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규(睽)
【傳】 睽는 序卦에 家道窮必乖라 故受之以睽하니 睽者는 乖也라 하니라 家道窮則睽乖離散은 理必然也라 故家人之後에 受之以睽也라 爲卦 上離下兌하니 離火炎上하고 兌澤潤下하여 二體相違는 睽之義也라 又中少二女 雖同居而所歸各異하니 是其志不同行也니 亦爲睽義라.
규괘(睽卦)는 〈서괘전(序卦傳)〉에 “가도(家道)는 궁(窮)하면 반드시 어그러지므로 규괘(睽卦)로 받았으니, 규(睽)는 어그러짐이다.” 하였다. 가도(家道)가 궁하면 어그러지고 이산(離散)됨은 필연적(必然的)인 이치이다. 그러므로 가인괘(家人卦)의 뒤에 규괘( 卦)로써 받은 것이다. 괘(卦)됨이 위는 이(離)이고 아래는 태(兌)이니, 이(離)의 불은 불타고 올라가고 태(兌)의 못은 적시고 내려가서 두 체(體)가 서로 어김이 규(睽)의 뜻이다. 또 중녀(中女)와 소녀(少女) 두 여자(女子)가 비록 함께 사나 시집가는 바가 각기 다르니, 이는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음이니, 역시 규(睽)의 뜻이 된다.
睽는 小事는 吉하리라.
규(睽)는 작은 일은 길(吉)하리라.
【傳】 睽者는 睽乖離散之時니 非吉道也로되 以卦才之善이라 雖處睽時나 而小事吉也라.
규(睽)는 어긋나고 이산(離散)하는 때이니, 길(吉)한 방도가 아니나 괘재(卦才)가 선(善)하기 때문에 규(睽)의 때에 처하여도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本義】 睽는 乖異也라 爲卦上火下澤하여 性相違異하며 中女少女 志不同歸라 故爲睽라 然以卦德言之하면 內說而外明이요 以卦變言之하면 則自離來者는 柔進居三하고 自中孚來者는 柔進居五하고 自家人來者는 兼之하며 以卦體言之하면 則六五得中而下應九二之剛이라 是以로 其占이 不可大事나 而小事尙有吉之道也라.
규(睽)는 어긋나고 다름이다. 괘(卦)됨이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어서 성질이 서로 어긋나고 다르며 중녀(中女)와 소녀(少女)가 뜻이 한 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규(睽)가 된 것이다. 그러나 괘덕(卦德)으로 말하면 안은 기뻐하고 밖은 밝으며, 괘변(卦變)으로 말하면 이괘(離卦)[ ]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나아가 삼(三)에 거하고, 중부괘(中孚卦)[ ]로부터 온 것은 유(柔)가 나아가 오(五)에 거하고, 가인괘(家人卦)[ ]로부터 온 것은 이를 겸하였으며, 괘체(卦體)로 말하면 육오(六五)가 중(中)을 얻고 아래로 구이(九二)의 강(剛)에 응(應)한다. 이 때문에 그 점(占)이 큰 일은 할 수 없으나 작은 일은 오히려 길(吉)할 방도가 있는 것이다.
彖曰 睽는 火動而上하고 澤動而下하며 二女同居하나 其志不同行하니라.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규(睽)는 불은 움직여 올라가고 못은 움직여 내려가며, 두 여자(女子)가 함께 사나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는다.
【傳】 彖은 先釋睽[一无睽字]義[一作意]하고 次言卦才하고 終言合睽之道而贊其時用之大라 火之性은 動而上하고 澤之性은 動而下하여 二物之性違異라 故爲睽義요 中少二女 雖同居하나 其志不同行하니 亦爲睽義라 女之少也엔 同處라가 長則各適其歸하니 其志異也라 言睽者는 本同也니 本不同則非睽也라.
〈단전(彖傳)〉에서 먼저는 규(睽)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는 괘재(卦才)를 말하고 끝에는 규(睽)를 합하는 도(道)를 말하고 때와 용(用)의 큼을 칭찬하였다. 불의 성질은 움직여 올라가고 못의 성질은 움직여 내려가서, 두 사물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기 때문에 규(睽)의 뜻이 되었으며, 중녀(中女)와 소녀(少女) 두 여자(女子)가 비록 함께 사나 그 뜻이 한 가지로 가지 않으니, 역시 규(睽)의 뜻이 된다. 여자(女子)가 어렸을 때에는 함께 살다가 장성(長成)하면 각기 시집갈 곳으로 가니, 그 뜻이 다른 것이다. 규(睽)라고 말한 것은 본래 같았던 것이니, 본래 같지 않았다면 규(睽)가 아니다.
【本義】 以卦象으로 釋卦名義라.
괘상(卦象)으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說而麗乎明하고 柔進而上行하여 得中而應乎剛이라 是以小事吉이니라.
