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기제(旣濟)
【傳】 旣濟는 序卦에 有過物者는 必濟라 故受之以旣濟라 하니라 能過於物이면 必可以濟라 故小過之後에 受之以旣濟也라 爲卦 水在火上하니 水火相交면 則爲用矣라 各當其用이라 故爲旣濟하니 天下萬事已濟之時也라.
기제괘(旣濟卦)는 〈서괘전(序卦傳)〉에 “남보다 뛰어남이 있는 이는 반드시 이루므로 기제괘(旣濟卦)로 받았다.” 하였다. 이미 남보다 뛰어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소과괘(小過卦)의 뒤에 기제괘(旣濟卦)로써 받은 것이다. 괘(卦)됨이 물이 불 위에 있으니, 물과 불이 서로 사귀면 쓰임이 된다. 각기 그 쓰임에 마땅하므로 기제(旣濟)라 하였으니, 천하(天下) 만사(萬事)가 이미 이루어지는 때이다.
旣濟는 亨이 小니 利貞하니 初吉하고 終亂하니라.
기제(旣濟)는 형통(亨通)함이 작으니 정(貞)함이 이로우니, 처음에는 길(吉)하고 끝에는 혼란하다.
【本義】 (亨小)[小亨]하고,
【본의】 조금 형통(亨通)하고,
【傳】 旣濟之時에 大者旣已亨矣로되 小者尙有[一有未字]亨也라 雖旣濟之時라도 不能无小未亨也니 小字在下하니 語當然也라 若言小亨이면 則爲亨之小也라 利貞은 處旣濟之時[一无之時字]하여 利在貞固以守之也라 初吉은 方濟之時也요 終亂은 濟極則反也라.
기제(旣濟)의 때에 큰 것은 이미 형통(亨通)하였으나 작은 것은 아직 형통(亨通)할 것이 있다. 비록 기제(旣濟)의 때라도 조금 형통(亨通)하지 못한 것이 없지 않으니, 소자(小字)가 아래에 있으니, 말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만약 소형(小亨)이라고 말하면 형통(亨通)함이 작음이 된다. ‘이정(利貞)’은 기제(旣濟)의 때에 처하여 이로움이 정고(貞固)히 지킴에 있는 것이다. 처음에 길(吉)함은 막 이룰 때요, 끝에 혼란함은 이룸이 지극하면 뒤집혀지는 것이다.
【本義】 旣濟는 事之旣成也라 爲卦水火相交하여 各得其用하고 六爻之位 各得其正이라 故爲旣濟라 亨小는 當爲小亨이라 大抵此卦及六爻占辭 皆有警戒之意하니 時當然也라.
기제(旣濟)는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괘(卦)됨이 물과 불이 서로 사귀어 각기 그 쓰임을 얻었고 여섯 효(爻)의 자리가 각기 그 바름을 얻었기 때문에 기제(旣濟)라 하였다. ‘형소(亨小)’는 마땅히 ‘소형(小亨)’이 되어야 한다. 대저 이 괘(卦)와 여섯 효(爻)의 점사(占辭)에 모두 경계하는 뜻이 있으니, 때가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彖曰 旣濟亨은 小者亨也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기제(旣濟)가 형통(亨通)함은 작은 것이 형통(亨通)함이니,
【本義】 濟下에 疑脫小字라.
제(濟) 아래에 소자(小字)가 빠진 듯하다.
利貞은 剛柔正而位當也일새라.
정(貞)함이 이로움은 강유(剛柔)가 바르고 자리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傳】 旣濟之時에 大者固[一无固字]已亨矣요 唯有小者[一有未字]亨也라 時旣濟矣면 固宜貞固以守之라 卦才剛柔正當其位하니 當位者는 其常也니 乃正固之義니 利於如是之貞[一有正字]也라 陰陽이 各得正位하니 所以爲旣濟也라.
기제(旣濟)의 때에 큰 것은 이미 형통(亨通)하였고, 오직 작은 것이 형통(亨通)하여야 하는 것이다. 때가 이미 이루어지면 진실로 마땅히 정고(貞固)히 지켜야 한다. 괘(卦)의 재질이 강유(剛柔)가 바로 그 자리에 마땅하니, 자리에 마땅함은 떳떳함이니, 바로 정고(正固)의 뜻이니, 이와 같은 정(貞)함이 이로운 것이다. 음양(陰陽)이 각기 정위(正位)를 얻었으니, 이 때문에 기제(旣濟)가 된 것이다.
