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태(泰)
【傳】 泰는 序卦에 履而泰然後安이라 故受之以泰라 하니라 履得其所則舒泰하고 泰則安矣니 泰所以次履也라 爲卦 坤陰在上하고 乾陽居下하니 天地陰陽之氣 相交而和면 則萬物生成이라 故爲通泰라.
태괘(泰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행하여 서태(舒泰)한 뒤에 편안하다. 그러므로 태괘(泰卦)로 받았다.” 하였다. 행함이 제자리를 얻으면 서태(舒泰)하고 서태(舒泰)하면 편안하니, 태괘(泰卦)가 이 때문에 이괘(履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곤음(坤陰)이 위에 있고 건양(乾陽)이 아래에 있으니,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기운이 서로 사귀어 화(和)하면 만물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통태(通泰)가 된 것이다.
泰는 小往하고 大來하니 吉하여 亨하니라.
태(泰)는 소(小)가 가고 대(大)가 오니, 길(吉)하여 형통하다.
【傳】 小는 謂陰이요 大는 謂陽이며 往은 往之[一作居]於外也요 來는 來居於內也니 陽氣下降하고 陰氣上交也하여 陰陽和暢이면 則萬物生遂하니 天地之泰也라 以人事言之하면 大則君上이요 小則臣下니 君推誠以任下하고 臣盡誠以事君하여 上下之志通은 朝廷之泰也며 陽爲君子요 陰爲小人이니 君子來處於內하고 小人往處於外는 是君子得位요 小人在下니 天下之泰也라 泰之道는 吉而且亨也라 不云元吉元亨者는 時有汚隆하고 治有小大하니 雖泰나 豈一槪哉아 言吉亨則可包矣라.
소(小)는 음(陰)을 이르고 대(大)는 양(陽)을 이르며, 왕(往)은 밖으로 감이고 내(來)는 와서 안에 거함이니, 양기(陽氣)가 아래로 내려오고 음기(陰氣)가 위로 올라가서 사귀어 음양(陰陽)이 화창하면 만물이 생성되니, 이는 천지(天地)의 통태(通泰)함이다. 인간(人間)의 일로 말하면 대(大)는 군상(君上)이고 소(小)는 신하(臣下)이니, 군주(君主)가 정성을 미루어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신하(臣下)가 정성을 다하여 군주(君主)를 섬겨서 상하(上下)의 뜻이 통함은 조정(朝廷)의 통태(通泰)함이며, 양(陽)은 군자(君子)가 되고 음(陰)은 소인(小人)이 되니, 군자(君子)가 와서 안에 처하고 소인(小人)이 가서 밖에 처함은 군자(君子)가 지위를 얻고 소인(小人)이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니, 이는 천하가 통태(通泰)한 것이다. 태(泰)의 도(道)는 길(吉)하고 또 형통하다. 원길(元吉), 원형(元亨)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때에는 낮음과 높음이 있고 다스림에는 작음과 큼이 있으니, 비록 통태(通泰)하더라도 어찌 한결같겠는가. ‘길형(吉亨)’이라고 말했으면 이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本義】 泰는 通也라 爲卦 天地交而二氣通이라 故爲泰하니 正月之卦也라 小는 謂陰이요 大는 謂陽이니 言坤往居外하고 乾來居內하며 又自歸妹來하니 則六往居四하고 九來居三也라 占者有剛陽之德이면 則吉而亨矣라.
태(泰)는 통함이다. 괘(卦)됨이 천지(天地)가 사귀어 음양(陰陽)의 두 기운이 통한다. 그러므로 태(泰)라 하였으니, 정월(正月)의 괘(卦)이다. 소(小)는 음(陰)을 이르고 대(大)는 양(陽)을 이르니, 곤(坤)이 가서 밖에 거하고 건(乾)이 와서 안에 거하며, 또 귀매괘(歸妹卦)로부터 왔으니 육(六)이 가서 사(四)에 거하고 구(九)가 와서 삼(三)에 거하였다. 점치는 이가 강양(剛陽)의 덕(德)이 있으면 길(吉)하여 형통할 것이다.
彖曰 泰小往大來吉亨은 則是天地交而萬物通也며 上下交而其志同也라.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태소왕대래길형(泰小往大來吉亨)’은 천지(天地)가 사귀어 만물이 통태(通泰)하고, 상하(上下)가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지는 것이다.
【傳】 小往大來는 陰往而陽來也니 則是天地陰陽之氣相交하여 而萬物得遂其通泰也라 在人則上下之情交通하여 而其志意同也라.
‘소왕대래(小往大來)’는 음(陰)이 가고 양(陽)이 온 것이니, 이는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기운이 서로 사귀어 만물이 통태(通泰)함을 이룬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하(上下)의 정(情)이 서로 통하여 그 뜻이 같아지는 것이다.
