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항(恒)
【傳】 恒은 序卦에 夫婦之道는 不可以不久也라 故受之以恒하니 恒은 久也라 하니라 咸은 夫婦之道니 夫婦[一有之道字]는 終身不[一有可字]變者也라 故咸之後에 受之以恒也라 咸은 少男이 在少女之下하니 以男下女는 是男女交感之義요 恒은 長男이 在長女之上하니 男尊女卑는 夫婦居室之常道也라 論交感之情이면 則少爲親切이요 論尊卑之序면 則長當謹正이라 故兌艮爲咸而震巽爲恒也라 男在女上하여 男動于外하고 女順于內는 人理之常이라 故爲恒也라 又剛上柔下하고 雷風相與하며 巽而動하고 剛柔相應이 皆恒之義也라.
항괘(恒卦)는 〈서괘전(序卦傳)〉에 “부부(夫婦)의 도(道)는 오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항괘(恒卦)로 받았으니, 항(恒)은 오램이다.” 하였다. 함(咸)은 부부(夫婦)의 도(道)이니, 부부(夫婦)는 종신토록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괘(咸卦)의 뒤에 항괘(恒卦)로 받은 것이다. 함(咸)은 소남(少男)이 소녀(少女)의 아래에 있으니 남자가 여자에게 낮춤은 이는 남녀(男女)가 서로 감동하는 뜻이요, 항(恒)은 장남(長男)이 장녀(長女)의 위에 있으니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음은 부부(夫婦)가 집에 거처하는 상도(常道)이다. 서로 감동하는 정(情)을 논하면 소(少)가 친절함이 되고, 존비(尊卑)의 차례를 논하면 장(長)이 마땅히 삼가고 바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태(兌)와 간(艮)은 함(咸)이 되고 진(震)과 손(巽)은 항(恒)이 된 것이다. 남자가 여자 위에 있어서 남자는 밖에 동(動)하고 여자는 안에 순(順)함은 인도(人道)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항(恒)이라 한 것이다. 또 강(剛)이 위에 있고 유(柔)가 아래에 있고,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며, 공손하고 동하고 강(剛)과 유(柔)가 서로 응함이 모두 항(恒)의 뜻이다.
恒은 亨하여 无咎하니 利貞하니 利有攸往하니라.
항(恒)은 형통(亨通)하여 허물이 없으니, 정(貞)함이 이로우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本義】 无咎하나,
【본의】 허물이 없으나,
【傳】 恒者는 常久也니 恒之道는 可以亨通이라 恒而能亨이면 乃无咎也요 恒而不可以亨이면 非可恒之道也니 爲有咎矣라 如君子之恒於善은 可恒之道也요 小人恒於惡은 失可恒之道也라 恒所以能亨은 由貞正也라 故云利貞이라 夫所謂恒은 謂可恒久之道요 非守一隅而不知變也라 故利於有往이니 唯其有往이라 故能恒也니 一定則不能常矣라 又常久之道 何往不利리오.
항(恒)은 항상하고 오래함이니, 항(恒)의 도(道)는 형통할 수 있다. 항상하여 형통하면 바로 허물이 없으며, 항상하되 형통할 수가 없으면 항상할 수 있는 도(道)가 아니니 허물이 있음이 된다. 군자(君子)가 선(善)에 항상함은 항상할 수 있는 도(道)이고, 소인(小人)이 악(惡)에 항상함은 항상할 수 있는 도(道)를 잃은 것과 같다. 항(恒)이 형통할 수 있는 까닭은 정정(貞正)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정(利貞)’이라 한 것이다. 이른바 항(恒)은 항구(恒久)할 수 있는 도(道)를 이른 것이요, 한 귀퉁이만 지켜서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오직 감이 있기 때문에 항상할 수 있는 것이니, 일정하면 항상하지 못한다. 또 상구(常久)의 도(道)가 어디를 간들 이롭지 않겠는가.
