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절(節)
【傳】 節은 序卦에 渙者는 離也니 物不可以終離라 故受之以節이라 하니라 物旣離散이면 則當節止之니 節所以次渙也라 爲卦 澤上有水하니 澤之容은 有限이라 澤上置水에 滿則不容이니 爲有節之象이라 故爲節이라.
절괘(節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환(渙)은 이산(離散)됨이니, 사물은 끝내 이산(離散)될 수 없으므로 절괘(節卦)로 받았다.” 하였다. 사물이 이미 이산(離散)되면 마땅히 절제(節制)하여 멈춰야 하니, 절괘(節卦)가 이 때문에 환괘(渙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못 위에 물이 있으니, 못의 용납함은 한계가 있다. 못 위에 물을 둠에 가득차면 용납하지 못하니, 절제(節制)가 있는 상(象)이다. 그러므로 절(節)이라 한 것이다.
節은 亨하니 苦節은 不可貞이니라.
절(節)은 형통(亨通)하니, 괴로운 절(節)은 정고(貞固)할 수 없다.
【傳】 事旣有節이면 則能致亨通이라 故節有亨義하니라 節貴適中하니 過則苦矣니 節至於苦면 豈能常也리오 不可固守以爲常이니 不可貞也라.
일이 이미 절제(節制)가 있으면 형통(亨通)함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절(節)에 형통(亨通)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절제(節制)함은 적중(適中)함을 귀하게 여기니, 지나치면 괴로우니 절제(節制)함이 괴로움에 이르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굳게 지켜 항상할 수 없으니, 이는 정고(貞固)할 수 없는 것이다.
【本義】 節은 有限而止也라 爲卦下兌上坎하니 澤上有水하여 其容有限이라 故爲節이니 節固自有亨道矣라 又其體陰陽各半而二五皆陽이라 故其占得亨이라 然至於太甚이면 則苦矣라 故又戒以不可守以爲貞也하니라.
절(節)은 한계가 있어 멈추는 것이다. 괘(卦)됨이 아래는 태(兌)이고 위는 감(坎)이니, 못 위에 물이 있어 그 용납함이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절(節)이라 하였으니, 절(節)은 진실로 스스로 형통(亨通)할 도(道)가 있다. 또 체(體)가 음효(陰爻)와 양효(陽爻)가 각각 반씩이고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모두 양(陽)이기 때문에 그 점(占)이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심함에 이르면 괴로우므로 또 지켜서 정고(貞固)히 할 수 없다고 경계한 것이다.
彖曰 節亨은 剛柔分而剛得中할새요,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절(節)이 형통(亨通)함은 강효(剛爻)와 유효(柔爻)가 반씩 나뉘고 강(剛)이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요,
【傳】 節之道 自有亨義하니 事有節則能亨也라 又卦之才 剛柔分處하고 剛得中而不過하니 亦所以爲節이니 所以能亨也라.
절(節)의 도(道)는 스스로 형통(亨通)할 뜻이 있으니, 일에 절제(節制)가 있으면 형통(亨通)할 수 있다. 또 괘(卦)의 재질이 강효(剛爻)와 유효(柔爻)가 나누어 처하고 강(剛)이 중(中)을 얻어 지나치지 않으니, 역시 절(節)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형통(亨通)한 것이다.
【本義】 以卦體로 釋卦辭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苦節不可貞은 其道窮也일새라.
괴로운 절(節)은 정고(貞固)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도(道)가 궁극하기 때문이다.
【傳】 節이 至於極而苦면 則不可堅固常守니 其道已窮極也라.
절(節)이 극(極)에 이르러 괴로우면 견고히 항상 지킬 수 없으니, 그 도(道)가 너무 궁극한 것이다.
【本義】 又以理言이라.
또 이치로써 말하였다.
說以行險하고 當位以節하고 中正以通하니라.
기뻐하여 험함에 행하고 지위를 담당하여 절제(節制)하고 중정(中正)으로써 통한다.
【傳】 以卦才言也라 內兌外坎은 說以行險也라 人於所說則不知已하고 遇艱險則思止하나니 方說而止는 爲節之義라 當位以節은 五居尊은 當位也요 在澤上은 有節也니 當位而以節은 主節者也라 處得中正은 節而能通也니 中正則通이요 過則苦矣라.