기뻐하고 밝음에 붙으며 유(柔)가 나아가 위로 가서 중(中)을 얻어 강(剛)에 응(應)한다. 이 때문에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傳】 卦才如此하니 所以小事吉也라 兌는 說也요 離는 麗也며 又爲明이라 故爲說順而附麗於明이라 凡離在上에 而彖欲見柔居尊者면 則曰柔進而上行이라 하니 晉鼎이 是也라 方睽乖之時하여 六五以柔居尊位하여 有說順麗明之善하고 又得中道而應剛하니 雖不能合天下之睽하여 成天下之大事나 亦可以小濟니 是於小事吉也라 五以明而應剛이어늘 不能致大吉은 何也오 曰 五는 陰柔니 雖應二나 而睽之時에 相與之道未能深固라 故二必遇主于巷하고 五噬膚則无咎也라 天下睽散之時에 必君臣剛陽中正하고 至誠協力而後能合也라.
괘재(卦才)가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작은 일은 길(吉)한 것이다. 태(兌)는 기뻐함이요 이(離)는 붙음이며 또 밝음이 된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순종하며 밝음에 붙음이 되는 것이다. 무릇 이(離)가 위에 있을 적에 〈단전(彖傳)〉에서 유(柔)가 존위(尊位)에 거함을 나타내고자 하면 유(柔)가 나아가 위로 갔다고 말하니, 진괘(晉卦)와 정괘(鼎卦)가 이것이다. 규괴(睽乖)의 때를 당하여 육오(六五)가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여 기뻐하고 순종하고 밝음에 붙는 선(善)이 있고, 또 중도(中道)를 얻어 강(剛)에 응(應)하니, 비록 천하(天下)의 어긋남을 합하여 천하(天下)의 대사(大事)를 이루지는 못하나 역시 작은 것은 이룰 수 있으니, 이는 작은 일에는 길(吉)한 것이다. 오(五)가 밝음으로 강(剛)에 응(應)하는데 대길(大吉)을 이루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오(五)는 음유(陰柔)이니, 비록 이(二)에 응(應)하나 규(睽)의 때에 서로 함께 하는 도(道)가 깊고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효(二爻)는 반드시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나고 오효(五爻)는 살을 깨물듯이 하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 천하(天下)가 규산(睽散)하는 때에는 반드시 군신(君臣)이 강양(剛陽) 중정(中正)하고 지성(至誠)으로 협력한 뒤에야 합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以卦德卦變卦體로 釋卦辭라.
괘덕(卦德)과 괘변(卦變)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天地睽而其事同也며 男女睽而其志通也며 萬物睽而其事類也니 睽之時用이 大矣哉라.
천지(天地)가 다르나 그 일이 같으며, 남녀(男女)가 다르나 그 뜻이 통하며, 만물이 다르나 그 일이 같으니, 규(睽)의 때와 용(用)이 크다.”
【傳】 推物理之同하여 以明睽之時用하니 乃聖人合睽之道也라 見同之爲同者는 世俗之知也요 聖人則明物理之本同하니 所以能同天下而和合萬類也라 以天地男女萬物로 明之하니 天高地下는 其體睽也라 然陽降陰升하여 相合而成化育之事則同也요 男女異質은 睽也나 而相求之志則通也요 生物萬殊는 睽也나 然而得天地之和하고 禀陰陽之氣則相類也라 物雖異而理本同故로 天下之大와 群生之衆이 睽散萬殊나 而聖人爲能同之라 處睽之時하여 合睽之用하니 其事至大라 故云大矣哉라 하니라.
사물의 이치가 같음을 미루어서 규(睽)의 때와 용(用)을 밝혔으니, 이는 바로 성인(聖人)이 규(睽)를 합하는 도(道)이다. 같음이 같음이 됨을 보는 것은 세속의 지혜이고, 성인(聖人)은 물리(物理)가 본래 같음을 밝게 아니, 이 때문에 천하(天下)를 함께 하여 만 가지 종류를 화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와 남녀(男女)와 만물(萬物)로써 밝혔으니,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음은 그 체(體)가 규(睽)이나 양(陽)이 내려오고 음(陰)이 올라가서 서로 합하여 화육(化育)의 일을 이룸은 같고, 남녀(男女)가 성질(性質)이 다름은 규(睽)이나 서로 구하는 뜻은 통하며, 생물(生物)이 만 가지로 다름은 규(睽)이나 천지(天地)의 화(和)를 얻고 음양(陰陽)의 기(氣)를 받은 것은 서로 같다. 사물이 비록 다르나 이치는 본래 같기 때문에 천하(天下)의 큼과 군생(群生)의 많음이 규산(睽散)하여 만 가지로 다르나 성인(聖人)이 같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규(睽)의 때에 처하여 규(睽)의 용(用)에 합하니, 그 일이 지극히 크다. 그러므로 ‘대의재(大矣哉)’라고 말한 것이다.
【本義】 極言其理而贊之라.
그 이치(理致)를 극언(極言)하고 칭찬한 것이다.