【本義】 恒은 常久也라 爲卦震剛在上하고 巽柔在下하며 震雷巽風이 二物相與하고 巽順震動이 爲巽而動이며 二體六爻가 陰陽相應하니 四者는 皆理之常이라 故爲恒이라 其占이 爲能久於其道則亨而无咎라 然又必利於守貞이니 則乃爲得所常久之道而利有所往也라.
항(恒)은 상구(常久)함이다. 괘(卦)됨이 진강(震剛)은 위에 있고 손유(巽柔)는 아래에 있으며, 진뢰(震雷)와 손풍(巽風)은 두 사물이 서로 더불고, 손순(巽順)과 진동(震動)은 공손하고 동함이 되며, 두 체(體)의 여섯 효(爻)가 음(陰)과 양(陽)이 서로 응(應)하니, 네 가지는 모두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항(恒)이라 한 것이다. 그 점(占)이 도(道)에 상구(常久)하면 형통하여 허물이 없음이 된다. 그러나 또 반드시 정도(正道)를 지킴이 이로우니, 이렇게 하면 상구(常久)한 바의 도(道)를 얻어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彖曰 恒은 久也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항(恒)은 오래함이니,
【傳】 恒者는 長久之義也라.
항(恒)은 장구(長久)한 뜻이다.
剛上而柔下하고 雷風이 相與하고 巽而動하고 剛柔皆應이 恒이니,
강(剛)이 위에 있고 유(柔)가 아래에 있으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며, 공손하고 동하며, 강(剛)과 유(柔)가 모두 응함이 항(恒)이니,
【傳】 卦才有此四者하니 成恒之義也라 剛上而柔下는 謂乾之初上居於四하고 坤之初[一作四]下居於初하여 剛爻上而柔爻下也라 二爻易處則成震巽하니 震上巽下는 亦剛上而柔下也니 剛處上而柔居下는 乃恒道也라 雷風相與는 雷震則風發하니 二者相須하여 交助其勢라 故云相與하니 乃其常也라 巽而動은 下巽順하고 上震動하니 爲以巽而動이라 天地造化恒久不已者는 順動而已니 巽而動은 常久之道也라 動而不順이면 豈能常也리오 剛柔皆應은[一有恒字] 一卦剛柔之爻 皆相應하니 剛柔相應은 理之常也라 此四者는 恒之道也니 卦所以爲恒也라.
괘재(卦才)에 이 네 가지가 있으니, 항(恒)을 이룬 뜻이다. ‘강(剛)이 위에 있고 유(柔)가 아래에 있다’는 것은 건(乾)의 초효(初爻)가 올라가 사(四)에 거하고 곤(坤)의 초효(初爻)가 아래로 내려와 초(初)에 거하여 강효(剛爻)가 올라가고 유효(柔爻)가 내려옴을 이른다. 두 효(爻)가 바꾸어 처하면 진(震)·손(巽)을 이루니, 진(震)이 위에 있고 손(巽)이 아래에 있음은 또한 강(剛)이 위에 있고 유(柔)가 아래에 있는 것이니, 강(剛)이 위에 처하고 유(柔)가 아래에 거함은 바로 항상하는 도(道)이다.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분다’는 것은 우레가 진동하면 바람이 발하니, 두 가지가 서로 기다려 서로 그 세(勢)를 돕기 때문에 서로 더분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그 떳떳함이다. ‘공손하고 동한다’는 것은 아래는 손순(巽順)하고 위는 진동(震動)하니, 공손함으로써 진동함이 된다. 천지(天地)의 조화가 항구(恒久)하고 그치지 않음은 순하게 동해서일 뿐이니, 공손히 동함은 상구(常久)의 도(道)이다. 동하되 순하지 않으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강(剛)과 유(柔)가 모두 응한다’는 것은 하나의 괘(卦)의 강(剛)·유(柔)의 효(爻)가 모두 서로 응하니, 강(剛)과 유(柔)가 서로 응함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이 네 가지는 항(恒)의 도(道)이니, 괘(卦)가 이 때문에 항(恒)이 된 것이다.
【本義】 以卦體卦象卦德으로 釋卦名義라 或以卦變으로 言剛上柔下之義曰 恒自豊來하여 剛上居二하고 柔下居初也라 하니 亦通이라.
