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손(損)
【傳】 損은 序卦에 解者는 緩也니 緩必有所失이라 故受之以損이라 하니라 縱緩則必有所失이요 失則損也니 損所以繼解也라 爲卦 艮上兌下하니 山體高하고 澤體深하니 下深則上益高하니 爲損下益上之義요 又澤在山下하여 其氣上通하여 潤及草木百物하니 是損下而益上也며 又下爲兌說하고 三爻皆上應하니 是說以奉上이니 亦損下益上之義라 又下兌之成兌는 由六三之變也요 上艮之成艮은 自上九之變也라 三本剛而成柔하고 上本柔而成剛하니 亦損下益上之義라 損上而益於下則爲益이요 取下而益於上則爲損이라 在人上者 施其澤以及下則益也요 取其下以自厚則損也니 譬諸壘土컨대 損於上以培厚其基本則上下安固矣니 豈非益乎아 取於下以增上之高則危墜至矣니 豈非損乎아 故損者는 損下益上之義요 益則反是라.
손괘(損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해(解)는 느슨함이니, 느슨하면 반드시 잃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손괘(損卦)로 받았다.” 하였다. 풀어놓아 느슨해지면 반드시 잃는 바가 있고 잃으면 손(損)이 되니, 손괘(損卦)가 이 때문에 해괘(解卦)를 이은 것이다. 괘(卦)됨이 간(艮)이 위에 있고 태(兌)가 아래에 있으니, 산(山)의 체(體)는 높고 택(澤)의 체(體)는 깊은 바, 아래가 깊으면 위가 더욱 높아지니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뜻이 된다. 또 못이 산 아래에 있어 그 기운이 위로 통하여 윤택함이 초목(草木)과 온갖 물건에 미치니, 이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또 아래는 태열(兌說)이 되고 세 효(爻)가 모두 위와 응(應)하니 이는 기뻐함으로써 윗사람을 받듦이니, 또한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뜻이다. 또 아래의 태(兌)가 태(兌)가 된 것은 육삼(六三)이 변했기 때문이요, 위의 간(艮)이 간(艮)이 된 것은 상구(上九)가 변했기 때문이다. 삼(三)은 본래 강(剛)이었는데 유(柔)가 되었고 상(上)은 본래 유(柔)였는데 강(剛)이 되었으니, 역시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뜻이다.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益卦)[ ]가 되고, 아래에서 취하여 위에 더하면 손괘(損卦)가 된다. 인민(人民)의 위에 있는 이가 은택(恩澤)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厚)하게 하면 손(損)이 되니, 이것을 성루(城壘)의 흙에 비유하면 위의 흙을 덜어 기본(基本)을 북돋아 두텁게 하면 위아래가 안정되고 튼튼해지니 어찌 익(益)이 아니겠는가. 아래의 것을 취하여 위를 더 높이면 위태롭고 떨어짐이 이를 것이니, 어찌 손(損)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손(損)은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뜻이요, 익(益)은 이와 반대이다.
損은 有孚면 元吉하고 无咎하여 可貞이라 利有攸往하니,
손(損)은 성실함을 두면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고 허물이 없어서 정(貞)할 수 있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本義】 无咎하고 可貞이요.
【본의】 허물이 없고 정(貞)할 수 있으며,
【傳】 損은 減損也니 凡損抑其過하여 以就義理는 皆損之道也라 損之道는 必有孚誠이니 謂至誠順於理也라 損而順理면 則大善而吉이요 所損无過差하여 可貞固常行而利有所往也라 人之所損이 或過, 或不及,[一有或常字] 或不常[一作當]이면 皆不合正理니 非有孚也라 非有孚則无吉而有咎니 非可貞之道니 不可行也라.
손(損)은 감손(減損)함이니, 무릇 과실(過失)을 덜고 억제하여 의리(義理)에 나아감은 모두 손(損)의 도(道)이다. 손(損)의 도(道)는 반드시 부성(孚誠)이 있어야 하니, 지성(至誠)으로 이치에 순종(順從)함을 이른다. 손(損)을 하여 이치에 순하면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고, 더는 바가 잘못이 없어서 정고(貞固)히 항상 행할 수 있으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사람이 더는 바가 혹 과(過)하거나 혹 불급(不及)하거나 혹 일정하지 않으면 모두 정리(正理)에 부합되지 않으니, 부성(孚誠)을 둠이 아니다. 부성(孚誠)을 둠이 아니면 길(吉)함이 없고 허물이 있을 것이니, 정고(貞固)히 할 수 있는 도(道)가 아니니 행할 수 없다.