象曰 上火下澤이 睽니 君子以하여 同而異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睽)이니, 군자가 이로써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傳】 上火下澤하여 二物之性違異하니 所以爲睽離之象이라 君子觀睽異之象하여 於大同之中而知所當異也라 夫聖賢之處世에 在人理之常하여는 莫不大同이요 於世俗所同者엔 則有時而獨異하니 蓋於秉彛則同矣요 於世俗之失則異也라 不能大同者는 亂常拂理之人也요 不能獨異者는 隨俗習非之人也니 要在同而能異耳라 中庸曰和而不流是也라.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어서 두 물건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니, 이 때문에 규리(睽離)의 상(象)이 된 것이다. 군자는 규이(睽異)의 상(象)을 관찰하여 크게 같은 가운데에서 마땅히 달리 할 바를 안다. 성현(聖賢)이 세상에 삶에 사람의 도리(道理)의 떳떳함에 있어서는 크게 같지 않음이 없고, 세속(世俗)의 똑같이 하는 바에 있어서는 때로 홀로 다르게 할 때가 있으니, 병이(秉彛)에 있어서는 같고 세속(世俗)의 잘못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다. 크게 같이 하지 못하는 이는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이치(理致)를 어기는 사람이요, 홀로 다르게 하지 못하는 이는 세속을 따라 나쁜 것을 익히는 사람이니, 요컨대 같으면서 달리함에 있을 뿐이다. 《중용(中庸)》에 “화(和)하면서도 흐르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本義】 二卦合體而性不同이라.
두 괘(卦)가 체(體)는 합하였으나 성질(性質)은 같지 않다.
初九는 悔亡하니 喪馬하고 勿逐하여도 自復이니 見惡人하면 无咎리라.
초구(初九)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말을 잃고 쫓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올 것이니,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보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見惡人이라야,
【본의】 나쁜 사람을 만나야,
【傳】 九居卦初하니 睽之始也라 在睽乖之時하여 以剛動於下하니 有悔可知로되 所以得亡者는 九四在上하여 亦以剛陽으로 睽離无與하여 自然同類相合이요 同是陽爻로 同居下하고 又當相應之位하니 二陽은 本非相應者로되 以在睽故로 合也요 上下相與故로 能亡其悔也라 在睽엔 諸爻皆有應이라 夫合則有睽하니 本異則何睽리오 唯初與四는 雖非應이나 而同德相與라 故相遇라 馬者는 所以行也라 陽은 上行者也로되 睽獨无與하여 則不能行하니 是喪其馬也나 四旣與之合이면 則能行矣니 是勿逐而馬復得也라 惡人은 與己乖異者也요 見者는 與相通也라 當睽之時하여 雖同德者相與나 然小人乖異者至衆하니 若棄絶之면 不幾盡天下以仇君子乎아 如此則失含弘之義하여 致凶咎之道也니 又安能化不善而使之合乎아 故必見惡人則无咎也라 古之聖王이 所以能化姦凶爲善良하고 革仇敵爲臣民者는 由弗絶也라.
구(九)는 괘(卦)의 초(初)에 거하였으니, 규(睽)의 초기이다. 규괴(睽乖)의 때에 있어 강(剛)으로서 아래에 동(動)하니, 뉘우침이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없어지는 까닭은, 구사(九四)가 위에 있어 역시 강양(剛陽)으로 규리(睽離)하여 친한 이가 없어 자연 동류(同類)끼리 합하게 되고, 똑같이 양효(陽爻)로 함께 아래에 거하였으며, 또 서로 응(應)하는 자리에 당하였으니, 두 양(陽)은 본래 서로 응(應)하는 것이 아니나 규(睽)에 있기 때문에 합하는 것이요, 상하(上下)가 서로 친하기 때문에 그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규(睽)에 있어서는 여러 효(爻)가 모두 응(應)이 있다. 합하면 떠남이 있으니, 본래 달리 있었다면 무슨 떠남이 있겠는가. 초(初)와 사(四)는 비록 정응(正應)이 아니나 덕(德)이 같아 서로 친하므로 서로 만난 것이다. 말은 가는 것이다. 양(陽)은 위로 가는 것인데 어긋나고 고독하여 친한 이가 없어 갈 수가 없으니 이는 그 말을 잃은 것이나, 사(四)가 이미 초(初)와 합하면 갈 수가 있으니 이는 쫓지 않아도 다시 말을 얻은 것이다.
악인(惡人)은 자기와 어긋나고 다른 이이고, 견(見)은 더불어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규(睽)의 때를 당하여 비록 덕(德)이 같은 이와 서로 친하나 소인(小人) 중에 어그러지고 다른 이가 지극히 많으니, 만일 이들을 버리고 끊으면 천하(天下)를 다하여 군자(君子)를 원수(怨讐)로 삼음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와 같으면 함홍(含弘)의 뜻을 잃어 흉구(凶咎)를 이루는 길이니, 또 어떻게 불선(不善)한 이들을 교화(敎化)시켜 합하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보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 옛 성왕(聖王)이 간흉(姦凶)을 교화(敎化)시켜 선량한 사람을 만들고 원수(怨讐)와 적(敵)을 바꾸어 신민(臣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本義】 上无正應하니 有悔也로되 而居睽之時하여 同德相應하여 其悔亡矣라 故有喪馬勿逐而自復之象이라 然亦必見惡人然後可以辟(避)咎니 如孔子之於陽貨也라.
위에 정응(正應)이 없으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규(睽)의 때에 거하여 동덕(同德)으로 서로 응(應)하여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잃음에 쫓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오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본 뒤에야 허물을 피할 수 있으니, 공자(孔子)가 양화(陽貨)에 있어서와 같은 것이다.