괘체(卦體)와 괘상(卦象)과 괘덕(卦德)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혹자는 괘변(卦變)으로써 ‘강상유하(剛上柔下)’의 뜻을 말하기를 “항(恒)이 풍괘(豊卦)[ ]로부터 와서 강(剛)이 올라가 이(二)에 거하고 유(柔)가 내려와 초(初)에 거했다.” 하니, 역시 통한다.
恒亨无咎利貞은 久於其道也니,
‘항형무구이정(恒亨无咎利貞)’은 그 도(道)를 오래하는 것이니,
【傳】 恒之道可致亨而无過咎로되 但所恒이 宜得其正이니 失正則非可恒之道也라 故曰久於其道라 하니 其道는 可恒之正道也라 不恒其德과 與恒於不正은 皆不能亨而有咎也라.
항(恒)의 도(道)는 형통함을 이루고 허물이 없을 수 있으나 다만 항상하는 바가 그 바름을 얻어야 하니, 바름을 잃으면 항상할 수 있는 도(道)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도(道)를 오래한다’ 하였으니, 그 도(道)는 항상할 수 있는 정도(正道)이다. 덕(德)을 항상하지 않음과 부정(不正)함에 항상함은 모두 형통하지 못하여 허물이 있는 것이다.
天地之道는 恒久而不已也니라.
천지(天地)의 도(道)는 항구(恒久)하여 그치지 않는다.
【傳】 天地之所以不已는 蓋有恒久之道하니 人能恒於可恒之道면 則合天地之理也라.
천지(天地)가 그치지 않는 까닭은 항구(恒久)의 도(道)가 있어서이니, 사람이 항상할 수 있는 도(道)에 항상하면 천지(天地)의 이치에 합한 것이다.
【本義】 恒은 固能亨이요 且无咎矣라 然必利於正이라야 乃爲久於其道니 不正則久非其道矣라 天地之道所以長久는 亦以正而已矣니라.
항(恒)은 진실로 형통할 수 있고 또 허물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바름에 이로워야 비로소 도(道)를 오래할 수 있으니, 바르지 않으면 도(道)가 아닌 것에 오래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도(道)가 장구(長久)한 까닭도 정도(正道)로써 해서일 뿐이다.
利有攸往은 終則有始也일새니라.
‘이유유왕(利有攸往)’은 마치면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傳】 天下[一作地]之理 未有不動而能恒者也라 動則終而復始하니 所以恒而不窮이라 凡天地所生之物은 雖山嶽之堅厚라도 未有能不變者也라 故恒은 非一定之謂也니 一定則不能恒矣라 唯隨時變易이 乃常道也라 故云利有攸往이라 하니 明理之如是하니 懼人之泥於常也라.
천하(天下)의 이치가 동(動)하지 않고서 항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동하면 종(終)이 되어 다시 시작(始作)되니, 이 때문에 항상하고 다하지 않는 것이다. 무릇 천지(天地)가 내는 물건은 비록 산악(山嶽)의 견고하고 후한 것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항(恒)은 일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일정하면 항상하지 못한다. 오직 때에 따라 변역(變易)함이 바로 항상하는 도(道)이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치가 이와 같음을 밝힌 것이니, 사람들이 항상함에 빠질까 두려워해서이다.
【本義】 久於其道는 終也요 利有攸往은 始也라 動靜相生은 循環之理나 然必靜爲主也라.
그 도(道)를 오래함은 종(終)이요,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움은 시(始)이다. 동(動)과 정(靜)이 상생(相生)함은 순환의 이치이나 반드시 정(靜)이 주장이 된다.
日月이 得天而能久照하며 四時變化而能久成하며 聖人이 久於其道而天下化成하나니 觀其所恒而天地萬物之情을 可見矣리라.
해와 달이 천리(天理)에 순하여 오랫동안 비추며, 사시(四時)가 변화하여 오랫동안 이루며, 성인(聖人)이 도(道)를 오래하여 천하(天下)가 교화되어 이루어지니, 항상하는 바를 보면 천지(天地) 만물(萬物)의 정(情)을 알 수 있으리라.”
