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겸(謙)
【傳】 謙은 序卦에 有大者는 不可以盈이라 故受之以謙이라 하니라 其有旣大면 不可至於盈滿이요 必在謙損이라 故大有之後에 受之以謙也라 爲卦 坤上艮下하니 地中有山也라 地體卑下하니 山은 高大之物而居地之下는 謙之象也요 以崇高之德而處卑之下는 謙之義也라.
겸괘(謙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큰 것을 소유한 이는 가득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겸괘(謙卦)로 받았다.” 하였다. 소유함이 이미 성대하면 영만(盈滿)함에 이르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겸손(謙損)한 데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유괘(大有卦)의 뒤에 겸괘(謙卦)로 받은 것이다. 괘(卦)됨이 곤(坤)이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으니, 땅 가운데 산(山)이 있는 것이다. 땅의 체(體)는 비하(卑下)하니, 산(山)은 고대(高大)한 물건인데 땅의 아래에 있음은 겸(謙)의 상(象)이요, 숭고한 덕(德)으로 낮은 곳의 아래에 처함은 겸(謙)의 뜻이다.
謙은 亨하니 君子有終이니라.
겸(謙)은 형통(亨通)하니, 군자(君子)는 끝마침이 있다.
【本義】 君子有終이리라.
【본의】 군자(君子)는 끝마침이 있으리라.
【傳】 謙有亨之道也라 有其德而不居를 謂之謙이니 人以謙巽自處면 何往而不亨乎리오 君子有終은 君子志存乎謙巽하니 達理故로 樂天而不競하고 內充故로 退讓而不矜하여 安履乎謙하여 終身不易하여 自卑而人益尊之하고 自晦而德益光顯하니 此所謂君子有終也라 在小人하여는 則有欲必競하고 有德必伐하니 雖使勉慕於謙이라도 亦不能安行而固守하여 不能有終也라.
겸(謙)은 형통(亨通)할 도(道)가 있다. 그 덕(德)이 있으면서도 자처(自處)하지 않음을 겸(謙)이라 이르니, 사람이 겸손(謙巽)함으로 자처(自處)하면 어디를 간들 형통(亨通)하지 않겠는가. ‘군자유종(君子有終)’은 군자(君子)는 뜻이 겸손(謙巽)함에 있으니, 이치에 통달하기 때문에 천명(天命)을 즐거워하여 다투지 않고, 내면이 충만하기 때문에 퇴양(退讓)하여 자랑하지 않아서 겸손(謙巽)함을 편안히 행하여 종신토록 바꾸지 아니하여, 스스로 낮추되 사람들이 더욱 높여주고, 스스로 숨되 덕(德)이 더욱 광현(光顯)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는 끝마침이 있다’는 것이다. 소인(小人)에게 있어서는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고 덕(德)이 있으면 반드시 자랑하니, 비록 가령 겸손(謙巽)함을 힘쓰고 사모하더라도 역시 편안히 행하고 굳게 지키지 못하여 끝마침이 있지 못하다.
【本義】 謙者는 有而不居之義라 止乎內而順乎外는 謙之意也요 山至高而地至卑어늘 乃屈而止於其下는 謙之象也라 占者如是면 則亨通而有終矣니 有終은 謂先屈而後伸也라.
겸(謙)은 소유하고도 자처하지 않는 뜻이다. 안에 그치고 밖에 순함은 겸(謙)의 뜻이요, 산(山)은 지극히 높고 땅은 지극히 낮은데, 산(山)이 마침내 굽혀서 그 아래에 그침은 겸(謙)의 상(象)이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이 하면 형통(亨通)하여 끝마침이 있을 것이니, 유종(有終)은 먼저는 굽히나 뒤에는 폄을 이른다.
彖曰 謙亨은 天道下(濟)[際]而光明하고 地道卑而上行이라.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겸형(謙亨)’은 천도(天道)는 아래로 교제(交際)하여 광명(光明)하고, 지도(地道)는 낮아 위로 행한다.