괘재(卦才)로써 말하였다. 내괘(內卦)는 태(兌)이고 외괘(外卦)는 감(坎)인 것은 기뻐하여 험함에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기뻐하는 바에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어려움과 험함을 만나면 그칠 것을 생각하니, 막 기뻐하면서도 그침은 절(節)의 뜻이다. ‘당위이절(當位以節)’은 오(五)가 존위(尊位)에 거함은 지위를 담당한 것이요 못 위에 있음은 절제(節制)가 있는 것이니, 지위를 담당하여 절제(節制)함은 절(節)을 주관하는 이이다. 처함이 중정(中正)을 얻음은 절제(節制)하면서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니, 중정(中正)하면 통(通)하고 지나치면 괴롭다.
【本義】 又以卦德卦體言之라 當位中正은 指五요 又坎爲通이라.
또 괘덕(卦德)과 괘체(卦體)로 말하였다. ‘당위중정(當位中正)’은 오(五)를 가리키며 또 감(坎)은 통(通)함이 된다.
天地節而四時成하나니 節以制度하여 不傷財하며 不害民하나니라.
천지(天地)가 절도(節度)가 있어 사시(四時)가 이루어지니, 제도(制度)로써 절제(節制)하여 재물을 상(傷)하지 않으며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
【傳】 推言節之道하니라 天地有節이라 故能成四時하나니 无節則失序也라 聖人이 立制度以爲節이라 故能不傷財害民이라 人欲之无窮也하니 苟非節以制度면 則侈肆하여 至於傷財害民矣라.
절제(節制)하는 도(道)를 미루어 말하였다. 천지(天地)가 절도(節度)가 있기 때문에 사시(四時)를 이루는 것이니, 절도(節度)가 없으면 차례를 잃는다. 성인(聖人)이 제도(制度)를 세워 절제(節制)하였다. 그러므로 재물을 상(傷)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욕망은 무궁하니, 만일 제도(制度)로써 절제(節制)하지 않는다면 사치하고 방사하여 재물을 상하고 백성을 해침에 이를 것이다.
【本義】 極言節道하니라.
절제(節制)하는 도(道)를 극언(極言)하였다.
象曰 澤上有水節이니 君子以하여 制數度하며 議德行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못 위에 물이 있음이 절(節)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수(數)와 도(度)를 제정하며 덕행(德行)을 의논한다.”
【傳】 澤之容水有限하여 過則盈溢하나니 是有節이라 故爲節也라 君子觀節之象하여 以制立數度하나니 凡物之大小, 輕重, 高下, 文質이 皆有數度하니 所以爲節也라 數는 多寡요 度는 法制라 議德行者는 存諸中爲德이요 發於外爲行이니 人之德行이 當義則中節이라 議는 謂商度(탁)求中節也라.
못이 물을 용납함은 한계가 있어서 지나치면 가득차 넘치니, 이는 절도(節度)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節)이라 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절(節)의 상(象)을 관찰하여 수(數)와 도(度)를 제정하여 세우니, 무릇 사물의 대(大)와 소(小), 경(輕)과 중(重), 고(高)와 하(下), 문(文)과 질(質)이 모두 수(數)와 도(度)가 있으니, 이는 절제(節制)하는 것이다. 수(數)는 다과(多寡)이고 도(度)는 법제(法制)이다. 덕행(德行)을 의논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둠을 덕(德)이라 하고 밖에 발함을 행(行)이라 하니, 사람의 덕행(德行)이 의(義)에 마땅하면 절도(節度)에 맞는다. 의(議)는 헤아려서 절도(節度)에 맞음을 구함을 이른다.
初九는 不出戶庭이면 无咎리라.
초구(初九)는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不出戶庭이니 无咎니라.
【본의】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음이니, 허물이 없다.
【傳】 戶庭은 戶外之庭이요 門庭은 門內[一作外]之庭이라 初以陽在下하고 上復有應하니 非能節者也요 又當節之初라 故[一无故字]戒之謹守하여 至於不出戶庭이면 則无咎也라 初能固守로되 終或渝之하니 不謹於初면 安能有卒이리오 故於節之初에 爲戒甚嚴也라.