【本義】 以卦體言이라.
괘체(卦體)로써 말하였다.
初吉은 柔得中也요.
처음에 길(吉)함은 유(柔)가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요,
【傳】 二以柔順文明而得中이라 故能成旣濟之功이라 二居下體하니 方濟之初也而又善處라 是以吉也라.
이(二)가 유순문명(柔順文明)으로 중(中)을 얻었기 때문에 기제(旣濟)의 공(功)을 이룬 것이다. 이(二)가 하체(下體)에 거하였으니, 막 이룰 초기이며 또 잘 대처하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本義】 指六二라.
육이(六二)를 가리킨 것이다.
終止則亂은 其道窮也라.
종(終)에 멈추면 혼란함은 그 도(道)가 궁극하기 때문이다.”
【傳】 天下之事 不進則退하여 无一定之理라 濟之終에 不進而止矣면 无常止也니 衰亂至矣니 蓋其道已窮極也라 九五之才 非不善也로되 時極道窮하니 理當必變也라 聖人至此면 奈何오 曰[一无曰字]唯聖人은 爲能通其變於未窮하여 不使至於極也니 堯舜是也라 故有終而无亂이라.
천하(天下)의 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서 일정한 이치가 없다. 제(濟)의 마침에 나아가지 않고 멈추면 떳떳한 멈춤이 아니니, 쇠란(衰亂)이 이르게 되니, 그 도(道)가 이미 궁극한 것이다. 구오(九五)의 재질은 불선(不善)한 것이 아니나 때가 극(極)에 이르고 도(道)가 궁하니, 이치에 마땅히 반드시 변한다. 성인(聖人)이 이에 이르면 어찌 하는가? 오직 성인(聖人)은 궁극하지 않을 때에 변통하여 극(極)에 이르지 않게 하니, 요(堯)·순(舜)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종(終)이 있고 혼란함이 없었던 것이다.
象曰 水在火上이 旣濟니 君子以하여 思患而豫防之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물이 불 위에 있음이 기제(旣濟)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환난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한다.”
【傳】 水火旣交하여 各得其用이 爲旣濟라 時當旣濟면 唯慮患害之生이라 故思而豫防하여 使不至於患也라 自古로 天下旣濟而致禍亂者는 蓋不能思慮而豫防也일새라.
물과 불이 이미 사귀어 각기 그 쓰임을 얻음이 기제(旣濟)이다. 기제(旣濟)의 때를 당하였으면 오직 환난과 해가 생김을 우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미리 방비해서 화(禍)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천하(天下)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화란(禍亂)을 이룬 것은 사려하여 미리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初九는 曳其輪하며 濡其尾면 无咎리라.
초구(初九)는 수레바퀴를 뒤로 끌며 꼬리를 적시면 허물이 없으리라.
【傳】 初以陽居下하여 上應於四하고 又火體니 其進之志銳也라 然時旣濟矣어늘 進不已則及於悔咎[一作吝]라 故曳其輪, 濡其尾라야 乃得无咎라 輪은 所以行이니 倒曳之하여 使不進也라 獸之涉水에 必揭其尾하나니 濡其尾則不能濟라 方旣濟之初하여 能止其進이면 乃得无咎니 不知已則至於咎也라.
초(初)는 양(陽)으로서 아래에 거하여 위로 사(四)에 응(應)하고 또 화(火)의 체(體)이니, 그 나아가려는 뜻이 예리하다. 그러나 때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나아감을 그치지 않으면 뉘우침과 허물에 미친다. 그러므로 수레바퀴를 뒤로 끌고 꼬리를 적셔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굴러가는 것이니, 거꾸로 끌어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짐승은 물을 건널 때에 반드시 꼬리를 드니, 꼬리를 적시면 건너가지 못한다. 기제(旣濟)의 초기를 당하여 그 나아감을 그치면 이에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그칠 줄 모르면 허물에 이른다.