內陽而外陰하며 內健而外順하며 內君子而外小人하니 君子道長하고 小人道消也라.
양(陽)이 안에 있고 음(陰)이 밖에 있으며 굳셈이 안에 있고 순함이 밖에 있으며 군자(君子)가 안에 있고 소인(小人)이 밖에 있으니,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고 소인(小人)의 도(道)가 사라지는 것이다.”
【傳】 陽來居內하고 陰往居外는 陽進而陰退也요 乾健在內하고 坤順在外는 爲內健而外順이니 君子之道也며 君子在內하고 小人在外는 是君子道長이요 小人道消니 所以爲泰也라 旣取陰陽交和하고 又取君子道長하니 陰陽交和는 乃君子之[一无之字]道長也라.
양(陽)이 와서 안에 거하고 음(陰)이 가서 밖에 거함은 양(陽)이 나아가고 음(陰)이 물러간 것이고, 건건(乾健)이 안에 있고 곤순(坤順)이 밖에 있음은 건(健)이 안에 있고 순(順)이 밖에 있음이 되니 군자(君子)의 도(道)이며, 군자(君子)가 안에 있고 소인(小人)이 밖에 있음은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나고 소인(小人)의 도(道)가 사라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태(泰)가 된 것이다. 이미 음양(陰陽)이 사귀어 화함을 취하였고 또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남을 취하였으니, 음양(陰陽)이 사귀어 화함은 바로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나는 것이다.
象曰 天地交泰니 后以하여 財(裁)成天地之道하며 輔相天地之宜하여 以左右民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천지(天地)가 사귐이 태(泰)이니, 군주가 이로써 천지(天地)의 도(道)를 재성(財成)하며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보상(輔相)하여 백성을 좌우(佐佑)한다.”
【傳】 天地交而陰陽和면 則萬物茂遂하니 所以泰也라 人君이 當體天地通泰之象하여 而以財成天地之道하고 輔相天地之宜하여 以左右生民也라 財成은 謂體天地交泰之道而財制하여 成其施爲之方也라 輔相天地之宜는 天地通泰면 則萬物茂遂하나니 人君體之而爲法制하여 使民用天時, 因地利하여 輔助化育之功하여 成其豊美之利也라 如春氣發生萬物則爲播植之法하고 秋氣成實萬物則爲收斂之法이니 乃輔相天地之宜하여 以左右輔助於民也라 民之生에 必賴君上爲之法制하여 以敎率輔翼之라야 乃得遂其生養하니 是左右之也라.
천지(天地)가 사귀어 음양(陰陽)이 화하면 만물이 무성하고 이루어지니, 이 때문에 태(泰)가 된 것이다. 인군(人君)은 천지(天地)가 통태(通泰)하는 상(象)을 체행하여 천지(天地)의 도(道)를 재성(財成)하고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보상(輔相)하여 생민(生民)을 좌우(左右)하여야 한다. ‘재성(財成)’은 천지(天地)가 사귀어 통태(通泰)하는 도(道)를 체행하여 재제(財制)해서 시행하는 방법을 이루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보상(輔相)함은 천지(天地)가 통태(通泰)하면 만물이 무성하게 이루어지니, 인군(人君)이 이것을 체행하여 법제(法制)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천시(天時)를 쓰고 지리(地利)를 따라서 화육(化育)의 공(功)을 보조해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이로움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봄기운이 만물을 발생시키면 파종(播種)하는 법을 만들고, 가을 기운이 만물을 성숙하고 영글게 하면 수렴(收斂)하는 법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바로 천지(天地)의 마땅함을 보상(輔相)하여 백성들을 좌우(左右)하고 보조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살아감은 반드시 군상(君上)이 법제(法制)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익(輔翼)함을 의뢰하여야 비로소 낳고 기름을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좌우(左右)하는 것이다.
【本義】 財成以制其過하고 輔相以補其不及이라.
재성(財成)하여 과(過)함을 억제하고, 보상(輔相)하여 불급(不及)함을 보충하는 것이다.
初九는 拔茅茹라 以其彙征이니 吉하니라.
초구(初九)는 띠풀의 엉켜있는 뿌리를 뽑는 것이니 동류들과 함께 감이니, 길(吉)하다.
【本義】 拔茅茹니 以其彙면 征이 吉하리라.
【본의】 띠풀의 엉켜있는 뿌리를 뽑는 것이니, 동류들과 함께 하면 감이 길(吉)하리라.
