가지 않음을 이른다.
【本義】 九二亦爲六五所畜이로되 以其處中이라 故能自止而不進하여 有此象也라.
구이(九二) 역시 육오(六五)에게 저지당하나 중(中)에 처하였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중지하고 나아가지 않아 이러한 상(象)이 있는 것이다.
象曰 輿說輹은 中이라 无尤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수레가 바퀴통이 빠졌다는 것은 중(中)이라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輿說輹而不行者는 蓋其處得中道하여 動不失宜라 故无過尤也라 善莫善於剛中하니 柔中者는 不至於過柔耳요 剛中은 中而才也라 初九는 處不得中이라 故戒以有危宜已요 二는 得中하여 進止自无過差라 故但言輿說輹하니 謂其能不行也니 不行則无尤矣라 初與二는 乾體剛健이로되 而不足以進하고 四與五는 陰柔而能止하니 時之盛衰와 勢之强弱을 學易者所宜深識也니라.
수레가 바퀴살이 빠져 가지 않음은 처함이 중도(中道)를 얻어서 동함에 마땅함을 잃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좋음은 강중(剛中)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유중(柔中)은 지나치게 유(柔)함에 이르지 않을 뿐이고, 강중(剛中)은 중(中)에 맞고 재주가 있는 것이다. 초구(初九)는 처함이 중(中)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위태로움이 있으리니, 중지함이 마땅하다’고 경계하였고, 이(二)는 중(中)을 얻어서 나아가고 멈춤이 스스로 과차(過差)가 없으므로 다만 ‘수레가 바퀴통이 빠졌다’고 말하였으니, 가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니, 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 초(初)와 이(二)는 건체(乾體)로 강건(剛健)하나 저지당하여 나아갈 수 없고, 사(四)와 오(五)는 음유(陰柔)이지만 저지할 수 있으니, 때의 성쇠(盛衰)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역(易)을 배우는 이는 마땅히 깊이 알아야 한다.
九三은 良馬逐이니 利艱貞하니 曰(日)閑輿衛면 利有攸往하리라.
구삼(九三)은 좋은 말이 달려가는 것이니, 어렵게 여기고 정(貞)함이 이로우니, 날마다 수레타는 것과 호위(護衛)하는 것을 익히면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리라.
【傳】 三은 剛健之極이요 而上九之陽도 亦上進之物이며 又處畜之極而思變也하여 與三乃不相畜하고 而志同相應以進者也라 三以剛健之才로 而在上者與合志而進하여 其進이 如良馬之馳逐이니 言其速也라 雖其進之勢[一作志]速이나 不可恃其才之健과 與上之應而忘備與愼也라 故宜艱難其事而由貞正之道라 輿者는 用行之物이요 衛者는 所以自防이니 當自[一无自字]日常閑習其車輿與其防衛면 則利有攸往矣라 三乾體而居正하니 能貞者也로되 當有銳進이라 故戒以知難與不失其貞[一作正]也라 志旣銳於進이면 雖剛明이라도 有時而失하니 不得不誡也라.
삼(三)은 강건(剛健)함이 지극하고 상구(上九)의 양(陽) 또한 위로 나아가는 물건이며, 또 축(畜)의 극(極)에 처하여 변할 것을 생각해서 삼(三)과 서로 저지하지 않고 뜻이 같아 서로 응(應)하여 나아가는 자이다. 삼(三)이 강건(剛健)한 재질로 위에 있는 이와 더불어 뜻을 합하여 나아가, 그 나아감이 좋은 말이 달려감과 같으니, 그 빠름을 말한 것이다. 비록 나아가는 형세가 빠르나 재주의 강건(剛健)함과 윗사람의 응(應)함을 믿고서 대비(對備)와 삼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일을 어렵게 여기고 정정(貞正)한 도(道)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수레는 길을 갈 때에 쓰는 물건이요 위(衛)는 스스로 방위(防衛)하는 것이니, 스스로 날마다 항상 수레타는 것과 방위(防衛)하는 것을 익히면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삼(三)은 건체(乾體)이면서 정(正)에 거하였으니, 정도(貞道)를 행할 수 있는 것이나 나아감에 빨리함이 있으므로 어렵게 여길 줄을 알고 정도(正道)를 잃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뜻이 이미 나아감에 빨리하면 비록 강(剛)하고 밝더라도 때로 실수할 수가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本義】 三以陽居健極하고 上以陽居畜極하니 極而通之時也요 又皆陽爻라 故不相畜而俱進하여 有良馬逐之象焉이라 然過剛銳進이라 故其占이 必戒以艱貞閑習이라야 乃利於有往也라 曰은 當爲日月之日이라.