【傳】 此는 極言常理라 日月은 陰陽之精[一有二字]氣耳니 唯其順天之道하여 往來盈縮이라 故能久照而不已니 得天은 順天理也라 四時는 陰陽之氣耳니 往來變化하여 生成萬物은 亦以得天이라 故常久不已라 聖人은 以常久之道로 行之有常而天下化之하여 以成美俗也라 觀其所恒은 謂觀日月之久照와 四時之久成과 聖人之道의 所以能常久之理니 觀此則天地萬物之情理를 可見矣라 天地常久之道와 天下常久之理를 非知道者면 孰能識之리오.
이는 항상하는 이치를 극언한 것이다. 해와 달은 음(陰)·양(陽)의 정기(精氣)이니, 하늘의 도(道)를 따라 가고 오고 차고 이지러진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비추어 그치지 않는 것이니, ‘득천(得天)’은 천리(天理)에 순한 것이다. 사시(四時)는 음양(陰陽)의 기운이니, 왕래하고 변화하여 만물을 생성함은 또한 천리(天理)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하고 오래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상구(常久)의 도(道)로 행함에 항상함이 있어서 천하(天下)가 교화되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다. 항상하는 바를 본다는 것은 일월(日月)이 오래 비춤과 사시(四時)가 오래 이룸과, 성인(聖人)의 도(道)가 상구(常久)하는 이치를 봄을 이르니, 이것을 보면 천지(天地) 만물(萬物)의 정(情)과 이치(理致)를 알 수 있다. 천지(天地)의 상구(常久)하는 도(道)와 천하(天下)의 상구(常久)하는 이치(理致)는 도(道)를 아는 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本義】 極言恒久之道라.
항구(恒久)의 도(道)를 극언하였다.
象曰 雷風이 恒이니 君子以하여 立不易方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우레와 바람이 항(恒)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서서 방소(方所)를 바꾸지 않는다.”
【傳】 君子觀雷風相與成恒之象하여 以常久其德하여 自立於大中常久之道하여 不變易其方所也라.
군자(君子)가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어 항(恒)을 이루는 상(象)을 관찰하여 그 덕(德)을 항상하고 오래해서 대중(大中) 상구(常久)의 도(道)에 스스로 서서 그 방소(方所)를 변역(變易)하지 않는다.
初六은 浚恒이라 貞하여 凶하니 无攸利하니라.
초육(初六)은 깊은 항(恒)이다. 정고(貞固)하여 흉(凶)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本義】 貞이라도 凶하여,
【본의】 바르더라도 흉(凶)하여,
【傳】 初居下而四爲正應하니 柔暗之人이 能守常而不能度(탁)勢하며 四는 震體而陽性이라 以剛居高하여 志上而不下하며 又爲二三所隔하여 應初之志 異乎常矣어늘 而初乃求望之深하니 是知常而不知變也라 浚은 深之也니 浚恒은 謂求恒之深也라 守常而不度勢하고 求望於上之深하여 堅固守此면 凶之道也니 泥常如此면 无所往而利矣라 世之責望故素而致悔咎[一作吝]者는 皆浚恒者也라 志旣上求之深이면 是不能恒安其處者也요 柔微而不恒安其處는 亦致凶之道라 凡卦之初終은 淺與深, 微與盛之地也니 在下而求深은 亦不知時矣라.