【本義】 輪은 在下하고 尾는 在後하니 初之象也라 曳輪則車不前이요 濡尾則狐不濟라 旣濟之初에 謹戒如是면 无咎之道니 占者如是면 則无咎矣리라.
수레바퀴는 아래에 있고 꼬리는 뒤에 있으니, 초(初)의 상(象)이다. 수레바퀴를 뒤로 끌면 수레가 전진하지 못하고 꼬리를 적시면 여우가 건너가지 못한다. 기제(旣濟)의 초기에 삼가고 경계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무구(无咎)의 도(道)이니,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이 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象曰 曳其輪은 義无咎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수레바퀴를 뒤로 끎은 의리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旣濟之初而能止其進이면 則不至於極이니 其義自无咎也라.
기제(旣濟)의 초기에 나아감을 그치면 극(極)에 이르지 않으니, 그 의리에 스스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六二는 婦喪其茀이니 勿逐하면 七日에 得하리라.
육이(六二)는 부인(婦人)이 그 가리개를 잃었으니, 쫓지 않으면 7일에 얻으리라.
【本義】 勿逐이라도,
【본의】 쫓아가지 않더라도,
【傳】 二以文明中正之德으로 上應九五剛陽中正之君하니 宜得行其志也라 然五旣得尊位하고 時已旣濟하여 无復進而有爲矣니 則於在下賢才에 豈有求用之意리오 故二不得遂其行也라 自古로 旣濟而能用人者鮮矣니 以唐太宗之用言으로도 尙怠於終이어든 況其下者乎아 於斯時也엔 則剛中反爲中滿이요 坎離乃爲相戾矣라 人能識時知變이면 則可以言易矣리라 二는 陰也라 故以婦言이라 茀은 婦人出門以自蔽者也니 喪其茀이면 則不可行矣라 二不爲五之求用이면 則不得行이니 如婦之喪茀也라 然中正之道를 豈可廢也리오 時過則行矣라 逐者는 從物也니 從物則失其素守라 故戒勿逐하니 自守不失이면 則七日當復得也라 卦有六位하니 七則變矣니 七日得은 謂時變也라 雖不爲上所用이나 中正之道 无終廢之理하니 不得行於今이면 必行於異時也니 聖人之[一有爲字]勸戒深矣로다.
이(二)는 문명중정(文明中正)한 덕(德)으로써 위로 구오(九五)의 강양중정(剛陽中正)한 군주(君主)에게 응(應)하니, 마땅히 그 뜻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오(五)가 이미 존위(尊位)를 얻고 때가 이미 기제(旣濟)여서 다시 나아가 할 일이 없으니, 아래에 있는 현재(賢才)에 대하여 어찌 구하여 쓰려는 뜻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二)가 그 행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미 이루고서 사람을 등용한 이가 드무니, 당태종(唐太宗)처럼 간언(諫言)을 받아들인 사람도 오히려 끝에는 게을러졌으니, 하물며 그보다 아래인 자에 있어서랴. 이러한 때에는 강중(剛中)이 도리어 마음속에 자만함이 되고 감리(坎離)가 서로 어그러짐이 된다. 사람이 때를 알고 변통할 줄을 알면 역(易)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二)는 음(陰)이기 때문에 부인(婦人)으로 말하였다. 불(茀)은 부인이 문을 나갈 때에 스스로 가리는 것이니, 가리개를 잃으면 갈 수가 없다. 이(二)가 오(五)에게 구하여 쓰임이 되지 못하면 행할 수 없으니, 부인이 가리개를 상실한 것과 같다. 그러나 중정(中正)의 도(道)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때가 지나면 행하게 된다. 축(逐)은 사물을 따르는 것이니, 사물을 따르면 평소의 지킴을 잃는다. 그러므로 쫓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스스로 지키고 잃지 않으면 7일에 마땅히 다시 얻게 될 것이다. 괘(卦)에는 여섯 자리가 있으니 일곱이면 변하니, 7일에 얻는다는 것은 때가 변함을 말한 것이다. 비록 윗사람에게 쓰여지지 않으나 중정(中正)의 도(道)가 끝내 폐해질 이치가 없으니, 지금에 행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때에 행해질 것이니, 성인(聖人)의 권계(勸戒)하심이 깊도다.
