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홍식아, 나 흥수."
"그래!"
"지금 어디냐?"
"장성."
이렇게 벗이 내게 어디냐고 묻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나는 스물 나이에 고향을 떠나 완전히 서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으로 그들의 머리에는 각인되어 있다. 으례 홍식이는 서울에 있겠거니가 정상인 것이다. 내가 명예퇴임을 두 해 반 전에 하고서 아버지를 모시고 장성에 살게 되었는데도 그들의 뇌리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고쳐지지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 동창들 몇이서 소주 한 잔 하잔다."
부랴부랴 아버지 저녁 진지를 차려드리고 나는 준비하기 바쁘다. 조금 있자니 흥수 내외가 들이닥친다.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광주로 출발. 장성농고를 64년에 졸업했으니 무려 46년 만에 처음 만나는 준구가 그 옛날의 약간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착하기 그지없었던 준구. 그 얼굴에 그 미소가 그대로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체구가 왜소해 보인다.
"너 말고 아무도 안 왔냐?"
"그래."
"야들 봐라. 먼저 온댔는데....... 전화 한 번 해 봐라."
그런데 그들은 벌써 와서 광산구청을 한 바퀴 구경 중이란다. 그 옛날 내가 재수를 한답시고 광주에 거주할 때는 유동에서 도청 옆 시립도서관까지 걸어서 3, 40분이었는데 아니 그게 광주 시가지의 다였는데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가지를 않는다. 이 광산구라는 것이 바로 신흥구라서 더욱 그렇다. 완전히 나는 광주에만 가면 장성촌놈, 아니 서울촌놈이 되고 만다.
잠시후, 왁자지껄 두 벗이 들어선다. 그 이름 최영일이, 박영창이.
영일이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몇 번, 제대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어 볼 수도 없는 진수와 함께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다. 영창이는 광주에 사니 내가 장성에 들를 때 두세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저 반갑고 정겨운 얼굴들이다.
오랫만에 흥수 덕에 모여앉은 우리 다섯. 얘기도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창이와 영일이는 벌써 어디서 거나하게 한 잔을 걸친 상태. 기분이 그만인 모양이다.
우리가 먹는 요리. 송정리의 유명하다는 떡갈비다. 돼지고기를 으깬 다음 그것으로 떡처럼 만들어 튀긴 거다. 맛이 유별나다. 우리는 모두 잔에 술을 채우고 오랜만에 건배를 한다. 흥수내외, 영일이, 준구, 영창이,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이다.
이야기는 고개를 넘고 또 넘고 고등학교 시절 한참 유행이었던 나팔바지 얘기 한 토막.
어느날 나팔바지하복(아마 쑥색이었을 것이다) 을 입고 등교를 했단다. 나는 이 야그가 이제까지 흥수 얘긴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영일이 얘기란다. 그 시절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국어과 담당 김국원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의 눈에 그 바지가 보였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그냥 그대로 붙잡혀 들어가 그 선생님도 너무 하셨지 바지 가랭이를 양쪽다 북 하고 뜯어 놓으셨다. 그러니 영일이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때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고 나니 영일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교복, 아니 예의 그 나팔바지를 그대로 입고 교실에 입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우리들의 까만 눈동자 몇십 개가 일제히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었다.
얘긴즉슨 간단하다. 영일이는 너덜거리는 바지를 그대로 입고는 학교구내에 있는 그 김국원 선생님 관사로 갔단다. (그때는 학교에 멀리서 전근 오신 선생님들을 위해 관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사모님께 시침을 뚝 따고는 이렇게 말씀드렸단다.
" 사모님, 바지가 튿어졌는데 선생님께서 댁에 가서 꿰매 달래라셨습니다."
사모님이야 전후사정을 알 길이 없으니 그런가 보다 하시고는 미싱으로 잘 꼬매주시고는 그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점심까지 주셔서 잘 얻어 먹고는 의기양양해서 나왔단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으신 김국원 선생님, 얼마나 기가 차셨으면 수업시간에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영일이, 저 놈이 하 그래 우리집에 가서 바지를 꿰매 입고 갔단 말이야."
우리는 내놓고 웃지도 못하고 속으로 킥킥대느라고 한참 애를 먹은 그때의 기억이 아스름하다. 고1때의 이야기니까 벌써 48년 전 일이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릴 때 하던 장난스런 얘기를 거쳐 드뎌 내가 쓰고자 하는 질투가 터져 나온다. 영창이의 질투다.
"나는 훙수하고 내가 젤 친한 줄 았았는데, 그게 좀 묘하단 말야. 일이 있어 흥수 저 놈이 나를 불러 가보면 홍식이 이놈아가 꼭 옆에 있단 말야. 처음에는 몰랐는데 계속 그러니 기분이 묘하데......."