초(初)는 아래에 거하고 사(四)와 정응(正應)이 되었으니 유암(柔暗)한 사람이 상도(常道)를 지키기만 하고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며, 사(四)는 진(震)의 체(體)로 양성(陽性)이니 강(剛)함으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뜻이 올라가고 내려오지 못하며, 또 이효(二爻)와 삼효(三爻)에게 막혀서 초(初)와 응하는 뜻이 정상(正常)과 다른데, 초(初)가 마침내 구하고 바라기를 깊게 하니, 이는 떳떳함만 알고 변통(變通)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준(浚)은 깊게 하는 것이니, ‘준항(浚恒)’은 항상함을 구하기를 깊이 하는 것이다. 떳떳함을 지키기만 하고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며, 윗사람에게 구하고 바라기를 깊이 하여 견고히 이를 지키면 흉한 도(道)이니, 떳떳함에 빠짐이 이와 같으면 가는 곳마다 이로움이 없는 것이다. 세상의 평소 아는 사람을 책망하여 뉘우침과 허물을 이루는 이는 모두 준항(浚恒)인 이이다. 뜻이 이미 위에 구하기를 깊이 하면 이는 거처를 항상하고 편안히 하지 못하는 것이며, 유약하면서 거처를 항상하고 편안히 하지 못함은 역시 흉함을 이루는 도(道)이다. 무릇 괘(卦)의 처음과 끝은 얕음과 깊음, 미약함과 성함의 자리이니, 아래에 있으면서 구하기를 깊이 함도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本義】 初與四爲正應하니 理之常也라 然初居下而在初하여 未可以深有所求요 四震體而陽性이라 上而不下하며 又爲二三所隔하여 應初之意 異乎常矣어늘 初之柔暗이 不能度勢하고 又以陰居巽下하여 爲巽之主하여 其性務入이라 故深以常理求之하니 浚恒之象也라 占者如此면 則雖貞이라도 亦凶而无所利矣리라.
초(初)는 사(四)와 정응(正應)이 되니,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나 초(初)는 아래에 위치하고 초(初)에 있어 깊이 구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되며, 사(四)는 진(震)의 체(體)로 양성(陽性)이니 올라가고 내려오지 못하며, 또 이효(二爻)와 삼효(三爻)에게 막힘을 당하여 초(初)와 응하는 뜻이 정상(正常)과 다르다. 그런데 초(初)의 유암(柔暗)함이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또 음(陰)으로 손(巽)의 아래에 거하여 손(巽)의 주체가 되어서 그 성질이 들어가기를 힘쓰기 때문에 깊이 떳떳한 이치로써 구하니, 준항(浚恒)의 상(象)이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으면 비록 바르더라도 흉(凶)하여 이로운 바가 없을 것이다.
象曰 浚恒之凶은 始에 求深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준항(浚恒)의 흉함은 처음에 있으면서 구하기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傳】 居恒之始[一作常]而求望於上之深은 是知常而不知[一无知字]度(탁)勢之甚也라 所以凶이니 陰暗하여 不得恒之宜也라.
항(恒)의 처음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구하고 바라기를 깊이 하니, 이는 떳떳함만 알고 형세를 헤아릴 줄 모름이 심한 것이다. 이 때문에 흉(凶)하니, 음암(陰暗)하여 항상함의 마땅함을 얻지 못한 것이다.
九二는 悔亡하리라.
구이(九二)는 뉘우침이 없어지리라.
【傳】 在恒之義에 居得其正則常道也라 九는 陽爻居陰位하니 非常理也니 處非其常이면 本當有悔로되 而九二以中德而應於五하고 五復居中하여 以中而應中하니 其處與動이 皆得中也니 是能恒久於中也라 能恒久[一无久字]於中이면 則不失正矣라 中은 重於正하니 中則正矣어니와 正은 不必中也라 九二以剛中之德而應於中하니 德之勝也니 足以亡其悔矣라 人能識重輕之勢하면 則可以言易矣리라.
항(恒)의 뜻에 있어 거함이 그 바름을 얻으면 상도(常道)이다. 구(九)는 양효(陽爻)가 음위(陰位)에 거하였으니 떳떳한 이치가 아니니, 처함이 떳떳한 자리가 아니면 본래는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구이(九二)가 중덕(中德)으로 오(五)와 응(應)하고 오(五)가 다시 중(中)에 거하여 중(中)으로 중(中)에 응하니, 그 거처함과 동함이 모두 중(中)을 얻었으니, 이는 중(中)에 항구(恒久)한 것이다. 중(中)에 항구(恒久)하면 바름을 잃지 않는다. 중(中)은 정(正)보다 중(重)하니, 중(中)하면 정(正)이 될 수 있지만 정(正)은 반드시 중(中)하지는 못하다. 구이(九二)는 강중(剛中)의 덕(德)으로 중(中)에 응하니, 덕(德)이 우세한 바 충분히 그 뉘우침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경중(輕重)의 형세를 알면 역(易)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本義】 以陽居陰은 本當有悔로되 以其久中이라 故得亡也라.