【傳】 初以陽爻居下하니 是는 有剛明之才而在下者也라 時之否면 則君子退而窮處로되 時旣[一作將]泰면 則志在上進也라 君子之進에 必與其朋類相牽援하여 如茅之根然하여 拔其一이면 則牽連而起矣라 茹는 根之相牽連者라 故以爲象이라 彙는 類也니 賢者以其類進하여 同志以行其道라 是以吉也라 君子之進에 必以其類니 不唯志在相先하여 樂於與善이요 實乃相賴以濟라 故君子小人이 未有能獨立不賴朋友之助者也라 自古로 君子得位면 則天下之賢이 萃於朝廷하여 同志協力하여 以成天下之泰하고 小人在位면 則不肖者竝進然後에 其黨勝而天下否矣니 蓋各從其類也라.
초(初)가 양효(陽爻)로서 아래에 거하였으니, 이는 강명(剛明)한 재질이 있으면서 아랫자리에 있는 것이다. 때가 비색(否塞)하면 군자(君子)가 물러나 궁하게 처하나 때가 이미 통태(通泰)하면 뜻이 위로 나아감에 있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붕류(朋類)들과 서로 끌어당겨 마치 띠풀의 뿌리처럼 하나를 뽑으면 연결되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여(茹)는 뿌리가 서로 연결된 것이므로 상(象)으로 삼은 것이다. 휘(彙)는 동류이니, 현자(賢者)가 동류들을 데리고 나아가서 뜻을 함께 하여 도(道)를 행하니, 이 때문에 길(吉)하다. 군자(君子)가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동류들을 데리고 가니, 다만 서로 먼저하여 함께 선(善)을 행함을 즐거워하는 데에 뜻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서로 의뢰하여 이룬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홀로 서서 붕우(朋友)의 도움을 의뢰하지 않는 이가 있지 않는 것이다. 예로부터 군자(君子)가 지위를 얻으면 천하의 현자(賢者)가 조정에 모여서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여 천하의 통태(通泰)함을 이루고, 소인(小人)이 지위에 있으면 불초(不肖)한 이가 함께 나온 뒤에 그 당(黨)이 우세하여 천하가 비색(否塞)해지는 것이니, 각각 그 유(類)를 따르는 것이다.
【本義】 三陽在下하여 相連而進은 拔茅連茹之象이니 征行之吉也라 占者陽剛이면 則其征吉矣라 郭璞洞林에 讀至彙字하여 絶句하니 下卦放此하니라.
세 양(陽)이 아래에 있어서 서로 연결하여 나아감은, 띠풀의 엉켜있는 뿌리를 뽑는 상(象)이니, 가는 것이 길(吉)하다. 점치는 이가 양강(陽剛)이면 가는 것이 길(吉)할 것이다. 곽박(郭璞)의 《동림(洞林)》에는 구두(句讀)를 휘자(彙字)에 이르러 끊었으니, 아래의 비괘(否卦)도 이와 같다.
象曰 拔茅征吉은 志在外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발모정길(拔茅征吉)’은 뜻이 밖에 있는 것이다.”
【傳】 時將泰면 則群賢皆欲上進하니 三陽之志 欲進이 同也라 故取茅茹彙征之象이라 志在外는 上進也라.
때가 장차 통태(通泰)하게 되면 여러 현자(賢者)가 모두 위로 나아가고자 하니, 세 양(陽)의 뜻이 나아가려 함이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띠풀의 엉켜있는 뿌리처럼 동류들이 함께 나아가는 상(象)을 취한 것이다. 뜻이 밖에 있음은 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九二는 包荒하며 用馮河하며 不遐遺하며 朋亡하면 得尙于中行하리라.
구이(九二)는 거친 것을 포용해 주고, 황하(黃河)를 맨몸으로 건너는 용맹을 쓰며, 멀리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 붕비(朋比)을 없애면 중행(中行)에 배합하리라.