【傳】 濟는 當爲際라 此는 明謙而能亨之義라 天之道는 以其氣下際라 故能化育萬物하여 其道光明하니 下際는 謂下交也라 地之道는 以其處卑일새 所以其氣上行하여 交於天하니 皆以卑降而亨也라.
제(濟)는 마땅히 제(際)가 되어야 한다. 이는 겸손(謙遜)하여 형통(亨通)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늘의 도(道)는 기운이 아래로 사귀기 때문에 만물(萬物)을 화육(化育)하여 그 도(道)가 광명(光明)하니, 하제(下際)는 아래로 사귐을 이른다. 땅의 도(道)는 낮은 곳에 처했기 때문에 그 기운이 위로 행하여 하늘과 사귀니, 모두 낮추어 형통(亨通)한 것이다.
【本義】言謙之必亨이라
겸손(謙巽)함이 반드시 형통(亨通)함을 말하였다.
天道는 虧盈而益謙하고,
하늘의 도(道)는 가득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謙巽)한 것을 더해주며,
【傳】 以天行而言하면 盈者則虧하고 謙者則益하니 日月陰陽이 是也라.
하늘의 운행(運行)으로 말하면 가득찬 것은 이지러지고 겸손(謙巽)한 것은 더해주니, 해와 달과 음양(陰陽)이 이것이다.
地道는 變盈而流謙하고,
땅의 도(道)는 가득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손(謙巽)한 데로 흐르며,
【傳】 以地勢而言하면 盈滿者傾變而反陷하고 卑下者流注而益增也라.
지세(地勢)로 말하면 영만(盈滿)한 곳은 기울고 변하여 도리어 패이고, 비하(卑下)한 곳은 흘러 들어와서 더욱 더하게 된다.
鬼神은 害盈而福謙하고,
귀신(鬼神)은 가득찬 것을 해치고 겸손(謙巽)한 것에 복을 주고,
【傳】 鬼神은 謂造化之跡이라 盈滿者를 禍害之하고 謙損者를 福祐之하니 凡過而損, 不足而益者 皆是也라.
귀신(鬼神)은 조화(造化)의 자취를 이른다. 영만(盈滿)한 것은 화(禍)를 주어 해치고 겸손(謙損)한 것은 복(福)을 주어 도우니, 무릇 과(過)하면 덜어내고 부족(不足)하면 더해주는 것이 다 이것이다.
人道는 惡(오)盈而好謙하나니,
사람의 도(道)는 가득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謙巽)한 것을 좋아하니,
【傳】 人情은 疾惡於盈滿而好與於謙巽也라 謙者는 人之至德이라 故聖人詳言하니 所以戒盈而勸謙也라.
인정(人情)은 영만(盈滿)함을 미워하고 겸손(謙巽)함을 좋아하여 상대한다. 겸손(謙巽)은 사람의 지극한 덕(德)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이는 영만(盈滿)함을 경계하여 겸손(謙巽)함을 권한 것이다.
謙은 尊而光하고 卑而不可踰니 君子之終也라.
겸(謙)은 높고 빛나며 낮되 넘을 수가 없으니, 군자(君子)의 끝마침이다.”
【본의】 높은 이는 빛나고 낮은 이도,
【傳】 謙爲卑巽也나 而其道尊大而光顯하고 自處雖卑屈이나 而其德實高하여 不可加尙하니 是不可踰也라 君子至誠於謙하여 恒而不變이면 有終也라 故尊光이라.
겸(謙)은 낮추고 공손히 하는 것이나 그 도(道)가 존대(尊大)하고 광현(光顯)하며, 자처(自處)하기를 비록 비굴(卑屈)하게 하나 그 덕(德)이 실제로 높아서 더할 수가 없으니, 이는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겸손(謙巽)함을 지성(至誠)으로 하여 항상하고 변치 않는다면 끝마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고 빛나는 것이다.