【本義】 損은 減省(생)也라 爲卦 損下卦上畫之陽하여 益上卦上畫之陰하고 損兌澤之深하여 益艮山之高하니 損下益上, 損內益外는 剝民奉君之象이니 所以爲損也라 損所當損而有孚信이면 則其占이 當有此下四者之應矣리라.
손(損)은 덜고 줄이는 것이다. 괘(卦)됨이 하괘(下卦) 상획(上畫)의 양(陽)을 덜어 상괘(上卦) 상획(上畫)의 음(陰)에 더하고, 태택(兌澤)의 깊음을 덜어 간산(艮山)의 높음에 더하니,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고 안을 덜어 밖에 더함은 백성을 깎아 군주를 받드는 상(象)이니, 이 때문에 손(損)이라 한 것이다. 마땅히 덜 것을 덜어 부신(孚信)이 있으면 그 점(占)이 마땅히 이 아래 네 가지의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
曷之用이리오 二簋可用享이니라.
어디에 쓰겠는가. 두 그릇만 가지고도 제향(祭享)할 수 있다.
【傳】 損者는 損過而就中이요 損浮末而就本實也라 聖人以寧儉爲禮之本이라 故爲損發明其義하여 以享祀言之라 享祀之禮는 其文最繁이나 然以誠敬爲本이요 多儀備物은 所以將飾其誠敬之心이니 飾過其誠이면 則爲僞矣니 損飾은 所以存誠也라 故云曷之用이리오 二簋可用享이라 하니 二簋之約을 可用享祭는 言在乎誠而已니 誠爲本也라 天下之害 无不由末之勝也니 峻宇雕墻은 本於宮室이요 酒池肉林은 本於飮食이요 淫酷殘忍은 本於刑罰이요 窮兵黷武는 本於征討라 凡人欲之過者는 皆本於奉養이나 其流之遠則爲害矣라 先王制其本者는 天理也요 後人流於末者는 人欲也니 損之義는 損人欲하여 以復天理而已라.
손(損)은 과(過)함을 덜어 중(中)에 나아가고 부말(浮末)을 덜어 본실(本實)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차라리 검소한 것을 예(禮)의 근본(根本)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손(損)을 위하여 그 뜻을 발명(發明)해서 향사(享祀)로써 말씀한 것이다. 향사(享祀)의 예(禮)는 그 문식(文飾)함이 가장 많으나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을 근본(根本)으로 삼고, 의식을 성대하게 하며 물건을 구비함은 그 정성(精誠)과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장차 꾸미기 위한 것이니, 문식(文飾)이 정성(精誠)보다 과(過)하면 거짓이 되니, 문식(文飾)을 더는 것은 정성(精誠)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쓰겠는가. 두 그릇만 가지고도 제향(祭享)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두 그릇의 약소함을 제향(祭享)에 쓸 수 있음은 정성(精誠)에 있을 뿐임을 말한 것이니, 정성(精誠)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해(害)는 말(末)이 우세함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집을 높게 짓고 담장을 조각함은 궁실(宮室)에서 근본하고,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듦은 음식에서 근본하고, 음혹(淫酷)하고 잔인(殘忍)함은 형벌(刑罰)에서 근본하고, 병란(兵亂)을 끝까지 일으키고 무력(武力)을 번거롭게 행사함은 정토(征討)에서 근본하였다. 무릇 인욕(人欲)의 지나침은 모두 봉양(奉養)에서 근본하였으나, 그 흐름이 멀리가면 해(害)가 된다. 선왕(先王)이 그 근본을 따른 것은 천리(天理)이고, 후인(後人)이 말폐(末弊)에 흐른 것은 인욕(人欲)이니, 손(損)의 뜻은 인욕(人欲)을 덜어 천리(天理)로 돌아갈 뿐이다.
【本義】 言當損時면 則至薄无害라.
손(損)의 때를 당하면 지극히 박(薄)하여도 해(害)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彖曰 損은 損下益上하여 其道上行이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손(損)은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여 그 도(道)가 올라가 행함이니,
【傳】 損之所以爲損者는 以損於下而益於上也니 取下以益上이라 故云其道上行이라 夫損上而益下則爲益이요 損下而益上則爲損이니 損基本以爲高者를 豈可謂之益乎아.
손괘(損卦)가 손(損)이 된 까닭은 아래에서 덜어 위에 더하기 때문이니, 아래에서 취하여 위에 더하였으므로 그 도(道)가 올라가 행(行)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益卦)가 되고,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면 손괘(損卦)가 되니, 기본(基本)을 덜어 높게 만드는 것을 어찌 익(益)이라 이르겠는가.
【本義】 以卦體로 釋卦名義라.
괘체(卦體)로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損而有孚면 元吉无咎可貞利有攸往이니,
덜되 부성(孚誠)을 두면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고 허물이 없어서 정(貞)할 수 있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傳】 謂損而以至誠이면 則有此元吉以下四者하니 損道之盡善也라.