양(陽)이 음위(陰位)에 거함은 본래는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중(中)에 오래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象曰 九二悔亡은 能久中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이(九二)가 뉘우침이 없어짐은 중(中)에 오래하기 때문이다.”
【傳】 所以得悔亡者는 由其能恒久於中也니 人能恒久於中이면 豈止亡其悔리오 德之善也라.
뉘우침이 없어질 수 있는 까닭은 중(中)에 항구(恒久)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중(中)에 항구(恒久)하면 어찌 다만 뉘우침이 없어질 뿐이겠는가. 덕(德)의 좋음이다.”
九三은 不恒其德이라 或承之羞니 貞이면 吝하리라.
구삼(九三)은 그 덕(德)을 항상하지 않으니, 부끄러움이 혹 이를 것이니, 정고(貞固)하면 부끄러우리라.
【本義】 或承之羞니 貞이라도 吝이리라.
【본의】 혹자가 부끄러움을 받듦이니, 바르더라도 부끄러우리라.
【傳】 三은 陽爻居陽位하여 處得其位하니 是其常處也어늘 乃志從於上六하니 不唯陰陽相應이라 風復從雷하여 於恒處而不處하니 不恒之人也라 其德不恒이면 則羞辱或承之矣니 或承之는 謂有時而至也라 貞吝은 固守不恒以爲恒이면 豈不可羞吝乎아.
삼(三)은 양효(陽爻)가 양위(陽位)에 거하여 처함이 그 자리를 얻었으니 이는 떳떳한 거처인데 마침내 뜻이 상육(上六)을 따르니, 다만 음(陰)·양(陽)이 서로 응할 뿐만 아니라 바람이 다시 우레를 따라 항구하게 처할 곳에 처하지 않으니, 항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덕(德)이 항상하지 못하면 수욕(羞辱)이 혹 이를 것이니, ‘혹승지(或承之)’는 때로 이름이 있음을 이른다. ‘정린(貞吝)’은 항상하지 않을 것을 굳게 지켜 항상함으로 삼는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本義】 位雖得正이나 然過剛不中하고 志從於上하여 不能久於其所라 故爲不恒其德或承之羞之象이라 或者는 不知其何人之辭요 承은 奉也니 言人皆得奉而進之하여 不知其所自來也라 貞吝者는 正而不恒은 爲可羞吝이니 申戒占者之辭라.
자리가 비록 정위(正位)를 얻었으나 지나치게 강(剛)하고 중(中)하지 못하며 뜻이 상(上)을 따라 그 자리에 오래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 덕(德)을 항상하지 못하여 혹자가 부끄러움을 받드는 상(象)이 되는 것이다. 혹(或)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말이요, 승(承)은 받듦이니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올려서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린(貞吝)’은 바르되 항상하지 못함은 부끄러울 만함이 되는 것이니, 점치는 이를 거듭 경계한 말이다.
象曰 不恒其德하니 无所容也로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그 덕(德)을 항상하지 못하니, 용납할 곳이 없다.”
【傳】 人旣无恒이면 何所容處리오 當處之地를 旣不能恒하여 處非其據면 豈能恒哉아 是不恒之人이 无所容處其身也라.
사람이 이미 항상함이 없으면 어느 곳에 용납하여 처하겠는가. 마땅히 처해야 할 곳에 이미 항상하지 못하여 처함이 그 머무를 곳이 아니라면 어찌 항상하겠는가. 이는 항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몸을 용납하여 처할 곳이 없는 것이다.
九四는 田无禽이니라.