【本義】 變은 謂傾壞요 流는 謂聚而歸之라 人能謙則其居尊者는 其德愈光하고 其居卑者는 人亦莫能過하니 此는 君子所以有終也라.
변(變)은 기울고 무너짐을 이르고, 유(流)는 모여 돌아감을 이른다. 사람이 겸손(謙巽)하면서 높은 곳에 처한 이는 그 덕(德)이 더욱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한 이는 사람들이 역시 넘을 수 없으니, 이는 군자(君子)가 끝마침이 있는 것이다.
象曰 地中有山이 謙이니 君子以하여 裒多益寡하여 稱物平施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땅 가운데 산(山)이 있는 것이 겸(謙)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많은 데에서 취하여 적은 데에 더해 주어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공평하게 한다.”
【傳】 地體卑下하니 山之高大而在地中은 外卑下而內蘊高大之象이라 故爲謙也라 不云山在地中而曰地中有山은 言卑下之中에 蘊其崇高也라 若言崇高蘊於卑下之中이라 하면 則文理不順하니 諸象皆然하니 觀文可見이라 君子以裒多益寡稱物平施는 君子觀謙之象에 山而在地下하니 是高者下之요 卑者上之라 見抑高擧下, 損過益不及之義하여 以施於事하면 則裒取多者하여 增益寡者하여 稱物之多寡하여 以均其施與하여 使得其平也라.
땅의 체(體)가 비하(卑下)하니, 산(山)이 고대(高大)하면서 땅 가운데에 있음은 밖은 비하(卑下)하면서 안에 고대(高大)함을 쌓은 상(象)이다. 그러므로 겸(謙)이라 한 것이다. 산(山)이 지중(地中)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지중(地中)에 산(山)이 있다고 말한 것은 비하(卑下)한 가운데에 숭고(崇高)함을 쌓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숭고(崇高)함이 비하(卑下)한 가운데에 쌓여 있다’고 말한다면 문리(文理)가 순하지 못하니, 모든 상(象)이 다 그러한 바, 글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군자이부다익과칭물평시(君子以裒多益寡稱物平施)’는 군자(君子)가 겸괘(謙卦)의 상(象)을 봄에 산(山)이 땅 아래에 있으니, 이는 높은 것이 아래로 내려오고 낮은 것이 위로 올라 간 것이다. 높은 것을 억제하고 낮은 것을 들어 올려주며, 과(過)한 것을 덜어 불급(不及)한 것에 더해주는 뜻을 보고서 일에 시행한다면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것에 더해주어 물건의 많고 적음을 저울질해서 그 베풀어줌을 고르게 하여 공평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本義】 以卑蘊高는 謙之象也라 裒多益寡는 所以稱物之宜而平其施니 損高增卑하여 以趨於平은 亦謙之意也라.
낮음으로써 높음을 쌓음은 겸(謙)의 상(象)이다. 많은 데에서 취하여 적은 데에 더해줌은 물건의 마땅함을 저울질하여 그 베풂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니, 높은 것을 덜어내어 낮은 것에 더해주어 공평함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 역시 겸(謙)의 뜻이다.
初六은 謙謙君子니 用涉大川이라도 吉하니라.
초육(初六)은 겸손(謙巽)하고 겸손(謙巽)한 군자(君子)이니, 대천(大川)을 건너더라도 길(吉)하다.
【本義】 用涉大川이 吉하리라.
【본의】대천(大川)을 건넘이 길(吉)하리라.
【傳】 初六은 以柔順處謙하고 又居一卦之下하니 爲自處卑下之至니 謙而又謙也라 故曰謙謙이니 能如是者는 君子也라 自處至謙이면 衆所共與也니 雖用涉險難이나 亦无患害어든 況居平易乎아 何所不吉也리오 初處謙而以柔居下하니 得無過於謙乎아 曰 柔居下는 乃其常也니 但見其謙之至라 故爲謙謙이요 未見其失也라.