덜되 지성(至誠)으로써 하면 ‘원길(元吉)’ 이하 이 네 가지가 있음을 말하였으니, 손(損)의 도(道)에 진선(盡善)한 것이다.
曷之用二簋可用享은 二簋應有時며 損剛益柔有時니,
어디에 쓰겠는가. 두 그릇만 가지고도 제향(祭享)할 수 있다는 것은 두 그릇을 올리는 것이 응당 때가 있으며, 강(剛)을 덜어 유(柔)에 더하는 것이 때가 있으니,
【傳】 夫子特釋曷之用二 可用享이라 卦辭簡直하여 謂當損去浮飾하여 曰何所用哉리오 二簋면 可以享也라 하니 厚本損末之謂也라 夫子恐後人不達하고 遂以爲文飾當盡去라 故詳言之하시니라 有本必有末이요 有實必有文이니 天下萬事无不然者라 无本不立이요 无文不行이니 父子主恩이나 必有嚴順之體하고 君臣主敬이나 必有承接之儀하며 禮讓存乎內나 待威儀而後行이요 尊卑有其序나 非物采則[一作而]无別이니 文之與實이 相須而不可缺也라 及夫文之勝, 末之流하여 遠本喪實이면 乃當損之時也라 故云曷所用哉리오 二簋足以薦其誠矣라 하니 謂當務實而損飾也라 夫子恐人之泥言也라 故復明之曰 二簋之質은 用之當有時하니 非其所用而用之면 不可也라 하시니 謂文飾未過而損之와 與損之至於過甚則非也라 損剛益柔有時는 剛爲過하고 柔爲不足이니 損益은 皆損剛益柔也라 必順時而行이니 不當時而損益之則非也라.
부자(夫子)가 특별히 ‘갈지용이궤가용향(曷之用二簋可用享)’의 뜻을 해석하셨다. 괘사(卦辭)가 간략하고 직설적이어서 마땅히 부식(浮飾)을 덜 것을 일러 말하기를 “어디에 쓰겠는가. 두 그릇이면 제향(祭享)할 수 있다.” 하였으니, 근본(根本)을 후(厚)히 하고 말(末)을 덞을 이른 것이다. 부자(夫子)는 후인(後人)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문식(文飾)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여길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자세히 말씀하신 것이다. 본(本)이 있으면 반드시 말(末)이 있고, 실(實)이 있으면 반드시 문식(文飾)이 있으니, 천하(天下)의 만사(萬事)가 그렇지 않음이 없다. 본(本)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문식(文飾)이 없으면 행하지 못하니, 부자간(父子間)에는 은혜(恩惠)를 주장하나 반드시 엄하고 순종(順從)하는 체(體)가 있고, 군신간(君臣間)에는 경(敬)을 주장하나 반드시 받들고 접하는 의식이 있으며, 예(禮)와 겸양(謙讓)은 안에 보존하나 위의(威儀)를 기다린 뒤에 행해지고, 존비(尊卑)는 차례가 있으나 사물의 채색(彩色)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으니, 문(文)과 실(實)은 서로 필요로 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문(文)이 우세하고 말(末)에 흘러서 본(本)과 멀어지고 실(實)을 잃게 되면 이는 마땅히 덜어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쓰겠는가. 두 그릇으로도 충분히 정성(精誠)을 올릴 수 있다.” 하였으니, 마땅히 실(實)을 힘쓰고 문식(文飾)을 덜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부자(夫子)는 사람들이 말에 집착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밝히시기를 “두 그릇의 질박함은 사용함이 마땅히 때가 있으니, 써야 할 때가 아닌데 쓰면 불가하다.” 하였으니, 문식(文飾)이 과(過)하지 않은데 덞과 덜기를 매우 과(過)하게 함은 잘못임을 말씀한 것이다. ‘손강익유유시(損剛益柔有時)’는 강(剛)은 과(過)함이 되고 유(柔)는 부족함이 되니, 손(損)·익(益)은 모두 강(剛)을 덜어 유(柔)에 더하는 것이다. 반드시 때에 순응(順應)하여 행해야 하니, 때에 마땅하지 않은데 손(損)·익(益)을 하면 잘못이다.
損益盈虛를 與時偕行이니라.
덜고 더하며 채우고 비움을 때에 따라 함께 행해야 한다.”
【傳】 或損, 或益, 或盈, 或虛를 唯隨時而已라 過者損之하고 不足[一作及]者益之하며 虧者盈之하고 實者虛之하여 與時偕行也라.