【本義】 包荒하고 用馮河하며 不遐遺하고 朋亡하면,
【본의】 거친 것을 포용해 주면서도 황하(黃河)를 맨몸으로 건너는 용맹을 쓰며, 멀리 있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붕비(朋比)를 없애면,
【傳】 二以陽剛得中하여 上應於五하고 五以柔順得中하여 下應於二하여 君臣同德하니 是는 以剛中之才로 爲上所專任이라 故二雖居臣位나 主治泰者也니 所謂上下交而其志同也라 故治泰之道 主二而言이라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四者는 處泰之道也라 人情安肆하면 則政舒緩而法度廢弛하여 庶事无節하니 治之之道는 必有包含荒穢之量이면 則其施爲 寬裕詳密하여 弊革事理而人安之요 若无含弘之度하여 有忿疾之心이면 則无深遠之慮하고 有暴擾之患하니 深弊未去而近患已生矣라 故在包荒也라 用馮河는 泰寧之世엔 人情이 習於久安하고 安於守常하여 惰於因循하고 憚於更變하나니 非有馮河之勇이면 不能有爲於斯時也니 馮河는 謂其剛果足[一作可]以濟深越險也라 自古로 泰治之世는 必漸至於衰替하니 蓋由狃習安逸하여 因循而然이니 自非剛斷之君, 英烈之輔면 不能挺特奮發하여 以革其弊也라 故曰用馮河라 或疑上云包荒은 則是包含寬容이요 此云用馮河는 則是奮發改革이니 似相反也라 하니 不知以含容[一作弘]之量으로 施剛果之用이 乃聖賢之爲也라 不遐遺는 泰寧之時에 人心狃於泰면 則苟安逸而已니 惡能復深思遠慮하여 及於遐遠之事哉아 治夫泰者는 當周及庶事하여 雖遐遠이나 不可遺니 若事之微隱과 賢才之在僻[一作側]陋 皆遐遠者也니 時泰則固遺之矣라 朋亡은 夫時之旣泰면 則人習於安하여 其情이 肆而失節하나니 將約而正之인댄 非絶去其朋與之私면 則不能也라 故云朋亡이라 自古로 立法制事에 牽於人情하여 卒不能行者 多矣라 若夫禁奢侈則害於近戚하고 限田産則妨於貴家하니 如此之類를 旣不能[一无旣不能字]斷以大公而必行이면 則是[一有不字]牽於朋比也니 治泰에 不能朋亡이면 則爲之難矣라 治泰之道 有此四者면 則能合於九二之德이라 故曰得尙于中行이라 하니 言能配合中行之義也라 尙은 配也라.
이(二)는 양강(陽剛)으로 중(中)을 얻어 위로 오(五)와 응하고, 오(五)는 유순함으로 중(中)을 얻어 아래로 이(二)와 응하여 군신(君臣)이 덕(德)을 함께 하니, 이는 강중(剛中)의 재질로 윗사람에게 전적으로 신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二)가 비록 신위(臣位)에 거하였으나 태(泰)를 다스림을 주관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하(上下)가 사귀어 그 뜻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泰)를 다스리는 도(道)는 이(二)를 주장하여 말한 것이다. ‘포황(包荒), 용빙하(用馮河), 불하유(不遐遺), 붕망(朋亡)’ 네 가지는 태(泰)에 대처하는 도리이다. 인정(人情)은 편안하고 방사하면 정사가 느슨해져서 법도가 폐지되고 해이하여 모든 일이 절도가 없으니, 이것을 다스리는 방법은 반드시 거칠고 더러움을 포용해 주는 도량이 있으면 그 시행함이 관유(寬裕)하고 상밀(詳密)하여 폐단이 고쳐지고 일이 다스려져서 사람들이 편안할 것이다. 만일 포용해주는 큰 도량이 없어서 분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원한 생각이 없고 갑자기 소요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깊은 폐단을 제거하기 전에 가까운 근심이 벌써 생겨난다. 그러므로 거침을 포용하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용빙하(用馮河)’는 태녕(泰寧)의 세상에는 인정이 오랫동안 편안함에 익숙하고 떳떳함을 지킴에 편안하여서 인순(因循)함에 타성이 젖어 변경(變更)함을 꺼리니, 황하(黃河)를 맨몸으로 건너는 용맹이 있지 않으면 이러한 때에 큰일을 하지 못한다. 빙하(馮河)는 강함과 과단성이 족히 깊은 곳을 건너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이른다. 예로부터 편안히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점점 쇠하고 침체함에 이르니, 이는 안일에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인순(因循)하여 그러한 것이니, 스스로 강단(剛斷)이 있는 군주(君主)와 영렬(英烈)한 보필(輔弼)이 아니면 뛰쳐나와 분발해서 그 병폐를 개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용빙하(用馮河)’라 말한 것이다. 혹자는 의심하기를 “위에서 말한 포황(包荒)은 포함해 주고 관용(寬容)해 주는 것이요, 여기에서 말한 ‘용빙하(用馮河)’는 분발하여 개혁하는 것이니, 상반된 듯하다.” 하니, 이는 함용(含容)해주는 도량으로 강과(剛果)[강하고 과단성이 있음]의 씀을 베푸는 것이 바로 성현(聖賢)의 행위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불하유(不遐遺)’는 태녕(泰寧)의 때에 인심이 편안함에 익숙하면 구차히 안일할 뿐이니, 어찌 다시 깊이 생각하고 멀리 생각하여 먼 일에까지 미치겠는가. 태(泰)를 다스리는 이는 마땅히 여러 일에 두루 미쳐 비록 먼 것이라도 버려서는 안되니, 일이 은미한 것과 현재(賢才)가 벽루(僻陋)[미천]한 곳에 있음은 모두 먼 것이니, 때가 편안하면 진실로 이것을 버리게 된다. ‘붕망(朋亡)’은 때가 이미 편안하면 사람들이 편안함에 익숙하여 정(情)이 방사해져서 절도를 잃게 되니, 장차 묶어 바로잡으려 할진댄 붕여(朋與)의 사(私)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붕망(朋亡)’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로부터 법을 세우고 일을 제정함에 있어서 인정에 끌려 끝내 행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치를 금하면 근척(近戚)에 해롭고 토지와 재산을 제한하면 귀한 집에 해로우니, 이와 같은 것들을 이미 대공(大公)으로 결단하여 기필코 시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붕비(朋比)에게 끌리는 것이니, 태(泰)를 다스림에 붕비(朋比)를 없애지 못하면 다스리기 어렵다. 태(泰)를 다스리는 도(道)에 이 네 가지가 있으면 구이(九二)의 덕(德)에 합한다. 그러므로 ‘중행(中行)에 배합한다’고 하였으니, 중행(中行)의 의(義)에 배합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상(尙)은 배합함이다.