삼(三)은 양(陽)으로 건(健)의 극(極)에 처하였고 상(上)은 양(陽)으로 축(畜)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극에 달하여 변통하는 때이고, 또 모두 양효(陽爻)이기 때문에 서로 저지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서 양마(良馬)가 달려가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剛)하고 나아감에 빨리 하기 때문에 점(占)이 반드시 어렵게 여기고 정도(貞道)를 지키며 익혀야만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고 경계한 것이다. 왈자(曰字)는 마땅히 일월(日月)의 일자(日字)가 되어야 한다.
象曰 利有攸往은 上이 合志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은 상(上)과 뜻이 합하기 때문이다.”
【傳】 所以利有攸往者는 以與在上者合志也일새라 上九는 陽性上進하고 且畜已極이라 故不下畜三而與[一有三字]合志上進也라.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까닭은 위에 있는 이와 뜻이 합하기 때문이다. 상구(上九)는 양(陽)의 성질이라서 위로 나아가고 또 저지함이 이미 지극하므로 아래로 삼(三)을 저지하지 않고 뜻을 합하여 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六四는 童牛之牿이니 元吉하니라.
육사(六四)는 어린 소에 곡(牿)을 가(加)한 것이니, 크게 선(善)하고 길(吉)하다.
【傳】 以位而言이면 則四下應於初하니 畜初者也라 初居最下하여 陽之微者니 微而畜之면 則易制라 猶童牛而加牿이니 大善而吉也라 槪論畜道하면 則四艮體로 居上位而得正하니 是는 以正德으로 居大臣之位하여 當畜之任者也라 大臣之任은 上畜止人君之邪心하고 下畜止天下之惡人[一无人字]이니 人之惡은 止於初則易하고 旣盛而後禁則扞格而難勝이라 故上之惡旣甚이면 則雖聖人救之라도 不能免違拂이요 下之惡旣甚이면 則雖聖人治之라도 不能免刑戮이니 莫若止之於初니 如童牛而加牿則元吉也라 牛之性은 觝觸以角이라 故牿以制之니 若童犢始角而加之以牿하여 使觝觸之性不發이면 則易而无傷이라 以況六四能畜止上下之惡於未發之前하니 則大善之吉也라.
자리로 말하면 사(四)가 아래로 초(初)와 응(應)하니, 초(初)를 저지하는 이이다. 초(初)는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여 양(陽) 중에 미약한 것이니, 미약할 때에 저지하면 제지하기 쉽다. 어린 소에 곡(牿)을 가한 것과 같으니 크게 선(善)하고 길하다. 저지하는 도(道)를 개론(槪論)하면 사(四)는 간체(艮體)로 높은 지위에 거하여 정(正)을 얻었으니, 이는 정덕(正德)으로 대신(大臣)의 지위에 거하여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이이다. 대신(大臣)의 임무는 위로는 인군(人君)의 사심(邪心)을 저지하고 아래로는 천하(天下)의 악(惡)한 사람을 저지하는 것이니, 사람의 악(惡)은 초기에 저지하면 저지하기가 쉽고, 이미 성한 뒤에 금하면 거슬려 이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위의 악(惡)이 이미 심하면 비록 성인(聖人)이 바로잡더라도 어김을 면치 못하고, 아래의 악(惡)이 이미 심하면 비록 성인(聖人)이 다스리더라도 형륙(刑戮)을 면치 못하니, 초기에 저지하는 것만 못하다. 어린 소에 곡(牿)을 가함과 같이 하면 크게 선(善)하고 길(吉)한 것이다. 소의 성질은 뿔로 받기 때문에 곡(牿)을 가하여 제지하는 것이니, 어린 송아지가 처음 뿔이 났을 때에 곡(牿)을 가하여 뿔로 받는 성질이 나오지 않게 하듯이 하면 제지하기가 쉬워 상(傷)함이 없을 것이다. 이로써 육사(六四)가 상하(上下)의 악(惡)을 발하기 전에 저지함을 비유하였으니, 대선(大善)하여 길(吉)하다.
【本義】 童者는 未角之稱이요 牿은 施橫木於牛角하여 以防其觸이니 詩所謂楅衡者也라 止之於未角之時면 爲力則易하니 大善之吉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學記曰 禁於未發之謂豫라 하니 正此意也라.
동(童)은 뿔이 아직 나지 않았음을 일컫고, 곡(牿)은 가로댄 나무를 소의 뿔에 설치하여 뿔로 받음을 막는 것이니, 시(詩)에 이른바 ‘복형(楅衡)’이란 것이다. 아직 뿔이 나지 않았을 때에 저지하면 힘됨이 쉬우니, 대선(大善)하여 길(吉)하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예기(禮記)》〈학기(學記)〉에 “발하지 않았을 때에 금함을 예(豫)라 한다.” 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뜻이다.