혹 덜고 혹 더하며 혹 채우고 혹 비움을 오직 때에 따라 할 뿐이다. 과(過)한 것을 덜어내고 부족(不足)한 것을 더하며, 이지러진 것을 채우고 꽉찬 것을 비게 하여 때에 따라 함께 행해야 한다.
【本義】 此는 釋卦辭라 時는 謂當損之時라.
이는 괘사(卦辭)를 해석한 것이다. 시(時)는 마땅히 덜어야 할 때를 이른다.
象曰 山下有澤이 損이니 君子以하여 懲忿窒欲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산(山) 아래에 못이 있음이 손(損)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분노(忿怒)를 징계(懲戒)하고 욕심을 막는다.”
【傳】 山下有澤하니 氣通上潤과 與深下以增高는 皆損下之象이라 君子觀損之象하여 以損於己하나니 在修己之道에 所當損者는 唯忿與欲이라 故以懲戒其忿怒하고 窒塞其意欲也라.
산(山) 아래에 못이 있으니, 기운이 통하여 위로 윤택함과 아래를 깊게 파서 더 높게 함은 모두 아래를 더는 상(象)이다. 군자(君子)가 손(損)의 상(象)을 관찰하여 자기에게서 더니, 수신(修身)하는 도(道)에 있어서 마땅히 덜어야 할 것은 오직 분노와 욕심이다. 그러므로 분노(忿怒)를 징계(懲戒)하고 의욕(意欲)을 막는 것이다.
【本義】 君子修身에 所當損者 莫切於此하니라.
군자(君子)가 수신(修身)함에 있어서 마땅히 덜어야 할 것은 이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
初九는 已事어든 遄往이라야 无咎리니 酌損之니라.
초구(初九)는 일을 마쳤거든 빨리 떠나가야 허물이 없으리니 짐작(斟酌)하여 덜어야 한다.
【本義】 已事요,
【본의】 일을 그만두고 속히 가야,
【傳】 損之義는 損剛益柔, 損下益上也라 初以陽剛으로 應於四하고 四以陰柔로 居上位하여 賴初之益者也라 下之益上은 當損己而不自以爲功이요 所益於上者事旣已면 則速去之하여 不居其功이라야 乃无咎也라 若享其成功之美면 非損己益上也니 於爲下之道에 爲有咎矣라 四之陰柔는 賴初者也라 故聽於初하니 初當酌度其宜而損己以益之니 過與不及은 皆不可也라.
손(損)의 뜻은 강(剛)을 덜어 유(柔)에 더하고,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다. 초(初)는 양강(陽剛)으로 사(四)에 응(應)하고, 사(四)는 음유(陰柔)로 상위(上位)에 거하여 초(初)의 더함에 의뢰하는 것이다. 아래가 위에 더할 경우에는 마땅히 자기를 덜되 스스로 공(功)으로 여기지 말고 위에 더하는 이는 일이 끝났으면 속히 떠나가서 그 공(功)을 차지하지 말아야 이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만약 성공의 아름다움을 누리면 자기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 아니니, 아래가 된 도리에 있어 허물이 있게 된다. 사(四)의 음유(陰柔)는 초(初)에게 의뢰하는 것이므로 초(初)를 따르니, 초(初)가 그 마땅함을 짐작(斟酌)하여 자기를 덜어 더해 주어야 하는 바, 과(過)와 불급(不及)은 모두 불가(不可)하다.
【本義】 初九當損下益上之時하여 上應六四之陰하니 輟所爲之事而速往以益之는 无咎之道也라 故其象占如此라 然居下而益上엔 亦當斟酌其淺深也라.
초구(初九)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때를 당하여 위로 육사(六四)의 음(陰)과 응(應)하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속히 가서 더해줌은 허물이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다. 그러나 아래에 거하여 위에 더해줄 때에는 또한 마땅히 그 얕고 깊음을 짐작(斟酌)하여야 한다.
象曰 已事遄往은 尙(上)合志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이사천왕(已事遄往)’은 위와 뜻이 합하기 때문이다.”
【傳】 尙은 上也니 時之所崇用이 爲尙이라 初之所尙者는 與上合志也니 四賴於初하고 初益於四는 與上合志也라.
상(尙)은 상(上)이니, 당시에 숭상하여 쓰는 것을 상(尙)이라 한다. 초(初)가 숭상(崇尙)하는 것은 위와 뜻이 합하기 때문이니, 사(四)가 초(初)에 의뢰하고 초(初)가 사(四)에 더해줌은 위와 뜻이 합하는 것이다.
【本義】 尙은 上通이라.
상(尙)은 상(上)과 통한다.
九二는 利貞하고 征이면 凶하니 弗損이라야 益之리라.