【本義】 二以文明中正之德으로 上應九五剛陽中正之君하니 宜得行其志로되 而九五居旣濟之時하여 不能下賢以行其道라 故二有婦喪其茀之象이라 茀은 婦車之蔽니 言失其所以行也라 然中正之道 不可終廢니 時過則行矣라 故又有勿逐而自得之戒하니라.
이(二)가 문명중정(文明中正)한 덕(德)으로써 위로 구오(九五)의 강양중정(剛陽中正)한 군주(君主)에게 응(應)하니, 마땅히 그 뜻을 행할 것이나 구오(九五)가 기제(旣濟)의 때에 거하여 현자(賢者)에게 몸을 낮추어 그 도(道)를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二)는 부인이 가리개를 잃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불(茀)은 부인의 수레의 가리개이니, 행할 바를 잃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중정(中正)의 도(道)는 끝내 폐해질 수 없으니, 때가 지나면 행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또 쫓지 않아도 스스로 얻는다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象曰 七日得은 以中道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7일에 얻음은 중도(中道)를 쓰기 때문이다.”
【傳】 中正之道 雖不爲時所用이나 然无終不行之理라 故喪茀七日에 當復得이니 謂自守其中이면 異時必行也라 不失其中이면 則正矣라.
중정(中正)의 도(道)가 비록 때에 쓰여지지 않으나 끝내 행해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불(茀)을 잃은 지 7일 만에 다시 얻는 것이니, 스스로 중(中)을 지키면 다른 때에 반드시 행해짐을 말한 것이다. 중(中)을 잃지 않으면 정(正)이 된다.
九三은 高宗이 伐鬼方하여 三年克之니 小人勿用이니라.
구삼(九三)은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만에 이겼으니, 소인(小人)을 쓰지 말아야 한다.
【傳】 九三은 當旣濟之時하여 以剛居剛하니 用剛之至也라 旣濟而用剛如是는 乃高宗伐鬼方之事니 高宗은 必商之高宗이리라 天下之事旣濟而遠伐暴亂也라 威武可及而以救民爲心은 乃王者之事也니 唯聖賢之君則可요 若騁威武하여 忿不服, 貪土地면 則殘民肆欲也라 故戒不可用小人하니라 小人爲之는 則以貪忿私意也니 非貪忿이면 則莫肯爲也라 三年克之는 見其勞憊之甚이라 聖人이 因九三當旣濟而用剛하여 發此義以示人하시니 爲法, 爲戒 豈淺見所能及也리오.
구삼(九三)은 기제(旣濟)의 때를 당하여 강(剛)으로서 강위(剛位)에 거하였으니, 강(剛)을 씀이 지극하다. 기제(旣濟)에 강(剛)을 씀이 이와 같으면 이는 바로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한 일이니, 고종(高宗)은 반드시 상(商)나라의 고종(高宗)일 것이다. 천하(天下)의 일이 이미 이루어짐에 포악한 이와 혼란한 이를 멀리 정벌하는 것이다. 위엄과 무력이 미칠 수 있어 백성을 구제함을 마음으로 삼음은 바로 왕자(王者)의 일이니 오직 성현(聖賢)의 군주(君主)만이 가능(可能)하고, 만일 위엄과 무력에 치달려 복종하지 않음에 분노하고 토지를 탐낸다면 백성을 해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小人)을 쓰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소인(小人)이 행함은 탐하고 분노하는 사사로운 뜻으로 하는 것이니, 탐함과 분노가 아니면 즐겨하지 않는다. 3년만에 이겼다는 것은 수고롭고 피곤함이 심함을 나타낸 것이다. 성인(聖人)이 구삼(九三)이 기제(旣濟)를 당하여 강(剛)을 씀으로 인해서 이 뜻을 발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으니, 법(法)을 삼음과 경계를 삼음이 어찌 천박한 식견(識見)으로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本義】 旣濟之時에 以剛居剛하니 高宗伐鬼方之象也라 三年克之는 言其久而後克이니 戒占者不可輕動之意라 小人勿用은 占法이 與師上六同하니라.