초육(初六)은 유순(柔順)함으로 겸(謙)에 처하고 또 하나의 괘(卦)의 아래에 있어서, 자처(自處)하기를 비하(卑下)하게 함이 지극하니, 겸손(謙巽)하고 또 겸손(謙巽)하다. 그러므로 ‘겸겸(謙謙)’이라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는 이는 군자(君子)이다. 자처하기를 지극히 겸손(謙巽)하게 하면 사람들이 함께 더부는 바가 되니, 비록 험난함을 건너더라도 환해(患害)가 없는데 하물며 평이함에 거함에랴. 어느 것인들 길(吉)하지 않겠는가. “초(初)는 겸(謙)에 처하였고 유(柔)로서 아래에 거하였으니, 겸손(謙巽)함이 과(過)하지 않겠는가?” “유(柔)가 아래에 거함은 바로 떳떳한 것이니, 단지 겸손(謙巽)함이 지극함을 볼 뿐이다. 그러므로 겸겸(謙謙)이 되고 그 잘못을 볼 수 없는 것이다.”
【本義】 以柔處下는 謙之至也니 君子之行也라 以此涉難이면 何往不濟리오 故占者如是면 則利以涉川也라.
유(柔)로서 아래에 처함은 겸손(謙巽)함이 지극한 것이니, 군자(君子)의 행실이다. 이로써 어려움을 건넌다면 어디를 간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이 하면 내를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象曰 謙謙君子는 卑以自牧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겸겸군자(謙謙君子)’는 낮춤으로 자처하는 것이다.”
【傳】 謙謙은 謙之至也니 謂君子以謙卑之道로 自牧也라 自牧은 自處也니 詩云自牧歸荑라 하니라.
겸겸(謙謙)은 겸손(謙巽)함이 지극한 것이니, 군자(君子)가 겸비(謙卑)의 도(道)로 자목(自牧)함을 이른다. 자목(自牧)은 자처함이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자처하기를 삐비처럼 부드럽게 한다.” 하였다.
六二는 鳴謙이니 貞하고 吉하니라.
육이(六二)는 겸손(謙巽)함을 울림이니, 정(貞)하고 길(吉)하다.
【본의】 겸손(謙遜)함으로 알려짐이니,
【傳】 二以柔順居中하니 是爲謙德積於中이라 謙德이 充積於中이라 故發於外하여 見於聲音顔色이라 故曰鳴謙이요 居中得正하여 有中正之德也라 故云貞吉이라 凡貞吉은 有爲貞且吉者하고 有爲得貞則吉者하니 六二之貞吉은 所自有也라.
이(二)는 유순(柔順)함으로 중(中)에 거하였으니, 이는 겸덕(謙德)이 가운데에 쌓인 것이다. 겸덕(謙德)이 가운데 충적(充積)하였으므로 밖에 발하여 성음(聲音)과 안색(顔色)에 나타나기 때문에 ‘명겸(鳴謙)’이라 하였고, 중(中)에 거하고 정(正)을 얻어 중정(中正)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정길(貞吉)’이라 한 것이다. 무릇 ‘정길(貞吉)’은 정(貞)하고 또 길(吉)한 경우가 있고, 정(貞)을 얻으면 길(吉)한 경우가 있으니, 육이(六二)의 정길(貞吉)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本義】 柔順中正하여 以謙有聞하니 正而且吉者也라 故其占如此하니라.
유순(柔順)하고 중정(中正)하여 겸손(謙巽)함으로 알려짐이 있으니, 바르고 또 길(吉)한 이이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鳴謙貞吉은 中心得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명겸정길(鳴謙貞吉)’은 중심(中心)에 얻은 것이다.”
【傳】 二之謙德은 由至誠積於中하여 所以發於聲音이니 中心所自得也요 非勉[一有强字]爲之也라.
이(二)의 겸덕(謙德)은 지성(至誠)이 가운데에 쌓임으로 말미암아 성음(聲音)에 나타난 것이니, 중심(中心)에 스스로 얻은 것이요 억지로 힘써 한 것이 아니다.