구이(九二)는 정(貞)함이 이롭고 가면 흉(凶)하니, 덜지 않아야 유익(有益)하게 하리라.
【傳】 二以剛中으로 當損剛之時하여 居柔而說體로 上應六五陰柔之君하니 以柔說應上이면 則失其剛中之德이라 故戒所利在貞正也라 征은 行也니 離乎中이면 則失其貞正而凶矣요 守其中이면 乃貞也라 弗損益之는 不自損其剛貞이면 則能益其上이니 乃益之也라 若失其剛貞而用柔說이면 適足以損之而已[一无而已字]니 非損己而[一有以字]益上也라 世之愚者 有雖无邪心이나 而唯知竭力順上爲忠者하니 蓋不知弗損益之之義也라.
이(二)는 강중(剛中)으로 강(剛)함을 더는 때를 당하여 유(柔)에 거하고 열체(說體)로 위로 육오(六五) 음유(陰柔)의 군주(君主)와 응(應)하니, 유순(柔順)함과 기뻐함으로써 위에 응(應)하면 강중(剛中)의 덕(德)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로운 바가 정정(貞正)에 있다고 경계한 것이다. 정(征)은 감이니, 중(中)을 떠나면 정정(貞正)함을 잃어 흉(凶)할 것이요, 중(中)을 지키면 바로 정(貞)이다. ‘불손익지(弗損益之)’는 스스로 그 강정(剛貞)함을 덜지 않으면 윗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강정(剛貞)함을 잃고 유순함과 기뻐함을 쓴다면 다만 덜 뿐이니, 자기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리석은 이들은 비록 사심(邪心)이 없으나 오직 힘을 다하여 위에 순종하는 것이 충성이 되는 줄 아니, ‘불손익지(弗損益之)’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本義】 九二剛中으로 志在自守하여 不肯妄進이라 故占者利貞而征則凶也라 弗損益之는 言不變其所守 乃所以益上也라.
구이(九二)는 강중(剛中)으로 뜻이 스스로 지키는 데에 있어서 함부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점치는 이가 정(貞)함이 이롭고 가면 흉(凶)한 것이다. ‘불손익지(弗損益之)’는 지키는 바를 변치 않는 것이 바로 위에 더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象曰 九二利貞은 中以爲志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이(九二)의 이정(利貞)은 중(中)으로 뜻을 삼았기 때문이다.”
【傳】 九居二는 非正也요 處說은 非剛也로되 而得中爲善이라 若守其中德이면 何有不善이리오 豈有中而不正者며 豈有中而有過者리오 二所謂利貞은 謂以中爲志也니 志存乎中則自正矣라 大率中重於正하니 中則正矣어니와 正은 不必中也니 能守中則有益於上矣리라.
구(九)가 이(二)에 거함은 정(正)이 아니요 열(說)에 처함은 강(剛)이 아니나 중(中)을 얻어 선(善)함이 된다. 만약 그 중덕(中德)을 지킨다면 어찌 불선(不善)함이 있겠는가. 어찌 중도(中道)에 맞고서 바르지 않은 이가 있으며, 어찌 중도(中道)에 맞고서 허물이 있는 이가 있겠는가. 이(二)의 이른바 ‘이정(利貞)’은 중(中)으로 뜻을 삼음을 이르니, 뜻이 중(中)에 있으면 저절로 바루어진다. 대체로 중(中)이 정(正)보다 중(重)하니, 중도(中道)에 맞으면 정(正)이 되지만 정(正)이 반드시 중도(中道)에 맞는 것은 아니니, 중도(中道)를 지키면 위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六三은 三人行엔 則損一人하고 一人行엔 則得其友로다.
육삼(六三)은 세 사람이 갈 때에는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 갈 때에는 그 벗을 얻는다.
【傳】 損者는 損有餘也요 益者는 益不足也라 三人은 謂下三陽, 上三陰이라 三陽同行이면 則損九三以益上하고 三陰同行이면 則損上六以爲三하니 三人行에 則損一人也라 上이 以柔易剛而謂之損은 但言其減一耳라 上與三은 雖本相應이나 由二爻升降而一卦皆成하니 兩相與也라 初二二陽과 四五二陰이 同德相比하며 三與上應하여 皆兩相與하니 則其志專하여 皆爲得其友也라 三雖與四相比나 然異體而應上하여 非同行者也라 三人則損一人, 一人則得其友는 蓋天下无不二者하니 一與二相對待는 生生之本也요 三則餘而當損矣니 此損益之大義也라.