기제(旣濟)의 때에 강(剛)으로서 강위(剛位)에 거하였으니,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한 상(象)이다. 3년만에 이겼다는 것은 오랜 뒤에 이겼음을 말한 것이니, 점치는 이에게 가벼이 동하지 말라는 뜻을 경계한 것이다. 소인(小人)을 쓰지 말라는 것은 점치는 법이 사괘(師卦)의 상육효(上六爻)와 같다.
象曰 三年克之는 憊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3년 만에 이김은 피곤한 것이다.”
【傳】 言憊하여 以見其事之至難이라 在高宗爲之則可어니와 无高宗之心이면 則貪忿以殃[一作殘]民也라.
피곤함을 말하여 그 일이 지극히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고종(高宗)에 있어서는 가(可)하나 고종(高宗)의 마음이 없다면 탐함과 분노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다.
六四는 (繻)[濡]에 有衣袽하고 終日戒니라.
육사(六四)는 젖음에 옷과 헌옷을 장만해 두고 종일토록 경계함이다.
【本義】 有衣袽하여,
【본의】 옷과 헌옷을 장만하여
【傳】 四在濟卦而水體라 故取舟爲義하니라 四는 近君之位하니 當其任者也니 當旣濟之時하여 以防患慮變爲急이라 繻는 當作濡니 謂渗漏也라 舟有罅漏면 則塞以衣袽하나니 有衣袽以備濡漏하고 又終日戒懼不怠하니 慮患을 當如是也라 不言吉은 方免於患也일새라 旣濟之時에 免患則足矣니 豈復有加也리오.
사(四)는 제괘(濟卦)에 있고 물의 체(體)이므로 배를 취하여 뜻으로 삼았다. 사(四)는 군주(君主)와 가까운 자리이니, 그 임무를 담당한 이이니, 기제(旣濟)의 때를 당하여 환난(患難)을 방지하고 변을 생각함을 급함으로 여겨야 한다. 수(繻)는 마땅히 유(濡)가 되어야 하니, 물이 샘을 이른다. 배가 틈이 있어 물이 새면 의여(衣袽)로 막으니, 의여(衣袽)를 장만해 두어 새는 것에 대비하고 또 종일토록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태만하지 않으니, 환난(患難)을 염려하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길(吉)함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이제 막 환난(患難)에서 면했기 때문이다. 기제(旣濟)의 때에 환난(患難)을 면하면 족하니, 어찌 다시 더함이 있겠는가.
【本義】 旣濟之時에 以柔居柔하니 能預備而戒懼者也라 故其象如此하니라 程子曰 繻는 當作濡라 하시니라 衣袽는 所以塞舟之罅漏라.
기제(旣濟)의 때에 유(柔)로서 유위(柔位)에 거하였으니, 미리 대비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이 이와 같은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수(繻)는 마땅히 유(濡)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의여(衣袽)는 배의 틈에 새는 곳을 막는 것이다.
象曰 終日戒는 有所疑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종일토록 경계함은 의심할 바가 있어서이다.”
【傳】 終日戒懼는 常疑患之將至也라 處旣濟之時하여 當畏愼如是也라.
종일토록 경계하고 두려워함은 항상 환난(患難)이 장차 이를까 의심해서이다. 기제(旣濟)의 때에 처하여 마땅히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九五는 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實受其福이니라.
구오(九五)는 동쪽 이웃의 소를 잡음이 서쪽 이웃의 검소한 제사(祭祀)가 실제로 그 복(福)을 받음만 못하다.
【傳】 五中實은 孚也요 二虛中은 誠也라 故皆取祭祀爲義하니라 東隣은 陽也니 謂五요 西隣은 陰也니 謂二라 殺牛는 盛祭也요 禴은 薄祭也니 盛不如薄者는 時不同也일새라 二五皆有孚誠中正之德이로되 二在濟下하여 尙有進也라 故受福이요 五處濟極하여 无所進矣니 以至誠中正守之면 苟未至於反耳라 理无極而終不反者也니 已至於極이면 雖善處나 无如之何矣라 故爻象에 唯言其時也하니라.