象曰 見惡人은 以辟(避)咎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악인(惡人)을 만나봄은 허물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傳】 睽離之時에 人情乖違하니 求和合之라도 且病其不[一作未]能得也어든 若以惡人而拒絶之면 則將衆仇於君子而禍咎至矣라 故必見之는 所以免辟怨咎也니 无怨咎則有可合之道라.
규리(睽離)의 때에는 인정이 어그러지고 어긋나니, 화합(和合)하기를 구(求)하여도 될 수 없을까 근심하는데 만일 악인(惡人)이라 하여 거절한다면 장차 사람들이 군자(君子)를 원수(怨讐)로 삼아 화(禍)와 허물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악인(惡人)을 만나봄은 원망과 허물을 면하고 피하는 것이니, 원망과 허물이 없으면 합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九二는 遇主于巷하면 无咎리라.
구이(九二)는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遇主于巷이라야,
【본의】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나야,
【傳】 二與五正應이니 爲相與者也라 然在睽乖之時하여 陰陽相應之道衰하고 而剛柔相戾之意勝하니 學易者識此則知變通矣라 故二五雖正應이나 當委曲以相求也라 二以剛中之德으로 居下하여 上應六五之君하니 道合則志行하여 成濟睽之功矣로되 而居睽離之時하여 其交非固하니 二當委曲求於相遇하여 覬其得合也라 故曰遇主于巷이라 하니 必能合而後无咎라 君臣睽離면 其咎大矣라 巷者는 委曲之途也요 遇者는 會逢之謂也니 當委曲相求하여 期於會遇하여 與之合也라 所謂委曲者는 以善道宛轉將就하여 使合而已요 非枉己屈道也라.
이(二)는 오(五)와 정응(正應)이니 서로 친한 이가 되나 규괴(睽乖)의 때에 있어 음(陰)·양(陽)이 서로 응(應)하는 도(道)가 쇠(衰)하고 강(剛)·유(柔)가 서로 어그러지는 뜻이 우세하니, 역(易)을 배우는 이가 이것을 알면 변통(變通)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二)와 오(五)가 비록 정응(正應)이나 마땅히 곡진하게 서로 구해야 한다. 이(二)가 강중(剛中)의 덕(德)으로 아래에 거하여 위로 육오(六五)의 군주(君主)와 응(應)하니, 도(道)가 합하면 뜻이 행해져서 규(睽)를 구제(救濟)하는 공(功)을 이룰 수 있으나 규리(睽離)의 때에 거하여 그 사귐이 견고하지 못하니, 이(二)가 마땅히 위곡(委曲)히 서로 만나기를 구하여 합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 하였으니, 반드시 합한 뒤에야 허물이 없는 것이다. 군(君)·신(臣)이 규리(睽離)하면 그 허물이 크다. 항(巷)은 굽은 길이요 우(遇)는 모이고 만남을 이르니, 마땅히 위곡(委曲)히 서로 구하여 모이고 만나기를 기약해서 더불어 합해야 한다. 이른바 위곡(委曲)은 선(善)한 도(道)로 완곡히 돌리고 억지로 성취시켜 합하게 할 뿐이요, 몸을 굽히고 도(道)를 굽히는 것은 아니다.
【本義】 二五陰陽正應이로되 居睽之時하여 乖戾不合하니 必委曲相求而得會遇라야 乃爲无咎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이(二)와 오(五)는 음(陰)·양(陽)의 정응(正應)이나 규(睽)의 때에 거하여 어긋나서 합하지 못하니, 반드시 위곡(委曲)히 서로 구(求)하여 모이고 만나야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遇主于巷이 未失道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남은 도(道)를 잃는 것은 아니다.”
【傳】 當睽之時하여 君心未合하니 賢臣在下에 竭力盡誠하여 期使之信合而已라 至誠以感動之하고 盡力以扶持之하며 明義理以致其知하고 杜蔽惑以誠其意하여 如是宛轉하여 以求其合也라 遇는 非枉道迎逢也요 巷은 非邪僻由徑也라 故夫子特云遇主于巷이 未失道也라하시니 未는 非必也니 非必謂失道也라.
규(睽)의 때를 당하여 군주(君主)의 마음이 합하지 않으니, 현신(賢臣)이 아래에 있음에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믿고 합하게 하기를 기약할 뿐이다. 지성(至誠)으로 감동시키고 힘을 다하여 부지하며, 의리(義理)를 밝혀 그 앎을 지극히 하고 가리움과 미혹됨을 막아 그 뜻을 성실히 하여 이와 같이 완전(宛轉)해서 합하기를 구해야 한다. 우(遇)는 도(道)를 굽혀 군주(君主)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고, 항(巷)은 사벽(邪僻)하여 지름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특별히 말씀하기를 “군주(君主)를 골목에서 만남은 도(道)를 잃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미(未)는 반드시는 아니니, 반드시 도를 잃는 것은 아님을 말씀한 것이다.
【本義】 本其正應이요 非有邪也라.
본래 정응(正應)이요 사(邪)가 있는 것이 아니다.
六三은 見輿曳하고 其牛掣하며 其人이 天且劓니 无初하고 有終이리라.