象曰 六四元吉은 有喜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사(六四)의 원길(元吉)함은 기쁜 일이 있는 것이다.”
【傳】 天下之惡이 已盛而止之면 則上勞於禁制而下傷於刑誅라 故畜止於微小之前이면 則大善而吉하여 不勞而无傷이라 故可喜也라 四之畜初是也니 上畜亦然하니라.
천하(天下)의 악(惡)이 이미 성하였는데 저지하면 윗사람은 금제(禁制)함에 수고롭고 아랫사람은 형주(刑誅)에 상(傷)한다. 그러므로 미소(微小)하기 전에 저지하면 대선(大善)하고 길(吉)해서 수고롭지 않고 상(傷)함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기쁜 것이다. 사(四)가 초(初)를 저지함이 이것이니, 위를 저지함도 역시 그러하다.
六五는 豶豕之牙니 吉하니라.
육오(六五)는 멧돼지를 거세하여 이빨을 쓰지 못하게 함이니, 길(吉)하다.
【傳】 六五居君位하여 止畜天下之邪惡하니 夫以億兆之衆으로 發其邪欲之心에 人君欲力以制之면 雖密法嚴刑이라도 不能勝也라 夫物有總攝하고 事有機會하니 聖人이 操得其要하여 則視[一无視字]億兆之心을 猶一心하여 道之斯行하고 止之則戢이라 故不勞而治하나니 其用이 若豶豕之牙也라 豕는 剛躁之物이요 而牙爲猛利하니 若强制其牙면 則用力勞而不能止其躁猛이니 雖縶之維之라도 不能使之變也요 若豶去其勢면 則牙雖存而剛躁自止하니 其用如此라 所以吉也라 君子發豶豕之義하여 知天下之惡을 不可以力制也하니 則察其機, 持其要하여 塞絶其本原이라 故不假刑法嚴峻而惡自止也라 且如止盜하니 民有欲心하여 見利則動하나니 苟不知敎而迫於飢寒이면 雖刑殺日施라도 其能勝億兆利欲之心乎아 聖人則知所以止之之道하여 不尙威刑而修政敎하여 使之有農[一作耕]桑之業하고 知廉恥之道하여 雖賞之라도 不竊矣라 故止惡之道는 在知其本, 得其要而已라 不嚴刑於彼而修政於此는 是猶患[豕]牙之利에 不制其牙而豶其勢也라.
육오(六五)가 군위(君位)에 거하여 천하(天下)의 사악(邪惡)함을 저지하니, 억조(億兆)의 많은 사람들이 사욕(邪欲)의 마음을 발함에 인군(人君)이 힘으로 이것을 제지하고자 하면 비록 법(法)을 치밀하게 하고 형벌(刑罰)을 엄격하게 하더라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물은 총괄하여 잡음이 있고 일은 기회(機會)가 있으니, 성인(聖人)이 잡음에 그 요령을 얻어서 억조(億兆)의 마음을 보기를 한 마음처럼 하여, 인도하면 따라오고 멈추면 그치므로 수고롭지 않고도 다스려지는 것이니, 그 쓰임이 멧돼지의 이빨과 같은 것이다. 멧돼지는 강하고 조급한 물건이며 이빨은 사납고 날카로우니, 만약 그 이빨을 억지로 제지하면 힘을 씀이 수고로우나 그 조급하고 사나움을 저지하지 못하니, 비록 묶고 동여매더라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세(勢)를 제거하면 이빨이 비록 있어도 강함과 조급함이 저절로 그쳐지니, 그 쓰임이 이와 같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분시(豶豕)의 뜻을 발하여 천하(天下)의 악(惡)을 힘으로 억제할 수 없으니, 기미를 살피고 요점을 잡아서 근본과 근원을 막고 끊어야 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형법의 준엄함을 빌리지 않고도 악(惡)이 저절로 저지되는 것이다. 우선 도둑질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으니, 백성들은 욕심이 있어서 이익을 보면 동하니, 만약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기한(飢寒)에 절박하면 비록 형벌과 죽임을 날마다 시행하더라도 억조(億兆)의 이욕(利欲)의 마음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성인(聖人)은 이것을 저지하는 방도를 알아 위엄(威嚴)과 형벌(刑罰)을 숭상하지 않고 정교(政敎)를 닦아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생업(生業)이 있게 하고 염치(廉恥)의 도리를 알게 하여, 비록 상(賞)을 주어도 도둑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惡)을 저지하는 도(道)는 근본을 알고 요점을 얻음에 있을 뿐이다. 저들에게 형벌(刑罰)을 엄하게 가(加)하지 않고서도 정사(政事)가 여기에서 닦여짐은 멧돼지 이빨의 예리함을 걱정할 적에 그 이빨을 제지하지 않고 그 세(勢)를 제거함과 같은 것이다.