【本義】 九二以剛居柔하여 在下之中하고 上有六五之應하니 主乎泰而得中道者也라 占者能包容荒穢而果斷剛決하며 不遺遐遠而不昵朋比면 則合乎此爻中行之道矣라.
구이(九二)가 강(剛)으로 유위(柔位)에 거하여 하괘(下卦)의 가운데에 있고 위에 육오(六五)의 응(應)이 있으니, 태(泰)를 주관하면서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다. 점치는 이가 거침과 더러움을 포용해 주면서도 과단성이 있고 강하게 결단하며, 멀리 있는 이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붕비(朋比)들과 사사로이 친하지 않는다면 이 효(爻)의 중행(中行)의 도(道)에 합할 것이다.
象曰 包荒得尙于中行은 以光大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포황득상우중행(包荒得尙于中行)’은 빛나고 큰 것이다.”
【傳】 象은 擧包荒一句하여 而通解四者之義하니 言如此則能配合中行之德하여 而其道光明顯大也라.
〈상전(象傳)〉은 ‘포황(包荒)’ 한 구(句)를 들어 네 가지의 뜻을 통틀어 해석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중행(中行)의 덕(德)에 배합하여 그 도(道)가 광명(光明)하고 현대(顯大)함을 말한 것이다.
九三은 无平不陂며 无往不復이니 艱貞이면 无咎하여 勿恤이라도 其孚라 于食에 有福하리라.
구삼(九三)은 평평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것은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으니, 어렵게 여기고 정도(正道)를 지키면 허물이 없어 근심하지 않더라도 소기의 목적을 얻어 먹음에 복(福)이 있으리라.
【本義】 艱貞이면 无咎하고 勿恤其孚면,
【본의】 어렵게 여기고 정도(正道)를 지키면 허물이 없고, 부신(孚信)을 근심하지 않으면,
【傳】 三居泰之中하고 在諸陽之上하니 泰之盛也라 物理如循環하여 在下者必升하고 居上者必降하니 泰久而必否라 故於泰之盛과 與陽之將進에 而爲之戒曰 无常安平而不險陂者라 하니 謂无常泰也요 无常往而不返者라 하니 謂陰當復也라 平者陂하고 往者復이면 則爲否矣니 當知天理之必然하여 方泰之時하여 不敢安逸하여 常艱危其思慮하고 正固其施爲니 如是則可以无咎라 處泰之道는 旣能艱貞이면 則可常保其泰하여 不勞憂恤이라도 得其所求也라 不失所期 爲孚니 如是則於其祿食에 有福益也라 祿食은 謂福祉니 善處泰者는 其福可食也라 盖德善日積이면 則福祿日臻이니 德踰於祿이면 則雖盛而非滿이라 自古로 隆盛에 未有不失道而喪敗者也니라.
삼(三)은 태(泰)의 가운데에 거하고 여러 양(陽)의 위에 있으니, 태(泰)가 성한 것이다. 사물의 이치는 고리를 따라 도는 것과 같아서 아래에 있는 것은 반드시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는 것은 반드시 아래로 내려오니, 태(泰)가 오래되면 반드시 비색(否塞)해진다. 그러므로 태(泰)가 성하고 양(陽)이 장차 나가려 할 적에 경계하기를 “항상 평안(平安)하기만 하고 험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였으니, 항상 편안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요, “항상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하였으니, 음(陰)이 마땅히 돌아올 것임을 말한 것이다. 평평한 것이 기울어지고 갔던 것이 돌아오면 비(否)가 되니, 마땅히 천리(天理)의 필연성을 알아서 태(泰)의 때를 당하여 감히 안일하지 아니하여, 항상 사려(思慮)를 어렵게 여기고 시위(施爲)를 정고(貞固)하게 하여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태(泰)에 대처하는 도(道)는 이미 어렵게 여기고 정도(正道)를 지키면 항상 그 편안함을 보존하여 수고롭게 걱정하지 않더라도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기대하는 바를 잃지 않음이 부(孚)이니, 이와 같으면 녹식(祿食)에 있어서 복(福)과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녹식(祿食)’은 복지(福祉)를 이르니, 태(泰)에 잘 대처하는 이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덕(德)과 선(善)이 날로 쌓이면 복록(福祿)이 날로 이르니, 덕(德)이 녹(祿)보다 더 많으면 비록 성하더라도 가득한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융성할 때에 도(道)를 잃지 않고서 상패(喪敗)하는 이는 있지 않았다.