손(損)은 유여(有餘)함을 더는 것이요, 익(益)은 부족함에 더하는 것이다. 삼인(三人)은 아래의 세 양(陽)과 위의 세 음(陰)을 이른다. 세 양(陽)이 함께 가면 구삼(九三)을 덜어 위에 더하고, 세 음(陰)이 함께 가면 상육(上六)을 덜어 육삼(六三)을 만드니, 세 사람이 갈 때에 한 사람을 더는 것이다. 상(上)은 유(柔)에서 강(剛)으로 바뀌었는데, 손(損)이라고 이른 것은 다만 하나를 줄임을 말했을 뿐이다. 상(上)과 삼(三)은 비록 본래 서로 응(應)하나 두 효(爻)가 오르내림으로 말미암아 한 괘(卦)가 다 이루어졌으니, 둘이 서로 친한 것이다. 초(初)와 이(二) 두 양효(陽爻)와 사(四)와 오(五) 두 음효(陰爻)는 덕(德)이 같아 서로 친하며, 삼(三)은 상(上)과 응(應)하여 모두 둘이 서로 친하니, 그 뜻이 전일(專一)하여 모두 벗을 얻음이 된다. 삼(三)은 비록 사(四)와 가까이 있으나 체(體)가 다르고 상(上)과 응(應)하여 동행(同行)하는 것이 아니다. 세 사람이면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면 벗을 얻는다는 것은 천하(天下)에 둘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일(一)과 이(二)가 서로 대대(對待)함은 생생(生生)의 근본이요, 삼(三)은 남아서 마땅히 덜어야 하니, 이는 손익(損益)의 대의(大義)이다.
夫子又於繫辭에 盡其義하여 曰 天地絪縕에 萬物化醇하고 男女構精에 萬物化生이라 易曰 三人行엔 則損一人하고 一人行엔 則得其友라 하니 言致一也라 하시니라 絪縕은 交密之狀이라 天地之氣相交而密이면 則生萬物之化醇하나니 醇은 謂醲厚니 醲厚는 猶精一也라 男女精氣交構면 則化生萬物하나니 唯精醇專一이라 所以能生也라 一陰一陽이니 豈可二也리오 故三則當損이니 言專致乎一也라 天地之間에 當損益之明且大者 莫過此也라.
부자(夫子)는 또 〈계사전(繫辭傳)〉에서 그 뜻을 다하여 말씀하시기를 “천지(天地)의 기운(氣運)이 쌓임에 만물(萬物)이 화순(化醇)하고 남녀(男女)가 정(精)을 맺음에 만물(萬物)이 화생(化生)한다. 역(易)에 이르기를 ‘세 사람이 갈 때에는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 갈 때에는 벗을 얻는다’ 하였으니, 하나에 지극히 함을 말한 것이다.” 하셨다. 인온(絪縕)은 사귀어 친밀한 모양이다. 천지(天地)의 기운이 서로 사귀어 친밀(親密)하면 만물(萬物)의 화순(化醇)을 낳으니, 순(醇)은 농후(醲厚)함을 말하니 농후(醲厚)는 정일(精一)과 같다. 남녀(男女)의 정기(精氣)가 서로 맺어지면 만물(萬物)을 화생(化生)하니, 오직 정순(精醇)하고 전일(專一)하기 때문에 낳는 것이다. 한 음(陰)과 한 양(陽)이니, 어찌 둘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셋이면 마땅히 덜어야 하는 것이니, 오로지 하나에 지극히 함을 말한 것이다. 천지(天地)의 사이에 마땅히 덜고 더해야 함이 분명하면서도 큰 것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本義】 下卦本乾而損上爻以益坤하니 三人行而損一人也요 一陽上而一陰下하니 一人行而得其友也라 兩相與則專하고 三則雜而亂하니 卦有此象이라 故戒占者當致一也라.
하괘(下卦)는 본래 건(乾)인데 상효(上爻)를 덜어 곤(坤)에 더하였으니 세 사람이 갈 때에 한 사람을 더는 것이요, 한 양(陽)이 올라가고 한 음(陰)이 내려왔으니 한 사람이 갈 적에 벗을 얻는 것이다. 둘이 서로 친하면 전일(專一)하고 셋이면 잡되어 어지러우니, 괘(卦)에 이러한 상(象)이 있으므로 점치는 이에게 마땅히 하나에 지극히 하라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一人行은 三이면 則疑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일인행(一人行)’은 셋이면 의심하리라.”
【傳】 一人行而得一人이면 乃得友也요 若三人行이면 則疑所與矣라 理當損去其一人이니 損其餘也라.
한 사람이 가면서 한 사람을 얻으면 이는 벗을 얻는 것이요, 만약 세 사람이 간다면 상대할 바를 의심하게 된다. 이치(理致)가 마땅히 한 사람을 덜어야 하니, 남는 것을 더는 것이다.
六四는 損其疾호되 使遄이면 有喜하여 无咎리라.