九三은 勞謙이니 君子有終이니 吉하니라.
구삼(九三)은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함이니, 군자(君子)가 끝마침을 두어야 하니 길(吉)하다.
【本義】 君子有終하여 吉하리라.
【본의】 군자가 끝마침이 있어 길하리라.
【傳】 三以陽剛之德而居下體하여 爲衆陰所宗하고 履得其[一作正]位하여 爲下之上하니 是上爲君所任하고 下爲衆所從하여 有功勞而持謙德者也라 故曰勞謙이라 古之人有當之者하니 周公是也라 身當天下之大任하여 上奉幼弱之主하고 謙恭自牧하여 夔夔如畏然하시니 可謂有勞而能謙矣라 旣能勞謙하고 又須君子行之有終이면 則吉이라 夫樂高喜勝은 人之常情이니 平時能謙도 固已鮮矣어든 況有功勞可尊乎아 雖使知謙之善하여 勉而爲之라도 若矜負之心不忘이면 則不能常久하니 欲其有終이나 不可得也라 唯君子는 安履謙順이 乃其常行이라 故久而不變하니 乃所謂有終이니 有終則吉也라 九三은 以剛居正하여 能終者也니 此爻之德이 最盛이라 故象辭特重하니라.
삼(三)은 양강(陽剛)의 덕(德)으로 하체(下體)에 거하여 여러 음(陰)에게 높임을 받고 밟음이 그 자리를 얻어 하체(下體)의 상(上)이 되었으니, 이는 위로는 군주(君主)에게 신임을 받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에게 추종을 받아 공로(功勞)가 있으면서도 겸덕(謙德)을 갖는 이이다. 그러므로 ‘노겸(勞謙)’이라 한 것이다. 옛사람 중에 이에 해당하는 이가 있으니, 주공(周公)이 이분이다. 몸소 천하(天下)의 큰 임무를 담당하여 위로는 유약(幼弱)한 군주(君主)를 받들고 겸손(謙遜)과 공손함으로 자처하여 조심하고 조심하여 두려운 듯이 하였으니, 공로(功勞)가 있으면서도 겸손(謙巽)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이미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또 모름지기 군자(君子)가 행함에 끝마침을 두면 길(吉)한 것이다. 높은 것을 좋아하고 이김을 기뻐함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니, 평상시 겸손(謙巽)한 이도 진실로 이미 드문데 하물며 높일만한 공로(功勞)가 있음에랴. 비록 겸손(謙巽)함의 좋음을 알아 힘써서 하더라도 만약 자랑하고 자부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면 항상하고 오래하지 못하니, 끝마침을 두고자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군자(君子)는 겸손(謙巽)함과 순함을 편안히 행함이 바로 떳떳한 행실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변치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끝마침을 둔다’는 것이니, 끝마침을 두면 길(吉)하다. 구삼(九三)은 강(剛)으로서 정(正)에 거하여 끝마칠 수 있는 것이니, 이 효(爻)의 덕(德)이 가장 성대하다. 그러므로 〈상전(象傳)〉의 말이 특별히 중한 것이다.
【本義】 卦唯一陽이 居下之上하여 剛而得正하니 上下所歸요 有功勞而能謙하니 尤人所難이라 故有終而吉이라 占者如是면 則如其應矣리라.
괘(卦)가 오직 하나의 양(陽)이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강(剛)하면서 정(正)을 얻었으니 상하(上下)가 돌아오는 바이며, 공로(功勞)가 있으면서도 겸손(謙巽)하니 더욱 사람이 하기 어려운 바이다. 그러므로 끝마침이 있어 길(吉)한 것이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으면 그 효응(效應)과 같을 것이다.
象曰 勞謙君子는 萬民이 服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노겸군자(勞謙君子)’는 만민(萬民)이 복종한다.”