호정(戶庭)은 호(戶) 밖의 뜰이요 문정(門庭)은 문(門) 안의 뜰이다. 초(初)가 양(陽)으로서 아래에 있고 위에 다시 응(應)이 있으니, 절제(節制)할 수 있는 이가 아니며 또 절(節)의 초기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삼가 지켜서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음에 이르면 허물이 없다고 경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굳게 지킬 수 있으나 끝에는 혹 변할 수 있으니, 초기에 삼가지 않으면 어찌 마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절(節)의 초기에 경계함이 심히 엄한 것이다.
【本義】 戶庭은 戶外之庭也라 陽剛得正하고 居節之初하여 未可以行하니 能節而止者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호정(戶庭)은 호(戶) 밖의 뜰이다. 양강(陽剛)이 정(正)을 얻고 절(節)의 초기에 거하여 행할 수 없으니, 능히 절제(節制)하여 그치는 이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不出戶庭이나 知通塞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으나, 통함과 막힘을 알아야 한다.”
【傳】 爻辭는 於節之初에 戒之謹守라 故云不出戶庭則无咎也라 하고 象은 恐人之泥於言也라 故復明之云 雖當謹守하여 不出戶庭이나 又必知時之通塞也라 하니라 通則行이요 塞則止니 義當出則出矣라 尾生之信[一无信字]은 水至不去하니 不知通塞也라 故君子貞而不諒이라 繫辭所解에 獨以言者는 在人所節은 唯言與行이니 節於言則行可知니 言當在先也라.
효사(爻辭)는 절(節)의 초기에 삼가 지킴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고 하였고, 〈상전(象傳)〉은 사람들이 말에 집착할까 저어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밝히기를 ‘비록 마땅히 삼가 지켜서 호정(戶庭)을 나가지 않으나 또 반드시 때의 통함과 막힘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통하면 가고 막히면 멈춰야 하니, 의리상 나가야 하면 나가는 것이다. 미생(尾生)의 신(信)은 물이 닥쳐오는 데도 떠나가지 않았으니, 통함과 막힘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정고(貞固)함을 지키고 작은 신(信)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계사(繫辭)의 해석에는 오직 말만 말한 것은 사람에게 있어 절제(節制)할 것은 오직 말과 행실이니, 말을 절제(節制)하면 행실을 알 수 있으니, 말이 마땅히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九二는 不出門庭이라 凶하니라.
구이(九二)는 문정(門庭)을 나가지 않으니 흉하다.
【傳】 二雖剛中之質이나 然處陰居說而承柔하니 處陰은 不正也요 居說은 失剛也요 承柔는 近邪也라 節之道는 當以剛中正이어늘 二失其剛中之德하니 與九五剛中正으로 異矣라 不出門庭은 不之於外也니 謂不從於五也라 二五非陰陽正應이라 故不相從이라 若以剛中之道相合이면 則可以成節之功이어늘 唯其失德失時라 是以凶也니 不合於五는 乃不正之節也라 以剛中正爲節은 如懲忿窒慾, 損過抑有餘[一作益不及]가 是也요 不正之節은 如嗇節於用, 懦節於行이 是也라.
이(二)가 비록 강중(剛中)의 자질이나 음(陰)에 처하고 기뻐함에 거했고 유(柔)를 받들고 있으니, 음(陰)에 처함은 바르지 못함이요 기뻐함에 거함은 강(剛)함을 잃은 것이요 유(柔)를 받듦은 사(邪)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 절제(節制)하는 도(道)는 마땅히 강중정(剛中正)을 써야 하는데 이(二)가 강중(剛中)의 덕(德)을 잃었으니, 구오(九五)의 강중정(剛中正)과는 다르다. 문정(門庭)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니, 오(五)를 따르지 않음을 이른다. 이효(二爻)와 오효(五爻)는 음양(陰陽)의 정응(正應)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강중(剛中)의 도(道)로 서로 합한다면 절(節)의 공(功)을 이룰 수 있는데 오직 덕(德)을 잃고 때를 잃었기 때문에 흉한 것이니, 오(五)에게 합하지 않음은 곧 바르지 못한 절제(節制)이다. 강중정(剛中正)으로 절제(節制)함은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며 과(過)함을 덜고 유여(有餘)함을 억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요, 바르지 못한 절제(節制)는 인색(吝嗇)한 이가 씀을 절약하고 나약한 이가 행실을 절제(節制)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本義】 門庭은 門內之庭也라 九二當可行之時而失剛不正하고 上无應與하여 知節而不知通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문정(門庭)은 문 안의 뜰이다. 구이(九二)가 행할 만한 때를 당하여 강(剛)을 잃고 바르지 못하며 위에 응여(應與)가 없어서 절제(節制)할 줄만 알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不出門庭凶은 失時가 極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문정(門庭)을 나가지 않아 흉함은 때를 잃음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傳】 不能上從九五剛中正之道하여 成節之功하고 乃係於私暱之陰柔하니 是失時之至極이니 所以凶也라 失時는 失其所宜也라.