육삼(六三)은 수레가 뒤로 끌리고 소가 앞이 가로막히며, 그 사람이 머리가 깎이고 코가 베임을 보니, 초(初)는 없고 종(終)은 있으리라.
【傳】 陰柔는 於平時에도 且不足以自立이어든 況當睽離之際乎아 三居二剛之間하여 處不得其所安하니 其見侵陵을 可知矣라 三以正應在上하여 欲進與上合志로되 而四阻於前하고 二牽於後하니 車牛는 所以行之具也라 輿曳는 牽於後也요 牛掣은 阻於前也니 在後者는 牽曳之而已요 當前者는 進者之所力犯也라 故重傷於上하니 爲四所傷也라 其人天且劓는 天은 髡首也요 劓는 截鼻也라 三從正應而四隔止之하니 三雖陰柔나 處剛而志行이라 故力進以犯之하니 是以傷也라 天而又劓는 言重傷也라 三不合於二與四하니 睽之時에 自无合義요 適合居剛守正之道也라 其於正應則睽極하여 有終合之理하니 始爲二陽所厄은 是无初也요 後必得合은 是有終也라 掣는 從制從手하니 執止之義也라.
음유(陰柔)는 평시에도 스스로 설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규리(睽離)의 때를 당함에 있어서랴. 삼(三)은 두 강효(剛爻)의 사이에 거하여 처함이 편안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침해(侵害)와 능멸(陵蔑)을 당함을 알 수 있다. 삼(三)은 정응(正應)이 위에 있어 나아가 상(上)과 뜻을 합하고자 하나 사(四)가 앞에서 가로막고 이(二)가 뒤에서 끄니, 수레와 소는 가는 도구이다. 여예(輿曳)는 뒤에서 끄는 것이요 우철(牛掣)은 앞에서 가로막는 것이니, 뒤에 있는 것은 끌 뿐이요 앞을 가로막는 것은 나아가는 이가 힘써 범하므로 위에 거듭 상(傷)하니, 사(四)에게 상(傷)함을 당하는 것이다. ‘기인천차의(其人天且劓)’는 천(天)은 머리를 깎임이요 의(劓)는 코를 베임이다. 삼(三)이 정응(正應)을 따르려 하나 사(四)가 가로막아 그치게 하니, 삼(三)이 비록 음유(陰柔)이나 강(剛)에 처하여 가는 데에 뜻을 두기 때문에 힘써 나아가 범(犯)하니, 이 때문에 상(傷)함을 당하는 것이다. 머리가 깎이고 또 코가 베임은 거듭 상(傷)함을 말한 것이다. 삼(三)은 이(二)와 사(四)에 합하지 못하니, 규(睽)의 때에 스스로 합하는 뜻이 없고, 다만 강(剛)에 거하여 정(正)을 지키는 도(道)와 합한다. 정응(正應)에 있어서는 규(睽)가 지극하여 끝내 합할 이치가 있으니, 처음에 두 양(陽)에게 곤액(困厄)을 당함은 초(初)가 없는 것이요, 뒤에 반드시 합함은 종(終)이 있는 것이다. 철(掣)은 제(制)를 따르고 수(手)를 따랐으니, 잡아 멈추는 뜻이다.
【本義】 六三이 上九正應而三居二陽之間하여 後爲二所曳하고 前爲四所掣하고 而當睽之時하여 上九猜狠方深이라 故又有髡劓之傷이라 然邪不勝正하여 終必得合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육삼(六三)은 상구(上九)와 정응(正應)인데 삼(三)이 두 양(陽)의 사이에 거하여 뒤로는 이(二)에게 끌림을 당하고 앞으로는 사(四)에게 저지를 당하며, 규(睽)의 때를 당하여 상구(上九)가 시기(猜忌)하고 원망함이 깊기 때문에 머리가 깎이고 코가 베이는 상(傷)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반드시 합한다. 이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見輿曳는 位不當也요 无初有終은 遇剛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여예(輿曳)를 당함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초(初)는 없으나 종(終)이 있음은 강(剛)을 만나기 때문이다.”
【傳】 以六居三은 非正也니 非正則不安이요 又在二陽之間하니 所以有如是艱厄이니 由位不當也라 无初[一有而字]有終者는 終必與上九相遇而合이니 乃遇剛也라 不正而合이면 未有久而不離者也어니와 合以正道면 自无終睽之理라 故賢者順理而安行하고 智者知幾而固守니라.
육(六)이 삼(三)에 거함은 정(正)이 아니니, 정(正)이 아니면 편안하지 못하고, 또 두 양(陽)의 사이에 있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어려움과 곤액이 있는 것이니,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初)는 없으나 종(終)이 있다는 것은 종말(終末)에는 반드시 상구(上九)와 서로 만나 합할 것이니, 이는 바로 강(剛)을 만나는 것이다. 바르지 못하면서 합하면 오래됨에 떠나지 않는 이가 없거니와 정도(正道)로써 합한다면 스스로 끝내 헤어질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는 이치를 순히 하여 편안히 행하고 지혜로운 이는 기미(幾微)를 알아 굳게 지키는 것이다.