【傳】 能勞謙之君子는 萬民所尊服也라 繫辭云 勞而不伐하고 有功而不德하니 厚之至也니 語以其功下人者也라 德言盛이요 禮言恭이니 謙也者는 致恭以存其位者也라 하니라 有勞而不自矜伐하고 有功而不自以爲德은 是其德弘厚之至也니 言以其功勞而自謙以下於人也라 德言盛, 禮言恭은 以其德言之則至盛이요 以其自處之禮言之則至恭이니 此所謂謙也라 夫謙也者는 謂致恭以存其位者也니 存은 守也니 致其恭巽하여 以守其位라 故高而不危하고 滿而不溢이라 是以로 能終吉也라 夫君子履謙은 乃其常行이요 非爲保其位而爲之也어늘 而言存其位者는 蓋能致恭이 所以能存其位니 言謙之道如此라 如言爲善有令名하니 君子豈爲令名而爲善也哉아 亦言其令名者는 爲善之故[一作效]也라.
공로(功勞)가 있으면서도 겸손(謙巽)한 군자(君子)는 만민(萬民)이 높이고 복종하는 바이다.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공로(功勞)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功)이 있어도 덕(德)으로 여기지 않아 후함이 지극하니, 공(功)을 가지고 남에게 낮추는 이를 말한다. 덕(德)으로 말하면 성대(盛大)하고 예(禮)로 말하면 공손하니, 겸(謙)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하여 그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하였다. 공로(功勞)가 있어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공(功)이 있어도 스스로 덕(德)으로 여기지 않음은 그 덕(德)이 넓고 후함이 지극한 것이니, 공로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겸손(謙巽)하여 남에게 낮춤을 말한다. ‘덕언성(德言盛) 예언공(禮言恭)’은 그 덕(德)으로 말하면 지극히 성대(盛大)하고 그 자처(自處)하는 예(禮)로 말하면 지극히 공손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겸(謙)이다. 겸(謙)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하여 그 지위를 보존함을 이른다. 존(存)은 지킴이니, 그 공손함을 지극히 하여 지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가득차도 넘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끝내 길(吉)할 수 있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겸(謙)을 행함은 바로 떳떳한 행실이요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닌데, ‘그 지위를 보존한다’고 말한 것은 능히 공손함을 지극히 함이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겸(謙)의 도(道)가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선(善)을 행하면 훌륭한 명예가 있다’고 말함과 같으니, 군자(君子)가 어찌 영명(令名)을 위하여 선(善)을 하겠는가. 이 또한 영명(令名)은 선(善)을 행했기 때문임을 말했을 뿐이다.
六四는 无不利撝謙이니라.
육사(六四)는 겸손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本義】 无不利나 撝謙이니라.
【본의 】이롭지 않음이 없으나 겸손함을 발휘하여야 한다.
【傳】 四居上體하여 切近君位하고 六五之君이 又以謙柔自處하며 九三이 又有大功德하여 爲上所任, 衆所宗이어늘 而己居其上하니 當恭畏以奉謙德之君하고 卑巽以讓勞謙之臣하여 動作施爲 无所不利於撝謙也라 撝는 施布之象이니 如人手之撝也라 動息進退에 必施其謙이니 蓋居多懼之地요 又在賢臣之上故也라.
사(四)는 상체(上體)에 거하여 군주(君主)의 자리와 매우 가깝고 육오(六五)의 군주(君主)가 또 겸유(謙柔)로 자처하며, 구삼(九三)이 또 큰 공덕(功德)이 있어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데 자신이 그 위에 거하였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두려워하여 겸덕(謙德)의 군주(君主)를 받들며, 낮추고 겸손(謙巽)하여 노겸(勞謙)의 신하에게 양보하여서, 동작(動作)과 시위(施爲)가 겸손(謙巽)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휘(撝)는 펴는 상(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동식(動息)하고 진퇴(進退)함에 반드시 겸손(謙巽)함을 펴야 하니, 두려움이 많은 자리에 처하였고 또 현신(賢臣)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本義】 柔而得正하고 上而能下하니 其占이 无不利矣라 然居九三之上이라 故戒以更當發揮其謙하여 以示不敢自安之意也라.