【本義】 將過于中하니 泰將極而否欲來之時也라 恤은 憂也요 孚는 所期之信也라 戒占者艱難守貞이면 則无咎而有福이라.
장차 중(中)을 지나게 되었으니, 태(泰)가 장차 극(極)에 이르러 비(否)가 오려고 하는 때이다. 휼(恤)은 근심함이요 부(孚)는 기대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점치는 이에게 어렵게 여기고 정(貞)을 지키면 허물이 없어 복(福)이 있을 것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无往不復은 天地際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가고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음은 천지(天地)가 교제하는 것이다.”
【傳】 无往不復은 言天地之交際也라 陽降于下하면 必復于上하고 陰升于上하면 必復于下하나니 屈伸往來之常理也[一作理之常也]라 因天地交際之道하여 明否泰不常之理하여 以爲戒也라.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천지(天地)가 교제(交際)함을 말한 것이다. 양(陽)이 아래로 내려오면 반드시 위로 돌아가고, 음(陰)이 위로 올라가면 반드시 아래로 돌아오니, 이는 굴신(屈伸)과 왕래(往來)의 떳떳한 이치이다. 천지(天地)가 교제하는 도(道)를 인하여 비(否)와 태(泰)가 일정하지 않은 이치를 밝혀서 경계로 삼은 것이다.
六四는 翩翩히 不富以其隣하여 不戒以孚로다.
육사(六四)는 편편(翩翩)히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웃들과 함께 하여 경계하지 않아도 서로 믿도다.
【傳】 六四는 處泰之過中하고 以陰在上하여 志在下復이요 上二陰亦志在趨下라 翩翩은 疾飛之貌니 四翩翩就下하여 與其隣同也라 隣은 其類也니 謂五與上이라 夫人富而其類從者는 爲利也요 不富而從者[一无者字]는 其志同也라 三陰이 皆在下之物이어늘 居上은 乃失其實이니 其志皆欲下行이라 故不富而相從하여 不待戒告而誠意相合也라 夫陰陽之升降은 乃時運之否泰니 或交或散이 理之常也라 泰旣過中이면 則將變矣라 聖人於三에 尙云艱貞則有福이라 하시니 蓋三爲將中이니 知戒則可保요 四已過中矣니 理必變也라 故專言始終反復之道하고 五는 泰之主일새 則復言處泰之義하니라.
육사(六四)는 태(泰)가 중(中)을 지난 곳에 처하고 음(陰)으로 위에 있어서 뜻이 아래로 돌아감에 있으며, 위의 두 음(陰) 역시 뜻이 아래로 나아감에 있다. ‘편편(翩翩)’은 빨리 나는 모양이니, 사(四)가 편편(翩翩)히 아래로 나아가서 그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인(隣)은 그 동류이니, 오(五)와 상(上)을 이른다. 사람이 부유한데 무리가 따르는 것은 이익 때문이고, 부유하지 않는데도 따르는 것은 뜻이 같기 때문이다. 세 음(陰)이 모두 아래에 있는 사물인데 위에 거함은 바로 실(實)을 잃은 것이니, 그 뜻이 모두 아래로 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는데도 서로 따라서 굳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의(誠意)가 서로 합하는 것이다. 음(陰)과 양(陽)이 오르고 내림은 바로 시운(時運)이 비색(否塞)해지고 통태(通泰)해지는 것이니, 혹 사귀고 혹 흩어짐이 떳떳한 이치이다. 태(泰)가 이미 중(中)을 지났으면 장차 변하게 된다. 성인(聖人)이 삼효(三爻)에서는 오히려 “어렵게 여기고 정도를 지키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삼(三)은 장차 중(中)이 되려 하니 경계할 줄을 알면 보존할 수 있지만 사(四)는 이미 중(中)을 지났으니 이치상 반드시 변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시종 반복(反復)하는 도(道)를 말하였고, 오(五)는 태(泰)의 주체이기에 다시 태(泰)에 대처하는 이(理)를 말한 것이다.
【本義】 已過乎中하니 泰已極矣라 故三陰이 翩然而下復하여 不待富而其類從之하니 不待戒令而信也라 其占이 爲有小人合交하여 以害正道하니 君子所當戒也라 陰虛陽實이라 故凡言不富者는 皆陰爻也라.