"그게 뭐가 어때서?"
"야, 봐라 고등학교 때 흥수 저새끼하고 난 같이 악대를 했지, 같이 좀 놀았지. 졸업하고도 광주에서 늘 같이 살았지. 그럼 나랑 더 친해야 되는 거 아냐?"
흥수는 웃기만 하고 묵묵부답이다. 그러니 영창이가 더 열을 낸다. 그러니 내가 한 마디 아니 할 수가 없다.
"영창아, 그게 나는 졸업하고도 군대에서 2년을 흥수와 저 강원도 산골짜기 사방거리에서 같이 살았다. 그래서 그런 거다."
내 해명이 그런데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갔으니 기분 좋은 추억 속에서 영창이가 내게 질투가 난 모양이다.
"야, 새꺄 그래도 기분 나쁘단 말야. 내가 흥수 젤 친한 친구란 말이다."
"그래 니가 젤 친한 친구 해라. 됐냐? 그런 의미에서 자 건배 한 번 하자."
그렇게 우리는 추억의 술잔을 기울이다가 다들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서로 장성농고 동기회를 재건하자고 굳게 약속을 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방으로 직행. 평소에는 그렇게 싫어하는 노래방인데 주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보면 나도 따라간다. 노래 실력들이 보통이 아니다. 하기는 그들은 셋이 모두(흥수, 영창, 영일이 이들은 악대의 일원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수준급이었다. 마포종점을 부르고 멍에를 부르고,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뭐였는지 전혀 모르겠다.
흥수는 끝까지 나를 책임지려 마음을 먹었었던 모양이다. 노래방에서 나오자 택시를 붙잡더니 요금까지 주어가면서 운전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이 친구 장성까지 좀 부탁합니다다. 이렇게 오늘처럼 스스럼없이 옛 친구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소회를 푸는 일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 오늘의 이 즐거움이 내게 주어진 생의 열매이리라. 나는 그들에게 내 시조집 시디를 하나씩 나누어주고, 다음날 준구에게서 두고두고 열어보겠다는 반가운 문자를 받고 씩 웃는다. 꽃사진이 아마추어가 아니네 하는 구절에는 좀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기분이 좋다.
벗들이여, 건강하게 즐겁게 남은 생애도 마무리하기를!
"홍식아, 나 흥수."
"그래!"
"지금 어디냐?"
"장성."
이렇게 벗이 내게 어디냐고 묻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나는 스물 나이에 고향을 떠나 완전히 서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으로 그들의 머리에는 각인되어 있다. 으례 홍식이는 서울에 있겠거니가 정상인 것이다. 내가 명예퇴임을 두 해 반 전에 하고서 아버지를 모시고 장성에 살게 되었는데도 그들의 뇌리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고쳐지지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 동창들 몇이서 소주 한 잔 하잔다."
부랴부랴 아버지 저녁 진지를 차려드리고 나는 준비하기 바쁘다. 조금 있자니 흥수 내외가 들이닥친다.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광주로 출발. 장성농고를 64년에 졸업했으니 무려 46년 만에 처음 만나는 준구가 그 옛날의 약간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착하기 그지없었던 준구. 그 얼굴에 그 미소가 그대로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체구가 왜소해 보인다.
"너 말고 아무도 안 왔냐?"
"그래."
"야들 봐라. 먼저 온댔는데....... 전화 한 번 해 봐라."
그런데 그들은 벌써 와서 광산구청을 한 바퀴 구경 중이란다. 그 옛날 내가 재수를 한답시고 광주에 거주할 때는 유동에서 도청 옆 시립도서관까지 걸어서 3, 40분이었는데 아니 그게 광주 시가지의 다였는데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가지를 않는다. 이 광산구라는 것이 바로 신흥구라서 더욱 그렇다. 완전히 나는 광주에만 가면 장성촌놈, 아니 서울촌놈이 되고 만다.
잠시후, 왁자지껄 두 벗이 들어선다. 그 이름 최영일이, 박영창이.
영일이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몇 번, 제대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어 볼 수도 없는 진수와 함께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다. 영창이는 광주에 사니 내가 장성에 들를 때 두세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저 반갑고 정겨운 얼굴들이다.
오랫만에 흥수 덕에 모여앉은 우리 다섯. 얘기도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창이와 영일이는 벌써 어디서 거나하게 한 잔을 걸친 상태. 기분이 그만인 모양이다.
우리가 먹는 요리. 송정리의 유명하다는 떡갈비다. 돼지고기를 으깬 다음 그것으로 떡처럼 만들어 튀긴 거다. 맛이 유별나다. 우리는 모두 잔에 술을 채우고 오랜만에 건배를 한다. 흥수내외, 영일이, 준구, 영창이,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이다.