구사(九四)는 사냥하나 짐승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傳】 以陽居陰하여 處非其位하니 處非其所면 雖常何益이리오 人之所爲 得其道則久而成功이어니와 不得其道則雖久何益이리오 故以田爲喩라 言九之居四는 雖使恒久라도 如田獵而无禽獸之獲이니 謂徒用力而无功也라.
양(陽)이 음위(陰位)에 거하여 처함이 제자리가 아니니, 처함이 제자리가 아니라면 비록 항상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사람이 하는 바가 그 도(道)에 맞으면 오래하여 성공할 수 있으나, 그 도(道)에 맞지 않으면 비록 오래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냥으로 비유를 삼은 것이다. 구(九)가 사(四)에 거함은 비록 항구(恒久)하더라도 전렵(田獵)을 하나 금수(禽獸)를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으니, 한갓 힘만 쓰고 공(功)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本義】 以陽居陰하여 久非其位라 故爲此象이라 占者田无所獲이요 而凡事亦不得其所求也라.
양(陽)이 음위(陰位)에 거하여 제자리가 아닌 곳에 오래하기 때문에 이 상(象)이 된 것이다. 점치는 이가 사냥하면 짐승을 잡지 못할 것이요, 모든 일 또한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象曰 久非其位어니 安得禽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 오래하니, 어찌 짐승을 잡겠는가.”
【傳】 處非其位하니 雖久나 何所得乎아 以田爲喩라 故云安得禽也리오 하니라.
제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니, 비록 오래 머문들 무엇을 얻겠는가. 사냥으로 비유하였기 때문에 ‘어찌 짐승을 잡겠는가’ 라고 한 것이다.
六五는 恒其德이면 貞하니 婦人은 吉하고 夫子는 凶하니라.
육오(六五)는 〈유순(柔順)의〉 덕(德)을 항구히 하면 정(貞)하니, 부인(婦人)은 길(吉)하고 부자(夫子)[남자]는 흉(凶)하다.
【本義】 恒其德이니 貞하나,
【본의】 덕(德)을 항상함이니, 정(貞)하나
【傳】 五應於二하니 以陰柔而應陽剛하고 居中而所應又中하니 陰柔之正也라 故恒久其德則爲貞也[一則字在其字上]라 夫以順從爲恒者는 婦人之道니 在婦人則爲貞이라 故吉이어니와 若丈夫而以順從於人爲恒이면 則失其剛陽之正이니 乃凶也라 五君位而不以君道言者는 如六五之義는 在丈夫猶凶이어든 況[一作豈]人君之道乎아 在他卦엔 六居君位而應剛이 未爲失也로되 在恒故로 不可耳라 君道豈可以柔順爲恒也리오.
오(五)는 이(二)와 응하니, 음유(陰柔)로서 양강(陽剛)에 응하며 중(中)에 거하고 응하는 바가 또 중(中)이니, 음유(陰柔)의 바름이다. 그러므로 그 덕(德)을 항구(恒久)히 하면 정(貞)이 되는 것이다. 순종(順從)을 항상함으로 삼는 것은 부인(婦人)의 도리이니, 부인(婦人)에 있어서는 정(貞)이 되기 때문에 길(吉)하나, 만일 장부(丈夫)로서 남에게 순종함을 항상함으로 삼으면 강양(剛陽)의 바름을 잃으니, 흉(凶)한 것이다. 오(五)는 군주(君主)의 자리인데 군주(君主)의 도리로써 말하지 않은 것은 육오(六五)와 같은 의(義)는 장부(丈夫)에 있어서도 오히려 흉(凶)한데 하물며 군주(君主)의 도리에 있어서이겠는가. 다른 괘(卦)에 있어서는 육(六)이 군위(君位)에 거하여 강(剛)에 응함이 잘못이 되지 않으나, 항(恒)에 있기 때문에 불가한 것이다. 군주(君主)의 도(道)가 어찌 유순함을 항상함으로 삼겠는가.