九四는 睽孤하여 遇元夫하여 交孚니 厲하나 无咎리라.
구사(九四)는 규(睽)에 외로워 훌륭한 남편을 만나 서로 믿으니,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厲하여야,
【본의】 위태롭게 여겨야,
【傳】 九四當睽時하여 居非所安이요 无應而在二陰之間하니 是睽離孤處者也라 以剛陽之德으로 當睽離之時하여 孤立无與하니 必以氣類相求而合이라 是以遇元夫也라 夫는 陽稱이요 元은 善也라 初九當睽之初하여 遂能與同德而亡睽之悔하니 處睽之至善者也라 故目之爲元夫하니 猶云善士也라 四則過中하여 爲睽已甚하니 不若初之善也라 四與初 皆以陽處一卦之下하여 居相應之位하니 當睽乖之時하여 各无應援하여 自然同德相親이라 故會遇也라 同德相遇면 必須至誠相與니 交孚는 各有孚誠也라 上下二陽이 以至誠相合이면 則何時之不能行이며 何危之不能濟리오 故雖處[一无處字]危厲无咎也라 當睽離之時하여 孤居二陰之間하고 處不當位하니 危且有咎也로되 以遇元夫而交孚라 故得无咎也라.
구사(九四)는 규(睽)의 때를 당하여 거함이 편안한 곳이 아니요 응(應)이 없으며 두 음(陰)의 사이에 있으니, 이는 규리(睽離)에 외롭게 처하는 것이다. 강양(剛陽)의 덕(德)으로 규리( 離)의 때를 당하여 고립하여 더부는 이가 없으니, 반드시 뜻이 통하는 사람을 서로 찾아 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원부(元夫)를 만난 것이다. 부(夫)는 양(陽)을 칭하고 원(元)은 선(善)이다. 초구(初九)가 규(睽)의 초(初)를 당하여 마침내 구사(九四)와 더불어 덕(德)을 함께 하여 규(睽)의 뉘우침을 없앴으니, 규(睽)에 지극히 잘 대처한 이이다. 그러므로 지목하여 원부(元夫)라 하였으니, 선사(善士)라는 말과 같다. 사(四)는 중(中)을 지나 규(睽)가 됨이 너무 심하니, 초(初)의 선(善)함만 못하다. 사(四)와 초(初)가 모두 양(陽)으로 한 괘(卦)의 아래에 처하여 서로 응하는 자리에 거하였으니, 규괴( 乖)의 때를 당하여 각기 응원(應援)이 없어서 자연 덕(德)이 같은 이와 서로 친하기 때문에 회우(會遇)한 것이다. 덕(德)이 같은 자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지성(至誠)으로 서로 함께 하여야 하니, 교부(交孚)는 각기 부성(孚誠)이 있는 것이다. 위아래의 두 양(陽)이 지성(至誠)으로 서로 합하면 어느 때인들 행(行)하지 못하며 어떤 위험인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위려(危厲 에 처하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규리(睽離)의 때를 당하여 외롭게 두 음(陰)의 사이에 거하고, 처함이 마땅한 자리가 아니니, 위험하고 또 허물이 있을 것이나 원부(元夫)를 만나 서로 믿기 때문에 허물이 없게 된 것이다.
【本義】 睽孤는 謂无應이요 遇元夫는 謂得初九라 交孚는 謂同德相信이라 然當睽時라 故必危厲라야 乃得无咎니 占者亦如是也라.
규고(睽孤)는 응(應)이 없음을 이르고 원부(元夫)를 만남은 초구(初九)를 얻음을 이른다. 교부(交孚)는 덕(德)이 같아 서로 믿음을 이른다. 그러나 규(睽)의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해야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점치는 이도 이와 같다.
象曰 交孚无咎는 志行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서로 믿어 허물이 없음은 뜻이 행해지리라.”
【傳】 初, 四는 皆陽剛君子니 當睽乖之時하여 上下以至誠相交하여 協志同力이면 則其志可以行이요 不止无咎而已라 卦辭엔 但言无咎어늘 夫子又從而明之云 可以行其志하여 救時之睽也라 하시니라 蓋以君子陽剛之才而至誠相輔면 何所不能濟也리오 唯有君則能行其志矣리라.
초(初)와 사(四)는 모두 양강(陽剛) 군자(君子)이니, 규괴(睽乖)의 때를 당하여 상(上)·하(下)가 지성(至誠)으로 서로 사귀어 뜻을 합하고 힘을 함께 하면 그 뜻이 행해질 것이요 다만 허물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괘사(卦辭)에는 다만 ‘무구(无咎)’라고 말했는데 부자(夫子)가 또 따라서 밝히시기를 “그 뜻을 행하여 때의 규리(睽離)를 구제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군자(君子) 양강(陽剛)의 재질(才質)로 지성(至誠)으로 서로 도우면 어느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겠는가. 오직 군주(君主)가 있으면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六五는 悔亡하니 厥宗이 噬膚면 往에 何咎리오.