이야기는 고개를 넘고 또 넘고 고등학교 시절 한참 유행이었던 나팔바지 얘기 한 토막.
어느날 나팔바지하복(아마 쑥색이었을 것이다) 을 입고 등교를 했단다. 나는 이 야그가 이제까지 흥수 얘긴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영일이 얘기란다. 그 시절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국어과 담당 김국원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의 눈에 그 바지가 보였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그냥 그대로 붙잡혀 들어가 그 선생님도 너무 하셨지 바지 가랭이를 양쪽다 북 하고 뜯어 놓으셨다. 그러니 영일이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때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고 나니 영일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교복, 아니 예의 그 나팔바지를 그대로 입고 교실에 입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우리들의 까만 눈동자 몇십 개가 일제히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었다.
얘긴즉슨 간단하다. 영일이는 너덜거리는 바지를 그대로 입고는 학교구내에 있는 그 김국원 선생님 관사로 갔단다. (그때는 학교에 멀리서 전근 오신 선생님들을 위해 관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사모님께 시침을 뚝 따고는 이렇게 말씀드렸단다.
" 사모님, 바지가 튿어졌는데 선생님께서 댁에 가서 꿰매 달래라셨습니다."
사모님이야 전후사정을 알 길이 없으니 그런가 보다 하시고는 미싱으로 잘 꼬매주시고는 그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점심까지 주셔서 잘 얻어 먹고는 의기양양해서 나왔단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으신 김국원 선생님, 얼마나 기가 차셨으면 수업시간에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영일이, 저 놈이 하 그래 우리집에 가서 바지를 꿰매 입고 갔단 말이야."
우리는 내놓고 웃지도 못하고 속으로 킥킥대느라고 한참 애를 먹은 그때의 기억이 아스름하다. 고1때의 이야기니까 벌써 48년 전 일이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릴 때 하던 장난스런 얘기를 거쳐 드뎌 내가 쓰고자 하는 질투가 터져 나온다. 영창이의 질투다.
"나는 훙수하고 내가 젤 친한 줄 았았는데, 그게 좀 묘하단 말야. 일이 있어 흥수 저 놈이 나를 불러 가보면 홍식이 이놈아가 꼭 옆에 있단 말야. 처음에는 몰랐는데 계속 그러니 기분이 묘하데......."
"그게 뭐가 어때서?"
"야, 봐라 고등학교 때 흥수 저새끼하고 난 같이 악대를 했지, 같이 좀 놀았지. 졸업하고도 광주에서 늘 같이 살았지. 그럼 나랑 더 친해야 되는 거 아냐?"
흥수는 웃기만 하고 묵묵부답이다. 그러니 영창이가 더 열을 낸다. 그러니 내가 한 마디 아니 할 수가 없다.
"영창아, 그게 나는 졸업하고도 군대에서 2년을 흥수와 저 강원도 산골짜기 사방거리에서 같이 살았다. 그래서 그런 거다."
내 해명이 그런데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갔으니 기분 좋은 추억 속에서 영창이가 내게 질투가 난 모양이다.
"야, 새꺄 그래도 기분 나쁘단 말야. 내가 흥수 젤 친한 친구란 말이다."
"그래 니가 젤 친한 친구 해라. 됐냐? 그런 의미에서 자 건배 한 번 하자."
그렇게 우리는 추억의 술잔을 기울이다가 다들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서로 장성농고 동기회를 재건하자고 굳게 약속을 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방으로 직행. 평소에는 그렇게 싫어하는 노래방인데 주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보면 나도 따라간다. 노래 실력들이 보통이 아니다. 하기는 그들은 셋이 모두(흥수, 영창, 영일이 이들은 악대의 일원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수준급이었다. 마포종점을 부르고 멍에를 부르고,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뭐였는지 전혀 모르겠다.
흥수는 끝까지 나를 책임지려 마음을 먹었었던 모양이다. 노래방에서 나오자 택시를 붙잡더니 요금까지 주어가면서 운전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이 친구 장성까지 좀 부탁합니다다. 이렇게 오늘처럼 스스럼없이 옛 친구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소회를 푸는 일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 오늘의 이 즐거움이 내게 주어진 생의 열매이리라. 나는 그들에게 내 시조집 시디를 하나씩 나누어주고, 다음날 준구에게서 두고두고 열어보겠다는 반가운 문자를 받고 씩 웃는다. 꽃사진이 아마추어가 아니네 하는 구절에는 좀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기분이 좋다.
벗들이여, 건강하게 즐겁게 남은 생애도 마무리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