【本義】 陽已進而止之하니 不若初之易矣나 然以柔居中而當尊位라 是以得其機會而可制라 故其象如此하니 占雖吉而不言元也라.
양(陽)이 이미 나왔는데 저지하니, 초구(初九)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유(柔)로서 중(中)에 거하였고 존위(尊位)를 당하였다. 이 때문에 기회(機會)를 얻어 제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이 이와 같으니, 점(占)이 비록 길(吉)하나 크게 선(善)함을 말하지 않았다.
象曰 六五之吉은 有慶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오(六五)의 길(吉)함은 경사가 있는 것이다.”
【傳】 在上者 不知止惡之方하여 嚴刑以敵民欲이면 則其傷甚而无功하나니 若知其本하여 制之有道면 則不勞无傷而俗革이니 天下之福慶也라.
위에 있는 이가 악(惡)을 저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형벌을 엄격히 하여 백성의 욕망을 대적하고자 한다면 그 상(傷)함이 심하고 공(功)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 근본을 알아 제지함에 방도가 있게 하면 수고롭지 않고 상(傷)함이 없으면서 풍속(風俗)이 개혁(改革)될 것이니, 천하(天下)의 복경(福慶)이다.
上九는 (何)天之衢니 亨하니라.
상구(上九)는 하늘의 거리이니, 형통(亨通)하다.
【本義】 何天之衢오,
【본의】 어쩌면 그리도 하늘의 거리와 같은가.
【傳】 予聞之胡先生하니 曰 天之衢亨에 誤加何字라 하니라 事極則反이 理之常也라 故畜極而亨이라 小畜은 畜之小라 故極而成이요 大畜은 畜之大라 故極而散이라 極旣當變이요 又陽性上行이라 故遂散也라 天衢는 天路也니 謂虛空之中이니 雲氣飛鳥往來라 故謂之天衢라 天衢之亨은 謂其亨通曠闊하여 无有蔽阻也라 在畜道則變矣니 變而亨이요 非畜道之亨也라.
내가 호선생(胡先生)에게 들으니, 말씀하기를 “‘천지구형(天之衢亨)’에 하자(何字)가 잘못 더해졌다.” 하였다. 일이 극(極)에 이르면 뒤집어짐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축(畜)이 극에 이르면 형통(亨通)한 것이다. 소축(小畜)은 저지함이 작기 때문에 지극하면 이루어지고, 대축(大畜)은 저지함이 크기 때문에 지극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극(極)에 이르면 마땅히 변하고 또 양(陽)의 성질은 위로 가기 때문에 마침내 흩어지는 것이다. 천구(天衢)는 하늘의 길이니, 허공의 가운데를 이르는 바, 구름 기운과 나는 새가 왕래하기 때문에 ‘천구(天衢)’라 이른 것이다. 천구(天衢)의 형통함은 형통(亨通)함이 광활하여 가리움과 막힘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축(畜)의 도(道)에 있어서는 변한 것이니, 변하여 형통(亨通)한 것이요, 축(畜)의 도(道)가 형통(亨通)한 것은 아니다.
【本義】 何天之衢는 言何其通達之甚也라 畜極而通하여 豁達无礙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하천지구(何天之衢)’는 어쩌면 그리도 통달(通達)함이 심하냐고 말한 것이다. 축(畜)이 지극하여 통해서 활달하여 막힘이 없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何天之衢오 道大行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어찌하여 하늘의 거리라 일렀는가? 도로(道路)가 크게 통행되기 때문이다.”
【本義】 何天之衢는,
【본의】 ‘하천지구(何天之衢)’는,
【傳】 何以謂之天衢오 以其无止礙하여 道路大通行也일새라 以天衢非常語라 故象特設問曰 何謂天之衢오 以道路大通行이라 하니 取空豁之狀也라 以象有何字라 故爻下에 亦誤加之하니라.
어찌하여 천구(天衢)라 일렀는가? 저지함과 막힘이 없어서 도로가 크게 통행되기 때문이다. 천구(天衢)는 항상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상전(象傳)〉에 특별히 설문(設問)하기를 “어찌하여 하늘의 거리라 일렀는가? 도로가 크게 통행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공활(空豁)한 상(狀)을 취한 것이다. 〈상전(象傳)〉에 하자(何字)가 있기 때문에 효(爻) 아래에도 잘못 하자(何字)를 더한 것이다.

26. 대축(大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