유(柔)로서 정(正)을 얻고 위에 있으면서 능히 낮추니, 그 점(占)이 이롭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구삼(九三)의 위에 거하였으므로 다시 그 겸손(謙巽)함을 발휘하라고 경계하여,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겨서는 안 되는 뜻을 보인 것이다.
象曰 无不利撝謙은 不違則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무불리휘겸(无不利撝謙)’은 법칙(法則)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傳】 凡人之謙은 有所宜施하여 不可過其宜也니 如六五或用侵伐이 是也라 唯四는 以處近君之地하고 據勞臣之上이라 故凡所動作이 靡不利於施謙이니 如是然後에 中於法則이라 故曰不違則也라 하니 謂得其宜也라.
무릇 사람의 겸손함은 마땅히 베풀 곳이 있어서 그 마땅함을 지나쳐서는 안 되니, 육오(六五)가 혹 ‘침벌(侵伐)을 사용함’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오직 사효(四爻)는 군주(君主)와 가까운 자리에 처하고 공로가 있는 신하의 윗자리를 점거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동작(動作)하는 바가 겸손함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법칙(法則)에 맞는다. 그러므로 ‘법칙(法則)을 어기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그 마땅함을 얻음을 이른 것이다.
【本義】 言不爲過라.
과(過)함이 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六五는 不富以其隣이니 利用侵伐이니 无不利하리라.
육오(六五)는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얻으니, 침벌(侵伐)함이 이로우니,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本義】 利用侵伐이요.
【본의】 침벌(侵伐)함이 이롭고,
【傳】 富者는 衆之所歸니 唯財爲能聚人이라 五以君位之尊而執謙順하여 以接於下하니 衆所歸也라 故不富而能有其隣也라 隣은 近也니 不富而得人之親也라 爲人君而持謙順이면 天下所歸心也라 然君道는 不可專尙謙柔요 必須威武相濟然後에 能懷服天下라 故利用行侵伐也니 威德竝著然後에 盡君道之宜而无所不利也라 蓋五之謙柔는 當防於過라 故發此義하니라.
부(富)함은 사람들이 귀의하는 바이니, 오직 재물만이 사람을 모을 수 있다. 오(五)는 군위(君位)의 높음으로 겸순(謙順)함을 잡아서 아랫사람을 대하니, 사람들이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소유한 것이다. 인(隣)은 가까움이니, 부유하지 않으면서 남의 친함을 얻는 것이다. 인군(人君)이 되어 겸순(謙順)함을 잡으면 천하(天下)가 마음으로 귀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군주(君主)의 도(道)는 오로지 겸유(謙柔)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위엄과 굳셈으로 서로 구제한 뒤에야 천하(天下)를 회유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침벌(侵伐)을 행함이 이로운 것이니, 위엄과 덕(德)이 모두 드러난 뒤에야 군도(君道)의 마땅함을 다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오(五)의 겸유(謙柔)는 마땅히 과(過)함을 막아야 하므로 이러한 뜻을 발한 것이다.
【本義】 以柔居尊하니 在上而能謙者也라 故爲不富而能以其隣之象이라 蓋從之者衆矣나 猶有未服者면 則利以征之요 而於他事에도 亦无不利하니 人有是德則如其占也라.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니, 위에 있으면서 겸손한 이이다. 그러므로 부(富)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얻는 상(象)이 된다. 따르는 이가 많으나 아직도 복종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정벌(征伐)함이 이롭고, 다른 일에 있어서도 역시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이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 이 점괘와 같을 것이다.
象曰 利用侵伐은 征不服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침벌(侵伐)함이 이로움은 복종하지 않는 이를 정벌하는 것이다.”
【傳】 征其文德謙巽所不能服者也라 文德所不能服而不用威武면 何以平治天下리오 非人君之中道니 謙之過也라.