이미 중(中)을 지났으니, 태(泰)가 이미 극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세 음(陰)이 편편(翩翩)히 아래로 돌아와서 부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동류들이 따라오니, 굳이 경계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믿는 것이다. 그 점(占)은 소인(小人)들이 모이고 사귀어 정도(正道)를 해침이 되니, 군자(君子)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음(陰)은 허(虛)하고 양(陽)은 실(實)하므로 무릇 ‘불부(不富)’라고 말한 것은 모두 음효(陰爻)이다.
象曰 翩翩不富는 皆失實也요 不戒以孚는 中心願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편편불부(翩翩不富)’는 모두 실(實)을 잃었기 때문이요, 경계하지 않아도 믿음은 중심(中心)에 원하기 때문이다.”
【傳】 翩翩은 下往之疾이라 不待富而隣從者는 以三陰在上하여 皆失其實故也라 陰本在下之物이어늘 今乃居上하니 是失實也라 不待告戒而誠意相與者는 蓋其中心所願故也니 理當然者는 天也요 衆所同者는 時也라.
‘편편(翩翩)’은 아래로 가기를 빨리하는 것이다. 부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웃들이 따르는 것은 세 음(陰)이 위에 있어서 모두 실(實)을 잃었기 때문이다. 음(陰)은 본래 아래에 있는 사물인데, 이제 마침내 위에 거했으니, 이는 실(實)을 잃은 것이다. 고계(告戒)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의(誠意)로 서로 친하는 것은 중심(中心)에 서로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니, 이치에 당연함은 천리(天理)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은 시운(時運)이다.
【本義】 陰本居下어늘 在上은 爲失實이라.
음(陰)은 본래 아래에 있는 것인데 위에 있음은 실(實)을 잃은 것이다.
六五는 帝乙歸妹니 以祉며 元吉이리라.
육오(六五)는 제을(帝乙)이 여동생을 시집보냄이니, 이로써 복을 받을 것이며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리라.
【傳】 史에 謂湯爲天乙하고 厥後에 有帝祖乙하니 亦賢王也요 後又有帝乙하니라 多士曰 自成湯至于帝乙히 罔不明德恤祀라 하니 稱帝乙者는 未知誰是나 以爻義觀之하면 帝乙은 制王姬下嫁之禮法者也라 自古帝女雖皆下嫁나 至帝乙然後에 制爲[一作其]禮法하여 使降其尊貴하여 以順從其夫也라 六五以陰柔居君位하여 下應於九二剛明之賢하니 五能倚任其賢臣而順從之를 如帝乙之歸妹然하여 降其尊而順從於陽이면 則以之受祉요 且元吉也라 元吉은 大吉而盡善者也니 謂成治泰之功也라.
사책(史冊)에 탕왕(湯王)을 일러 천을(天乙)이라 하였고, 그 뒤에 제(帝) 조을(祖乙)이 있었으니 역시 어진 임금이었으며, 뒤에 또 제을(帝乙)이 있었다. 《서경(書經)》〈다사(多士)〉에 이르기를 “성탕(成湯)으로부터 제을(帝乙)에 이르기까지 덕(德)을 밝히고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제을(帝乙)이라 칭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효(爻)의 뜻으로 살펴보면, 제을(帝乙)은 왕희(王姬)를 하가(下嫁)시키는 예법(禮法)을 제정한 이일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딸을 비록 모두 하가(下嫁)시켰으나 제을(帝乙)에 이른 뒤에야 예법(禮法)을 제정해서 그 존귀(尊貴)함을 낮추어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였다. 육오(六五)가 음유(陰柔)로서 군위(君位)에 거하여 아래로 구이(九二)의 강명(剛明)한 현자(賢者)에게 응하니, 오(五)가 현신(賢臣)에게 의지하고 신임하여 순종하기를 제을(帝乙)이 여동생을 시집보내듯이 하여, 그 높음을 낮추어 양(陽)에게 순종하게 하면 복을 받고 또 크게 선(善)하고 길(吉)할 것이다. ‘원길(元吉)’은 크게 길(吉)하여 지극히 선(善)한 것이니, 태(泰)를 다스리는 공(功)을 이루었음을 이른다.
【本義】 以陰居尊하여 爲泰之主하고 柔中虛己하여 下應九二하니 吉之道也요 而帝乙歸妹之時에도 亦嘗占得此爻하니 占者如是면 則有祉而元吉矣리라 凡經에 以古人爲言 如高宗箕子之類者는 皆倣此하니라.