위로 구오(九五)의 강중정(剛中正)한 도(道)를 따라 절제(節制)함의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사사롭고 친한 음유(陰柔)에게 얽매여 있으니, 이는 때를 잃음이 지극한 것이니, 이 때문에 흉한 것이다. 때를 잃음은 마땅한 바를 잃는 것이다.
六三은 不節若이면 則嗟若하리니 无咎니라.
육삼(六三)은 절제(節制)하지 않으면 한탄하리니, 허물할 데가 없다.
【本義】 不節若이라 則嗟若이니,
【본의】 절제하지 못하여 한탄함이니,
【傳】 六三은 不中正하고 乘剛而臨險하니 固宜有咎나 然柔順而和說하니 若能自節而順於義하면 則可以无過요 不然則凶咎必至하리니 可傷嗟也라 故不節若이면 則嗟若이니 己所自致라 无所歸咎也니라.
육삼(六三)은 중정(中正)하지 못하며 강(剛)을 타고 험(險)함에 임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순(柔順)하고 화열(和說)하니, 만약 스스로 절제(節制)하여 의(義)에 순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흉함과 허물이 반드시 이를 것이니, 상심하고 한탄할 만하다. 그러므로 절제(節制)하지 않으면 한탄하는 것이니, 자기가 스스로 오게 하였기에 허물을 돌릴 곳이 없는 것이다.
【本義】 陰柔而不中正하여 以當節時하니 非能節者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음유(陰柔)로서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절(節)의 때를 당하였으니, 절제(節制)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不節之嗟를 又誰咎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절제(節制)하지 못한 한탄을 또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傳】 節則可以免[一作无]過어늘 而不能自節하여 以致可嗟하니 將誰咎乎아.
절제(節制)하면 허물을 면할 수 있는데 스스로 절제(節制)하지 못하여 한탄함을 이루었으니, 장차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本義】 此无咎는 與諸爻異하니 言无所歸咎也라.
여기의 무구(无咎)는 여러 효(爻)와 다르니, 허물을 돌릴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六四는 安節이니 亨하니라.
육사(六四)는 절제(節制)에 편안함이니, 형통(亨通)하다.
【본의】 편안히 행하는 절제(節制)이니,
【傳】 四順承九五剛中正之道하니 是는 以中正爲節也니 以陰居陰은 安於正也요 當位는 爲有節之象이라 下應於初하니 四는 坎體로 水也니 水上溢은 爲无節이요 就下는 有節也라 如四之義는 非强節之요 安於節者也라 故能致亨이니 節은 以安爲善이라 强守而不安이면 則不能常이니 豈能亨也리오.
사(四)는 구오(九五)의 강중정(剛中正)한 도(道)를 순히 받드니, 이는 중정(中正)함으로 절제(節制)를 하는 것이니, 음(陰)으로서 음위(陰位)에 거함은 정도(正道)에 편안함이요 자리에 마땅함은 절제(節制)가 있는 상(象)이다. 아래로 초(初)와 응(應)하니, 사(四)는 감체(坎體)로 물이니, 물이 위로 넘침은 절제(節制)가 없는 것이고, 아래로 내려감은 절제(節制)가 있는 것이다. 사(四)와 같은 뜻은 억지로 절제(節制)함이 아니요 절제(節制)에 편안한 이이다. 그러므로 형통(亨通)함을 이룰 수 있으니, 절제(節制)는 편안함을 선(善)으로 여긴다. 억지로 지키고 편안하지 못하면 항상할 수 없으니, 어찌 형통(亨通)하겠는가.
【本義】 柔順得正하고 上承九五하니 自然有節者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유순(柔順)하면서 정(正)을 얻고 위로 구오(九五)를 받드니, 자연스럽게 절제(節制)가 있는 이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安節之亨은 承上道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안절(安節)의 형통(亨通)함은 위의 도(道)를 받들기 때문이다.”