문덕(文德)과 겸손함으로 복종시킬 수 없는 이를 정벌하는 것이다. 문덕(文德)으로 복종시킬 수 없는데도 위무(威武)를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天下)를 평치(平治)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군(人君)의 중도(中道)가 아니니, 겸손함이 지나친 것이다.
上六은 鳴謙이니 利用行師하여 征邑國이니라.
상육(上六)은 겸손함을 울림이니, 군대를 출동하여 읍국(邑國)을 정벌함이 이롭다.
【本義】 利用行師나 征邑國하나니라.
【본의】 군대를 출동함이 이로우나 읍국(邑國)을 정벌하여야 한다.
【傳】 六以柔處柔하니 順之極이요 又處謙之極하니 極乎謙者也라 以極謙而反居高하여 未得遂其謙之志라 故至發於聲音이요 又柔處謙之極하여 亦必見於聲色이라 故曰鳴謙이라 雖居无位之地하여 非任天下之事나 然人之行己에 必須剛柔相濟어늘 上은 謙之極也니 至於太甚이면 則反爲過矣라 故利在以剛武自治니 邑國은 己之私有라 行師는 謂用剛武요 征邑國은 謂自治其私라.
육(六)은 유(柔)로서 유위(柔位)에 처하였으니 순함이 지극하고, 또 겸(謙)의 극에 처하였으니 겸손이 지극한 이이다. 지극한 겸손으로 도리어 높은 곳에 거하여 겸손한 뜻을 이루지 못하므로 성음(聲音)에 발함에 이르며, 또 유(柔)가 겸(謙)의 극(極)에 처하여 역시 반드시 목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나기 때문에 ‘명겸(鳴謙)’이라 한 것이다. 비록 지위가 없는 자리에 거하여 천하(天下)의 일을 맡은 것은 아니나, 사람이 자기 몸을 행함에 반드시 강(剛)과 유(柔)가 서로 구제하여야 하는데 상(上)은 겸손(謙巽)이 지극하니, 너무 심함에 이르면 도리어 과(過)함이 된다. 그러므로 이로움이 강무(剛武)로써 스스로 다스림에 있는 것이니, ‘읍국(邑國)’은 자기의 사유(私有)이다. ‘행사(行師)’는 강무(剛武)를 씀을 이르고, ‘정읍국(征邑國)’은 스스로 사사로움을 다스림을 이른다.
【本義】 謙極有聞하여 人之所與라 故可用行師라 然以其質柔而无位라 故可以征己之邑國而已라.
겸손(謙巽)함이 지극하여 알려짐이 있어서 사람들이 친애하는 바이므로 군대를 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질(質)이 유순(柔順)하고 지위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읍국(邑國)을 정벌할 뿐인 것이다.
象曰 鳴謙은 志未得也니 可用行師하여 征邑國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명겸(鳴謙)’은 뜻을 얻지 못함이니, 군대를 출동하여 읍국(邑國)을 정벌하여야 한다.”
【本義】 可用行師나,
【본의】 군대를 출동하나,
【傳】 謙極而居上하여 欲謙之志를 未得이라 故不勝其切하여 至於鳴也라 雖不當位나 謙旣過極하니 宜以剛武自治其私라 故云利用行師征邑國也라.
겸손함이 지극하면서 상(上)에 거하여 겸손하고자 하는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는 데에 이른 것이다. 비록 자리에 마땅하지 않으나 겸손함이 이미 지나치게 극진하니, 마땅히 강무(剛武)로써 스스로 그 사사로움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군대를 출동하여 읍국(邑國)을 정벌함이 이롭다’고 말한 것이다.
【本義】 陰柔无位하고 才力不足이라 故其志未得하여 而至於行師나 然亦適足以治其私邑而已라.
음유(陰柔)로서 지위가 없고 재주와 힘이 부족하므로 뜻을 얻지 못하여 군대를 출동함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다만 사사로운 읍(邑)을 다스릴 뿐이다.

15. 겸(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