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례헌 방문 완전 환영 %
Skip to content

문례헌

 

아홉 해 전에 한 친구가 사기로 만든 작은 술잔 하나를 선물하였다. 나는 그 술잔을 사랑하고 아껴서 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술을 따라 마셨다.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 그 술잔을 가져가지 않고 고향집에 남겨두면서 깨뜨리지 말라고 맏아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그 뒤 맏아들이 찾아왔을 때 혹시라도 술잔을 깨뜨렸는지 물었더니 “벌써 깨졌는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아 깨뜨린 것이 틀림없다.

언젠가 관동(館洞)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반짝이고 깨끗한 사기 술잔이 눈에 뜨였다. 술에 취한 틈을 엿보다가 빼앗아 가지고 소매에 넣어 왔다. 집안 사람에게 부탁하여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그 술잔에 따라 마시도록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계집종이 조심하지 않아서 또 깨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탄식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라 또 그런 술잔을 장만할 생각이었다.

이해 봄 다시 서울에 갔을 때 다른 계집종이 사기 술잔을 바쳤다. 예전에 깨진 술잔에 견주어 보니 몸집이 조금 컸다. 나는 몹시 애지중지하면서 또 깨질까 염려하여 계집종의 손에 닿지 않도록 하였다. 술을 따라 마실 때에는 내가 직접 따라 마셨고, 술을 마신 뒤에는 바로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지금껏 깨지지 않았으니 퍽이나 다행스럽다.

사기 술잔은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을 제일로 친다. 이 술잔도 광주에서 나온 것으로 그 생김새는 똑바르고 그 빛깔은 정결하여 정말이지 술을 마시는 사람에 딱 어울린다. 허나 사기 술잔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오래도록 온전하게 지니기가 어렵다. 오늘은 비록 온전하다고 해? ?내일 깨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이번 달에는 비록 온전하다고 해도 다음 달에 깨지지 않을지는 역시나 알 수 없다.

유기(鍮器) 술잔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만 사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 내가 사기 술잔을 꼭 가지려 하는 동기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친구들을 내 집에 모이게 하여 이 술잔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힌 것은 이 술잔이 있어서다. 감히 아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 김득신(金得臣), 〈사배설(沙杯說)〉, 《백곡집(柏谷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04집 《 백곡집(柏谷集)》6권 설(說)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조회 수 :
444
등록일 :
2008.11.17
20:15:03 (*.80.21.55)
엮인글 :
http://jinoossi.com/xe/guest1/19969/54d/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jinoossi.com/xe/guest1/19969

지누랑

2008.11.17
20:15:33
(*.80.21.55)
내게도 이런 사기 술잔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6 술이 맛은 달지만 [2] 지누랑 2008-12-04 257
35 石洲先生과 湖南地方 지누랑 2008-12-04 244
34 주거 문화의 아름다운 변신 --- 진우 김홍식님 야거(野居) [1] 仁谷 2008-11-27 526
» 사기 술잔 [1] 지누랑 2008-11-17 444
32 父父子子 [1] file 지누랑 2008-11-12 363
31 돗자리를 짜다 지누랑 2008-11-11 368
30 형님 덕분에 [1] 풀꽃남광 2008-11-09 447
29 잊지 못할 수채화 [1] 불꽃 2008-11-05 364
28 지금은 가장 행복할 때 [2] 불꽃 2008-11-05 386
27 축 합격 [2] 소정 2008-11-03 440

이 홈피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 57216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구산제길 78-2 070-4203-3358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