육사(六四)는 그 병을 덜되 빠르게 하면 기쁨이 있어 허물이 없으리라.
【傳】 四以陰柔居上하여 與初之剛陽相應하니 在損時而應剛은 能自損以從剛陽也니 損不善以從善也라 初之益四는 損其柔而益之以剛이니 損其不善也라 故曰損其疾이라 하니 疾은 謂疾病이니 不善也라 損於不善호되 唯使之遄速則有喜而无咎라 人之損過는 唯患不速이니 速則不致於深過하여 爲可喜也라.
사(四)는 음유(陰柔)로 위에 거하여 초(初)의 강양(剛陽)과 서로 응(應)하니, 손(損)의 때에 있어서 강(剛)에 응(應)함은 스스로 덜어 강양(剛陽)을 따르는 것이니, 불선(不善)함을 덜어 선(善)을 따르는 것이다. 초(初)가 사(四)에 더함은 유(柔)를 덜어 강(剛)에 더해주는 것이니, 불선(不善)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덜었다고 하였으니, 질(疾)은 질병(疾病)을 이르는바, 불선(不善)이다. 불선(不善)을 덜되 오직 빠르게 하면 기쁨이 있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허물을 덞은 오직 속히 하지 않음을 근심하니, 속히 하면 깊은 과실에 이르지 아니하여 기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以初九之陽剛으로 益己而損其陰柔之疾호되 唯速則善이니 戒占者如是則无咎矣라.
초구(初九)의 양강(陽剛)을 자기에게 더하고 음유(陰柔)의 질병을 덜되 오직 속히 하면 좋으니, 점치는 이에게 이와 같이 하면 허물이 없다고 경계한 것이다.
象曰 損其疾하니 亦可喜也로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병을 더니 기뻐할 만하도다.”
【傳】 損其所疾은 固可喜也라 云亦은 發語辭라.
병을 덞은 진실로 기뻐할 만하다. 역(亦)이라고 말한 것은 발어사(發語辭)이다.
六五는 或益之면 十朋之라 龜도 弗克違하리니 元吉하니라.
육오(六五)는 혹 더해주면 열 벗이 도와주는지라 거북점도 능히 어기지 못하리니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다.
【本義】 或이 益之十朋之龜어든 弗克違니,
【본의】 혹자가 십붕(十朋)의 거북을 더해주되 어기지 못하니,
【傳】 六五於損時에 以中順居尊位하여 虛其中以應乎二之剛陽하니 是人君能虛中自損하여 以順從在下之賢也라 能如是면 天下孰不損己自盡以益之리오 故或有益之之事면 則十朋助之矣니 十은 衆辭라 龜者는 決是非吉凶之物이라 衆人之公論이 必合正理면 雖龜筴(策)이라도 不能違也니 如此면 可謂大善之吉矣라 古人曰 謀從衆則合天心이라 하니라.
육오(六五)는 손(損)의 때에 있어서 중순(中順)으로 존위(尊位)에 거하여 마음을 비워 이(二)의 강양(剛陽)에 응(應)하니, 이는 인군(人君)이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겸손하여 아래에 있는 현자(賢者)를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으면 천하(天下)에 누가 자기를 덜어 스스로 다해서 더해주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혹 더해줄 일이 있으면 열 벗이 도와주는 것이니, 십(十)은 많다는 말이다. 거북은 시비(是非)와 길흉(吉凶)을 결단하는 물건이다. 여러 사람의 공론(公論)이 반드시 정리(正理)에 합하면 비록 거북점과 시초점이라도 어기지 못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대선(大善)의 길(吉)함이라 이를 만하다. 고인(古人)의 말에 이르기를 “계책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천심(天心)에 합한다.” 하였다.
【本義】 柔順虛中하여 以居尊位하니 當損之時하여 受天下之益者也라 兩龜爲朋이니 十朋之龜는 大寶也라 或以此益之而不能辭면 其吉可知니 占者有是德則獲其應也라.
유순(柔順)하고 중(中)을 비워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니, 손(損)의 때를 당하여 천하(天下)의 더함을 받아들이는 이이다. 두 마리의 거북을 붕(朋)이라 하니, 십붕(十朋)의 거북은 큰 보물이다. 혹 이것으로써 더하여도 사양할 수 없다면 그 길(吉)함을 알 수 있으니, 점치는 이가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 이러한 응(應)함을 얻으리라.
象曰 六五元吉은 自上祐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육오(六五)의 원길(元吉)은 위로부터 도와주는 것이다.”
【傳】 所以得元吉者는 以其能盡衆人之見하여 合天地之理라 故自上天降之福祐也라.
원길(元吉)을 얻는 까닭은 여러 사람의 견해(見解)를 다하여 천지(天地)의 이치에 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천(上天)에서 복(福)을 내려주는 것이다.