오(五)가 가운데가 실(實)함은 믿음이요, 이(二)가 가운데가 허(虛)함은 정성이다. 그러므로 제사(祭祀)를 취하여 뜻으로 삼은 것이다. 동쪽 이웃은 양(陽)이니 오(五)를 이르고, 서쪽 이웃은 음(陰)이니 이(二)를 이른다. 소를 잡음은 성대한 제사(祭祀)이고 약(禴)은 박한 제사(祭祀)이니, 성대함이 박함만 못한 것은 때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모두 부성(孚誠)과 중정(中正)의 덕(德)이 있으나 이(二)는 기제(旣濟)의 아래에 있어서 아직 나아갈 곳이 있으므로 복(福)을 받고, 오(五)는 기제(旣濟)의 극(極)에 처하여 나아갈 곳이 없으니, 지성(至誠)과 중정(中正)으로 지키면 진실로 뒤집힘에 이르지 않을 뿐이다. 이치는 극(極)에 이르고서 끝내 뒤집히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미 극(極)에 이르렀으면 비록 잘 대처하나 어쩔 수가 없다. 그러므로 효(爻)와 상(象)에 오직 그 때를 말한 것이다.
【本義】 東은 陽이요 西는 陰이니 言九五居尊而時已過하여 不如六二之在下而始得時也라 又當文王與紂之事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彖辭의 初吉終亂도 亦此意也라.
동(東)은 양(陽)이요 서(西)는 음(陰)이니, 구오(九五)가 존위(尊位)에 거하고 때가 이미 지나서 육이(六二)가 아래에 있어 처음 때를 얻음만 못함을 말한 것이다. 또 문왕(文王)과 주왕(紂王)의 일에 해당하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단사(彖辭)의 처음은 길(吉)하고 끝은 혼란함도 이러한 뜻이다.
象曰 東隣殺牛 不如西隣之時也니 實受其福은 吉大來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동쪽 이웃의 소를 잡음이 서쪽 이웃의 때에 맞음만 못하니, 실제로 그 복(福)을 받음은 길(吉)함이 크게 오는 것이다.”
【傳】 五之才德이 非不善이로되 不如二之時也라 二在下하여 有進之時라 故中正而孚면 則其吉大來니 所謂受福也라 吉大來者는 在旣濟之時하여 爲大來也니 亨小初吉이 是也라.
오(五)의 재주와 덕(德)이 불선(不善)한 것은 아니나 이(二)의 때에 맞음만 못한 것이다. 이(二)는 아래에 있어 나아감이 있는 때이므로 중정(中正)하고 믿으면 길(吉)함이 크게 오니, 이른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길(吉)함이 크게 온다는 것은 기제(旣濟)의 때에 있어 크게 오는 것이니, 형통(亨通)함이 작고 처음에는 길(吉)함이 이것이다.
上六은 濡其首라 厲하니라.
상육(上六)은 그 머리를 적심이니 위태롭다.
【傳】 旣濟之極엔 固不安而危也요 又陰柔處之而在險體之上이라 坎爲水요 濟亦取水義라 故言其窮至於濡首하니 危可知也라 旣濟之終而小人處之면 其敗壞를 可立而待也니라.
기제(旣濟)의 극(極)에는 진실로 편안하지 못하여 위태로우며 또 음유(陰柔)가 처하고 험체(險體)의 위에 있다. 감(坎)은 물이 되고 제(濟) 또한 물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궁극함이 머리를 적심에 이른다고 말하였으니, 위태로움을 알 수 있다. 기제(旣濟)의 끝에 소인(小人)이 처하면 패(敗)하고 무너짐을 서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本義】 旣濟之極이요 險體之上而以陰柔處之하니 爲狐涉水而濡其首之象이라 占者不戒는 危之道也라.
기제(旣濟)의 극(極)이고 험체(險體)의 위인데 음유(陰柔)로서 처하였으니, 여우가 물을 건너다가 머리를 적신 상(象)이 된다. 점치는 이가 경계하지 않으면 이는 위태로운 길이다.
象曰 濡其首厲 何可久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머리를 적셔 위태로움이 어찌 장구(長久)하겠는가?”
【傳】 旣濟之窮하여 危至於濡首하니 其能長久乎아.
기제(旣濟)가 궁극하여 위태로움이 머리를 적심에 이르렀으니, 어찌 능히 장구(長久)하겠는가.

63. 기제(旣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