육오(六五)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면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本義】 噬膚니,
【본의】 살을 깨물듯이 하니,
【傳】 六以陰柔로 當睽離之時而居尊位하니 有悔可知라 然而下有九二剛陽之賢하여 與之爲應以輔翼之라 故得悔亡이라 厥宗은 其黨也니 謂九二正應也요 噬膚는 噬齧其肌膚而深入之也라 當睽之時하여 非入之者深이면 豈能合也리오 五雖陰柔之才나 二輔以陽剛之道而深入之면 則可往而有慶[一有也字]이니 復何過咎之有리오 以周成之幼稚而興盛王之治하고 以劉禪之昏弱而有中興之勢는 蓋由任聖賢之輔하여 而姬公孔明所以入之者深也일새니라.
육(六)은 음유(陰柔)로서 규리(睽離)의 때를 당하여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니, 뉘우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 구이(九二) 강양(剛陽)의 현자(賢者)가 있어 육오(六五)와 더불어 응(應)이 되어 보익(輔翼)하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어지는 것이다. ‘궐종(厥宗)’은 그 당(黨)이니, 구이(九二)의 정응(正應)을 이르며, ‘서부(噬膚)’는 기부(肌膚)를 깨물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규(睽)의 때를 당하여 들어감이 깊지 않으면 어찌 합할 수 있겠는가. 오(五)가 비록 음유(陰柔)의 재질(才質)이나 이(二)가 양강(陽剛)의 도(道)로 보필(輔弼)하여 깊이 들어가면 감에 경사(慶事)가 있을 것이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어렸는데도 훌륭한 왕(王)의 정치를 이룩하였고, 유선(劉禪)의 혼약(昏弱)함으로도 중흥(中興)의 형세가 있었던 것은 성현(聖賢)의 보필(輔弼)에 맡겨 주공(周公)과 공명(孔明)이 들어가기를 깊이 하였기 때문이다.
【本義】 以陰居陽은 悔也로되 居中得應이라 故能亡之라 厥宗은 指九二요 膚는 言易合이라 六五有柔中之德이라 故其象占如是하니라.
음(陰)으로서 양위(陽位)에 거함은 뉘우침이나, 중(中)에 거하고 응(應)을 얻었기 때문에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 ‘궐종(厥宗)’은 구이(九二)를 가리키고 ‘서부(噬膚)’는 합하기 쉬움을 말한 것이다. 육오(六五)가 유중(柔中)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厥宗噬膚는 往有慶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니, 이는 감에 경사가 있으리라.”
【傳】 爻辭엔 但言厥宗噬膚則可以往而无咎어늘 象復推明其義하여 言人君雖己才不足이나 若能信任賢輔하여 使以其道深入於己면 則可以有爲니 是往而有福慶也라.
효사(爻辭)에는 다만 ‘그 친족(親族)이 살을 깨물듯이 하면 감에 허물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상전(象傳)〉에는 다시 그 뜻을 미루어 밝혀서 ‘인군(人君)이 비록 자신의 재주가 부족하나 만약 어진 보필(輔弼)을 신임(信任)하여 그 도(道)로써 깊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하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으니, 이는 감에 복경(福慶)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上九는 睽孤하여 見豕負塗와 載鬼一車라 先張之弧라가 後說(脫)之弧하여 匪寇라 婚媾니 往遇雨하면 則吉하리라.
상구(上九)는 규고(睽孤)하여 돼지가 진흙을 진 것과 귀신(鬼神)이 한 수레에 가득히 실려 있는 것을 봄이다. 먼저는 활줄을 당기다가 뒤에는 활줄을 풀어놓아, 적이 아니라 혼구(婚媾)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리라.
【傳】 上居卦之終하니 睽之極也요 陽剛居上하니 剛之極也요 在離之上하니 用明之極也라 睽極則咈戾而難合하고 剛極則躁暴而不詳하고 明極則過察而多疑하니 上九有六三之正應하여 實不孤나 而其才性如此하여 自睽孤也라 如人雖有親黨이나 而多自疑猜하여 妄生乖離면 雖處骨肉親黨之間이나 而常孤獨也라 上之與三은 雖爲正應이나 然居睽極하여 无所不疑하여 其見三을 如豕之汚穢而又背負泥塗하니 見其可惡之甚也라 旣惡之甚則猜하여 成其罪惡하여 如見載鬼滿一車也라 鬼本无形而見載之一車는 言其以无爲有하니 妄之極也라.
상(上)은 괘(卦)의 종(終)에 거하였으니 규(睽)가 지극한 것이요, 양강(陽剛)이 상(上)에 거하였으니 강(剛)이 지극한 것이요, 이(離)의 위에 있으니 밝음을 씀이 지극한 것이다. 규(睽)가 지극하면 어그러져 합하기 어렵고, 강(剛)이 지극하면 조급하여 상세하지 못하고, 밝음이 지극하면 지나치게 살펴 의심함이 많으니, 상구(上九)는 육삼(六三)의 정응(正應)이 있어서 실로 외롭지 않으나 그 재주와 성질이 이와 같아 스스로 규고(睽孤)한 것이다. 사람이 비록 친당(親黨)이 있으나 스스로 많이 의심하고 시기하여 망령되이 괴리(乖離)하는 마음을 내면 비록 골육(骨肉)과 친당(親黨)의 사이에 처하더라도 항상 고독(孤獨)한 것과 같다. 상(上)은 삼(三)과 비록 정응(正應)이 되나 규(睽)의 극(極)에 거하여 의심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삼(三)을 보기를 돼지가 더러운데다가 또 등에 진흙을 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니, 깊이 미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미 깊이 미워하면 시기(猜忌)하여 그 죄악(罪惡)을 이루어 마치 귀신(鬼神)이 한 수레에 가득히 실려 있음을 봄과 같은 것이다. 귀신(鬼神)은 본래 형체가 없는데 한 수레 가득히 실려 있음을 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김을 말한 것이니, 망령됨이 지극하다.