【傳】 四能安節之義非一이어늘 象에 獨擧其重者는 上承九五剛中正之道하여 以爲節하니 足以亨矣요 餘善이 亦不出於中正也일새라.
사(四)가 절제(節制)에 편안한 뜻이 한 가지가 아닌데, 〈상전(象傳)〉에 홀로 중한 것을 든 것은 위로 구오(九五)의 강중정(剛中正)한 도(道)를 받들어 절제(節制)하니 형통(亨通)할 수 있고, 나머지 선(善)도 중정(中正)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九五는 甘節이라 吉하니 往하면 有尙하리라.
구오(九五)는 감미로운 절제(節制)이다. 길(吉)하니 가면 가상(嘉尙)한 일이 있으리라.
【本義】 往有尙하리라.
【본의】 감에 가상(嘉尙)한 일이 있으리라.
【傳】 九五는 剛中正으로 居尊位하여 爲節之主하니 所謂當位以節, 中正以通者也라 在己則安行이요 天下則說從이니 節之甘美者也니 其吉可知라 以此而行이면 其功大矣라 故往則有可嘉尙也라.
구오(九五)는 강중정(剛中正)으로 존위(尊位)에 거하여 절(節)의 주체가 되었으니, 이른바 ‘지위를 담당하여 절제(節制)하고 중정(中正)하여 통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있어서는 편안히 행하고 천하(天下)는 기뻐하여 따르니, 절제(節制)함의 달고 아름다운 것이니, 그 길(吉)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행하면 그 공(功)이 크므로 가면 가상(嘉尙)할 만한 일이 있는 것이다.
【本義】 所謂當位以節, 中正以通者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이른바 ‘지위를 담당하여 절제(節制)하고 중정(中正)하여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甘節之吉은 居位中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감미로운 절제(節制)의 길(吉)함은 처한 자리가 중(中)이기 때문이다.”
【傳】 旣居尊位하고 又得中道하니 所以吉而有功이라 節은 以中爲貴하니 得中則正矣로되 正不能盡中也라.
이미 존위(尊位)에 거하고 또 중도(中道)를 얻었으니, 이 때문에 길(吉)하여 공(功)이 있는 것이다. 절제(節制)함은 중(中)을 귀하게 여기니, 중(中)을 얻으면 정(正)이 되지만 정(正)이 모두 중(中)하지는 못하다.
上六은 苦節이니 貞이면 凶하고 悔면 亡하리라.
상육(上六)은 괴로운 절제(節制)이니, 정고(貞固)히 지키면 흉하고, 뉘우쳐 고치면 흉함이 없어지리라.
【本義】 貞이라도 凶하나 悔亡하리라.
【본의】 바르더라도 흉(凶)하나 뉘우침이 없어지리라.
【傳】 上六은 居節之極하니 節之苦者也요 居險之極하니 亦爲苦義라 固守則凶이요 悔則凶亡이니 悔는 損過從中之謂也라 節之悔亡은 與他卦之悔亡으로 辭同而義異也라.
상육(上六)은 절(節)의 극(極)에 거하였으니 절제(節制)함이 괴로운 것이며, 험(險)의 극(極)에 거하였으니 역시 괴로운 뜻이 된다. 굳게 지키면 흉하고 뉘우치면 흉함이 없어질 것이니, 회(悔)는 과(過)함을 덜어 중(中)을 따름을 이른다. 절괘(節卦)의 회망(悔亡)은 다른 괘(卦)의 회망(悔亡)과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本義】 居節之極이라 故爲苦節이요 旣處過極이라 故雖得正而不免於凶이라 然禮奢寧儉이라 故雖有悔而終得亡之也라.
절(節)의 극(極)에 거하였으므로 고절(苦節)이 되고, 이미 과극(過極)에 처하였으므로 비록 정(正)을 얻어도 흉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禮)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므로 비록 뉘우침이 있으나 끝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象曰 苦節貞凶은 其道窮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고절정흉(苦節貞凶)’은 그 도(道)가 궁극하기 때문이다.”
【傳】 節旣苦而貞固守之則凶이니 蓋節之道至於窮極矣라.
절제(節制)함이 이미 괴로운데 정고(貞固)히 이를 지키면 흉하니, 절제(節制)하는 도(道)가 궁극함에 이른 것이다.

60. 절(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