【本義】 以柔中而應剛中하여 常久不易하니 正而固矣라 然乃婦人之道요 非夫子之宜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유중(柔中)으로 강중(剛中)에 응하여 상구(常久)하고 변치 않으니, 바르고 견고하다. 그러나 이는 바로 부인(婦人)의 도(道)요, 부자(夫子)의 마땅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婦人은 貞吉하니 從一而終也일새요 夫子는 制義어늘 從婦하면 凶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부인(婦人)은 정(貞)하여 길(吉)하니 하나를 따라 마치기 때문이요, 부자(夫子)는 의(義)로 제재하는데 부인(婦人)의 도(道)를 따르면 흉(凶)하다.”
【傳】 如五之從二는 在婦人則爲正而吉이라 婦人은 以從爲正하고 以順爲德하니 當終守於從一이어니와 夫子則以義制者也어늘 從婦人之道면 則爲凶也라.
오(五)가 이(二)를 따름과 같음은 부인(婦人)에게 있어서는 정(正)하여 길(吉)함이 된다. 부인(婦人)은 따름을 정(正)으로 삼고 순함을 덕(德)으로 삼으니, 마땅히 끝내 하나만 따름을 지켜야 하나 부자(夫子)는 의(義)로써 제재하는 이인데, 부인(婦人)의 도(道)를 따르면 흉(凶)함이 되는 것이다.
上六은 振恒이니 凶하니라.
상육(上六)은 진동(振動)하는 항(恒)이니, 흉(凶)하다.
【傳】 六은 居恒之極하고 在震之終하니 恒極則不常이요 震終則動極이라 以陰居上하여 非其安處요 又陰柔不能堅固其守하니 皆不常之義也라 故爲振恒이니 以振爲恒也라 振者는 動之速也니 如振衣, 如振書하니 抖擻運動之意라 在上而其動无節하여 以此爲恒이면 其凶宜矣라.
육(六)은 항(恒)의 극(極)에 거하고 진(震)의 종(終)에 있으니, 항(恒)이 극(極)에 이르면 항상하지 못하고, 진(震)의 종극(終極)에 있으면 동함이 지극하다. 음(陰)으로서 상(上)에 거하여 편안한 곳이 아니요, 또 음유(陰柔)는 그 지킴을 견고히 하지 못하니, 모두 항상하지 못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항(振恒)’이라 하였으니, 진동함을 항상함으로 삼는 것이다. 진(振)은 동하기를 속히 하는 것이니, ‘옷의 먼지를 털어냄’과 ‘책의 먼지를 털어냄’과 같으니, 흔들고 운동(運動)하는 뜻이다. 상(上)에 있으면서 그 동함이 절도가 없어 이것을 항상함으로 삼는다면 그 흉함이 마땅하다.
【本義】 振者는 動之速也라 上六이 居恒之極하고 處震之終하니 恒極則不常이요 震終則過動이며 又陰柔不能固守하니 居上은 非其所安이라 故有振恒之象이요 而其占則凶也라.
진(振)은 동하기를 속히 함이다. 상육(上六)이 항(恒)의 극(極)에 거하고 진(震)의 종(終)에 처했으니, 항(恒)이 지극하면 떳떳하지 못하고 진(震)이 종(終)에 이르면 지나치게 동하며, 또 음유(陰柔)라서 굳게 지키지 못하니, 상(上)에 거함은 편한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항(振恒)의 상(象)이 있고 그 점(占)이 흉(凶)한 것이다.
象曰 振恒在上하니 大无功也로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진항(振恒)으로 위에 있으니, 크게 공(功)이 없다.”
【傳】 居上之道는 必有恒德이라야 乃能有功이어늘 若躁動不常이면 豈能有所成乎아 居上而不恒이면 其凶甚矣라 象又言其不能有所成立이라 故曰大无功也라 하니라.
상(上)에 거하는 도(道)는 반드시 떳떳한 덕(德)이 있어야 공(功)이 있을 수 있는데, 만일 조급히 동(動)하여 떳떳하지 못하다면 어찌 이루는 바가 있겠는가. 상(上)에 거하여 항상하지 못하면 그 흉(凶)함이 심하다. 〈상전(象傳)〉에는 또 성립하는 바가 있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공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32. 항(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