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 북하면사무소 앞마당에 우리는 여럿이 모였다. 모두가 남자 회원님들. 부르릉 떠나면서 마음 속엔 기대도 한창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벼르고 벼르던 복수초를 보는 날이다. 장성호 상류를 한참 돌아 우리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물가에 섰다. 물가라서 가벼운 옷차림을 한 내게는 추운 날씨였다. 우리를 데려다 줄 모터보트가 물위에 대기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모터보트. 속으로는 무섭기까지 했다. 한참 물위를 돌아 호수 건너편에 우리는 내렸다. 아침 공기는 차다.
'시골풍경', 서부극의 농장처럼 꾸며논 아취를 넘어서니 까만 염소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부회장님 왈, 사람만 오면 이 염소들은 좋아 날뛴단다. 먹이를 주어서라나. 이 흑염소들은 대가족을 이루면서 몇 대인지 함께 어울려 잘들 살고 있었다. 우린 핵가족이 좋다고 난리들인데.........그런데 그 중에서도 속없는 수컷들은 아기염소를 배 속에 담고 있는 어미 염소를 들이받고 있는 놈도 있으니 참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인가! 우리 인간은 안 그럴까?
'시골풍경'을 돌아보며, 수몰지구에 돌보는 이가 멀리 있으면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착찹하다. 여기저기 널부러진 집기들, 낡아서 이제는 쓸 수도 없는 물건들. 인간도 세월이 가면 그렇게 되겠구나. 나도 이제는 저런 물건 축에 드는가 보다.
우리는 그 길로 부리나케 산행에 오른다. 대형이 가로로 넓게 벌린 횡대형. 낙엽 밟는 소리, 바스락바스락. 행여나, 행여나! 안경 속에서 눈이 번뜩인다. 있을까, 있을까, 보일까, 보일까. 한참을 올라가도 별무소득이다. 마음 속에는 설마 하면서도 혹시 오늘도 허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뭉게구름이 된다.
왜 그리 가는 길마다 쓰러져 썩어가는 나무등걸 투성이인지? 가시덩쿨은 왜 또 그렇게도 많은지? 힘이 빠져갈 즈음. 종제가 내게 묻는다.
"형, 이런 걸 찾는 거요?"
"어디, 뭔데?"
노란 그놈이, 복수초란 놈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야호!"
"부회장님, 여기 찾았습니다아-."
모두가 모여들고 우리는 사진 찍기 바쁘다. 그런데 그 예쁜 복수초란 놈이 여기도 불쑥, 저기도 불쑥 솟아 있지를 않은가! 발조심해야 할 정도로 여기 저기 밭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고개만 살짝 내밀고 있는 놈, 반쯤 벙그러진 놈, 이제 막 땅을 뚫고 나오는 놈. 나는 생전 처음 야생의 복수초를, 꽃을 피운 복수초를 볼 수 있었고, 렌즈를 들이대는 감격에 가슴이 두근두근.
잡목을 붕우삼아 낙엽을 이불 삼아
한 세월 잠들었던 복수초 한 뿌리를
오늘사 만나고 보니 그 감격이 남달라.
꼭 다문 그 꽃잎을 언제면 터뜨리랴
빠알간 굵은 대공 튼실히 잘 자라서
조화옹 담은 그 사연 화알짝도 펴리라
아쉬움을 뒤로 복수초밭을 찾아 옮기는 발길이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등성이를 넘고 넘어서 그곳에 가 봐도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소식도 없단다. 내려오는 발길에 낙엽은 바스락거리고, 온갖 가시덩쿨에 옷들은 긁히는데.............
등성이를 지나, 계곡을 지나, 대밭을 지나 '시골풍경'에 내려오니, 벌써 바지런한 창식 군이 화톳불을 피워 놓고 있다. 태워서 숱으로 삼겹살을 구우리란다. 삼겹살은 '보스'께서 말 그대로 보스 노릇하시느라 사오셨다는 부회장님의 귀띔에 우리 모두는 그저 감사. 아 글쎄. 고기를 다 구워놓고 보니 된장을 잊었다나? 어쩐다? 역시 '보스'께서 전화 한 방으로 해결. '시골풍경'의 장독대에 된장이 지천으로 있었던 것을........ 주인께서 얼마든지 잡수시랬단다. 또 감사. 우리 식탁 그럴 듯한가요? 거기다 창식 군이 한식조리사 실력을 발휘, 맛있는 삼겹살 요리를 선사했다. 또또 감사.
아, 맛있었다. 음, 꿀맛이다.
돌아오는 길에 이 모터보트를 타고는 출발하려니, 부회장님께서 '스톱'을 외치신다. 웬일인가 했더니, 세상에나. 호수 수면이 새까맣다. 글쎄 몇 마리? 그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많다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까만 청둥오리떼.
보스께서 말씀하신다. 살살 접근하면 날지 않는단다. 사진을 찍으라는 얘기. 이윽고 돌발 출발. 그 많던 청둥오리 일시에 날아오르니 그저 감탄, 감탄. 장관.
우리를 태우고 보스는 호수가를 한 바퀴 도신다. 부회장님은 찰칵에 여념이 없으시고, 물가에는 고드름이 하나 둘 눈에 보인다.
다시 우리는 백양사행. 가는 길에 11일에 봤던 개감수가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해 중간에 내렸다. 개감수는 잘 있었고, 여기 저기 발에 밟힐까 싶어 조심해야 할 정도로 솟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그놈들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어 아쉽게도 꽃을 볼 복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뭐.
세 녀석이 다정하게도 솟아오른다
깜찍한 아우 데리고나온 언니 개감수
렌즈를 들이대고 내려오니, 창식 군이 헤어지기 섭섭한 모양. 동화에 있는 '과수원집'에서 약오리요리를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유쾌한 담소. 맛도 일품 요리. 창식 군이 독특한 경영방식으로 이끌어가는 식당. 그 앞에 우리 집안 '茶山齋'가 있어 낯이 익어 한층 반가웠다.
창식 군과 헤어지는 순간까지 즐거울 거야. 이는 부회장님 말씀.
그곳에는 연못도 있었고, 숱한 옛 우리 돌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주인의 멋스런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탈 복, 눈으로 보는 볼 복, 입으로 먹는 복이 터진 날이다. 감사 아니하고 어쩌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