物理는 極而必反하니 以近明之하면 如人適東에 東極矣면 動則西也요 如升高에 高極矣면 動則下也니 旣極則動而必反也라 上之 乖旣極이요 三之所處者正理니 大凡失道旣極이면 則必反正理라 故上於三에 始疑而終必合也라 先張之弧는 始疑惡(오)而欲射之也라 疑之者는 妄也니 妄安能常이리오 故終必復於正이라 三實无惡(악)이라 故後說弧而弗射하니 睽極而反이라 故與三非復爲寇讐요 乃婚媾也라 此匪寇婚媾之語는 與他卦同而義則殊也라 陰陽交而和暢則爲雨하니 上於三에 始疑而睽로되 睽極則不疑而合하나니 陰陽合而益和則爲雨라 故云往遇雨則吉이라 往者는 自此以往也니 謂旣合而益和則吉也라.
사물의 이치는 지극하면 반드시 돌아오니, 가까운 일로써 밝히면 사람이 동쪽으로 갈 적에 동쪽이 지극할 경우 동(動)하면 서쪽이 되는 것과 같고, 높은 곳에 오를 적에 높음이 지극할 경우 동(動)하면 아래로 내려옴과 같으니, 이미 지극하면 동(動)함에 반드시 돌아온다. 상(上)의 규괴( 乖)가 이미 지극하고 삼(三)의 처한 것이 정리(正理)이니, 대개 도(道)를 잃음이 이미 지극하면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상(上)이 삼(三)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심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합하는 것이다. 먼저는 활줄을 당긴다는 것은 처음에 의심하고 미워하여 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심함은 망령됨이니, 망령됨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정(正)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삼(三)은 실로 죄악(罪惡)이 없기 때문에 뒤에 활줄을 풀어놓고 쏘지 않은 것이니, 규(睽)가 극(極)에 이르러 돌아왔으므로 삼(三)과 더불어 다시는 구수(寇讐)가 아니요 바로 혼구(婚媾)인 것이다. 여기의 ‘비구혼구(匪寇婚媾)’란 말은 다른 괘(卦)와 내용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음(陰)·양(陽)이 사귀어 화창(和暢)하면 비가 되니, 상(上)이 삼(三)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심하여 규리( 離)하였으나 규(睽)가 지극하면 의심하지 않아 합하니, 음(陰)·양(陽)이 합하여 더욱 화(和)하면 비가 된다. 그러므로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다고 말한 것이다. 왕(往)은 이로부터 감이니, 이미 합하고 더욱 화(和)하면 길(吉)함을 말한 것이다.
【本義】 睽孤는 謂六三爲二陽所制하고 而己以剛處明極睽極之地하여 又自猜狠而乖離也라 見豕負塗는 見其汚也요 載鬼一車는 以无爲有也라 張弧는 欲射之也요 說弧는 疑稍釋也요 匪寇婚媾는 知其非寇而實親也요 往遇雨則吉은 疑盡釋而睽合也라 上九之與六三은 先睽後合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규고(睽孤)는 육삼(六三)이 두 양(陽)에게 제재를 당하고 자신이 강(剛)으로서 밝음의 극(極)과 규극(睽極)의 자리에 처하여 또 스스로 시기하고 원망하여 괴리(乖離)함을 말한 것이다.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음을 보았다는 것은 더러움을 본 것이요, 귀신이 한 수레 가득히 실려ㅠ있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활줄을 당김은 쏘고자 함이요 활줄을 풀어놓음은 의심이 약간 풀린 것이요, 적이 아니라 혼구(婚媾)라는 것은 적이 아님을 알고 실로 친함이요, 가서 비를 만나면 길(吉)하다는 것은 의심이 모두 풀려 규(睽)가 합한 것이다. 상구(上九)와 육삼(六三)은 먼저는 규리(睽離)하였다가 뒤에는 합하기 때문에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遇雨之吉은 群疑亡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비를 만남이 길(吉)함은 모든 의심이 없어진 것이다.”
【傳】 雨者는 陰陽和也니 始睽而能終和라 故吉也라 所以能和者는 以群疑盡亡也니 其始睽也에 无所不疑라 故云群疑요 睽極而合則皆亡也라.
비는 음(陰)·양(陽)이 화(和)함이니 처음에는 규리(睽離)하였다가 마침내는 화(和)하였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화(和)할 수 있는 까닭은 모든 의심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니, 처음 규리(睽離)할 때에는 의심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므로 모든 의심이라 말하였고, 규(睽)가 극(極)에 이르러 합하면 의심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38. 규(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