음(陰)으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여 태괘(泰卦)의 주체가 되고 유중(柔中)으로 자기 마음을 겸허하게 하여 아래로 구이(九二)에게 응하니 길(吉)한 도(道)이며, 제을(帝乙)이 여동생을 시집보낼 때에도 일찍이 점을 쳐서 이 효(爻)를 얻었으니,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이 하면 복(福)이 있어서 원길(元吉)할 것이다. 무릇 경문(經文)에서 고인(古人)이라고 말한 것으로 고종(高宗)과 기자(箕子) 같은 따위는 모두 이와 같다.
象曰 以祉元吉은 中以行願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이지원길(以祉元吉)’은 중도(中道)로써 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傳】 所以能獲祉福且元吉者는 由其以中道合而行其志願也라 有中德일새 所以能任剛中之賢이니 所聽從者皆其志願也라 非其所欲이면 能從之乎아.
지복(祉福)을 얻고 또 원길(元吉)한 까닭은 중도(中道)로써 합하여 그 뜻에 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중덕(中德)이 있으므로 강중(剛中)한 현자(賢者)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니, 들어 따르는 것이 모두 뜻에 원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면 능히 따르겠는가.
上六은 城復于隍이라 勿用師요 自邑告命이니 貞이라도 吝하니라.
상육(上六)은 성(城)이 무너져 황(隍)으로 돌아감이니 군대를 쓰지 말 것이요, 읍(邑)으로부터 고명(告命)할 것이니 정(貞)하더라도 부끄럽다.
【본의】 읍(邑)으로부터 고명(告命)할 것이니,
【傳】 掘隍土하여 積累以成城은 如治道積累以成泰라 及泰之終이면 將反於否하니 如城土頹圮하여 復反于隍也라 上은 泰之終이어늘 六以小人處之하니 行將否矣라 勿用師는 君之所以能用其衆者는 上下之情通而心從也어늘 今泰之將終에 失泰之道하여 上下之情不通矣라 民心離散하여 不從其上하니 豈可用也리오 用之則亂이라 衆旣不可用인댄 方自其親近而告命之니 雖使所告命者得其正이라도 亦可羞吝이라 邑은 所居로 謂親近이니 大率告命은 必自近始라 凡貞凶, 貞吝이 有二義하니 有貞固守此則凶吝者하고 有雖得正亦凶吝者라 此不云貞凶而云貞吝者[一无者字]는 將否而方告命이 爲可羞吝이니 否不由於告命也라.
해자의 흙을 파서 쌓아 성(城)을 이룸은 치도(治道)를 많이 쌓아 태(泰)를 이룸과 같다. 태(泰)의 종(終)에 미치면 장차 비(否)로 돌아갈 것이니, 성(城)의 흙이 무너져서 다시 해자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상(上)은 태(泰)의 종(終)인데, 육(六)이 소인(小人)으로 여기에 처했으니, 장차 비색(否塞)해질 것이다. ‘물용사(勿用師)’는 군주(君主)가 무리를 쓸 수 있는 까닭은 상하(上下)의 정(情)이 통하여 마음으로 따르기 때문인데, 이제 태(泰)가 장차 마치려 함에 태(泰)의 도리를 잃어 상하(上下)의 정(情)이 통하지 못하고, 민심(民心)이 이산(離散)되어 윗사람을 따르지 않으니,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쓰면 혼란해진다. 무리를 이미 쓸 수 없다면 바야흐로 친근(親近)한 곳으로부터 고명(告命)하여야 하니, 비록 고명(告命)하는 것이 올바름을 얻더라도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읍(邑)은 거주하는 곳으로 친근(親近)한 곳을 이르니, 대체로 고명(告命)함은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무릇 정흉(貞凶)과 정린(貞吝)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정고(貞固)하게 이것을 지키면 흉하거나 부끄러운 경우가 있고, 비록 정도(正道)를 얻더라도 역시 흉하거나 부끄러운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정흉(貞凶)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린(貞吝)이라고 말한 것은 장차 비색(否塞)해질 때에야 비로소 고명(告命)을 내림이 부끄러울 만하기 때문이니, 비색(否塞)함이 고명(告命)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本義】 泰極而否는 城復于隍之象이니 戒占者不可力爭이요 但可自守니 雖得其貞이라도 亦不免於羞吝也라.
태(泰)가 극(極)에 이르러 비색(否塞)해짐은 성(城)이 무너져 해자로 돌아가는 상(象)이니, 점치는 이에게 힘으로 다투지 말고 다만 스스로 지켜야 하니, 비록 올바름을 얻더라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城復于隍은 其命이 亂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성(城)이 무너져 해자로 돌아감은 명령을 요란스럽게 내리는 것이다.”
【傳】 城復于隍矣니 雖其命之亂이나 不可止也라.
성(城)이 무너져 해자로 돌아가니, 비록 명령하기를 요란스럽게 하나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本義】 命亂이라 故復否니 告命은 所以治之也라.
명령이 혼란하기 때문에 비(否)로 돌아가는 것이니, 고명(告命)은 이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11. 태(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