上九는 弗損하고 益之면 无咎하고 貞吉하니 利有攸往이니 得臣이 无家리라.
상구(上九)는 덜지 말고 더해주면 허물이 없고 정(貞)하고 길(吉)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신하(臣下)를 얻음이 집안에서만이 아니리라.
【本義】 弗損이라도 益之니 无咎어니와 貞이면 吉하여,
【본의】 덜지 않더라도 더해주니 허물이 없거니와 정(貞)하면 길(吉)하여,
【傳】 凡損之義有三하니 損己從人也와 自損以益於人也와 行損道以損於人也라 損己從人은 徙於義也요 自損益人은 及於物也요 行損道以損於人은 行其義也니 各因其時하여 取大者言之라 四五二爻는 取損己從人이요 下體三爻는 取自損以益人이요 損時之用은 行損道以損天下之當損者也니 上九則取不行其損爲義라 九居損之終하니 損極而當變者[一无者字]也라 以剛陽居上하니 若用[一有其字]剛以損削於下면 非爲上之道니 其咎大矣라 若不行其損하고 變而以剛陽之道로 益於下면 則无咎而得其正且吉也니 如是則宜有所往이니 往則有益矣라 在上하여 能不損其下而益之면 天下孰不服從이리오 從服之衆이 无有內外也라 故曰 得臣无家라 하니 得臣은 謂得人心歸服이요 无家는 謂无有遠近內外之限也라.
무릇 손(損)의 뜻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자기를 덜어 남을 따름과 스스로 덜어 남에게 더해줌과 손도(損道)를 행하여 남에게서 더는 것이다. 자기를 덜어 남을 따름은 의(義)로 옮김이요, 스스로 덜어 남에게 더해줌은 남에게 미침이요, 손도(損道)를 행하여 남에게서 덞은 의(義)를 행함이니, 각각 그 때에 따라 큰 것을 취하여 말한 것이다. 사(四)와 오(五) 두 효(爻)는 자기를 덜어 남을 따름을 취하였고, 하체(下體)의 세 효(爻)는 스스로 덜어 남에게 더해줌을 취하였으며, 손(損)의 때에 쓰임은 손도(損道)를 행하여 천하(天下)에 마땅히 덜어야 할 것을 더는 것이니, 상구(上九)는 덞을 행하지 않음을 취하여 뜻을 삼았다. 구(九)가 손(損)의 종(終)에 처했으니, 손(損)이 극(極)에 이르러 마땅히 변해야 하는 것이다. 양강(陽剛)으로 위에 거하였으니, 만일 강(剛)함을 써서 아래에서 덜고 깎아내면 윗사람이 된 도리가 아니니, 그 허물이 크다. 만일 덞을 행하지 않고 변하여 양강(陽剛)의 도(道)로써 아래에 더해주면 허물이 없어 바르고 또 길(吉)함을 얻을 것이니, 이와 같으면 마땅히 가는 바를 둘 것이니 가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위에 있으면서 능히 아래를 덜지 말고 더해준다면 천하(天下)에 누가 복종(服從)하지 않겠는가. 따르고 복종하는 무리가 내외(內外)가 없으니 ‘득신무가(得臣无家)’라 하였으니, ‘득신(得臣)’은 인심이 귀복(歸服)함을 얻음을 이르고 ‘무가(无家)’는 원근(遠近)과 내외(內外)의 한계(限界)가 없음을 이른다.
【本義】 上九當損下益上之時하여 居卦之上하니 受益之極而欲自損以益人也라 然居上而益下엔 有所謂惠而不費者하니 不待損己然後可以益人也니 能如是則无咎라 然亦必以正則吉而利有所往이라 惠而不費면 其惠廣矣라 故又曰得臣无家라 하니라.
상구(上九)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때를 당하여 괘(卦)의 위에 거하였으니, 더함을 받음이 지극해서 스스로 덜어 남에게 더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위에 있으면서 아래에 더해줌에는 이른바 ‘은혜롭되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으니, 자기를 덜어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으면 허물이 없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정도(正道)로써 하면 길(吉)하여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울 것이다. 은혜롭되 허비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가 넓다. 그러므로 또 ‘득신무가(得臣无家)’라고 한 것이다.
象曰 弗損益之는 大得志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불손익지(弗損益之)’는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
【傳】 居上하여 不損下而反益之면 是君子大得行其志也니 君子之志는 唯在益於人而已라.
위에 거하여 아래를 덜지 말고 도리어 더해준다면 이는 군자(君子)가 그 뜻을 크게 행함이니, 군자(君子)의 뜻은 오직 남을 유익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41. 손(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