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미제(未濟)
【傳】 未濟는 序卦에 物不可窮也라 故受之以未濟하여 終焉이라 하니라 旣濟矣면 物之窮也니 物窮而不變이면 則无不已之理하니 易者는 變易而不窮也라 故旣濟之後에 受之以未濟而終焉하니라 未濟則未窮也니 未窮則有生生之義라 爲卦 離上坎下하여 火在水上하니 不相爲用이라 故爲未濟라.
미제괘(未濟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사물(事物)은 다할 수 없으므로 미제괘(未濟卦)로 받아서 마쳤다.” 하였다. 이미 이루면 사물이 다한 것이니, 사물이 다하였는데도 변치 않으면 그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역(易)은 변역(變易)하여 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제괘(旣濟卦)의 뒤에 미제괘(未濟卦)로써 받아 마친 것이다. 아직 이루지 않았으면 다하지 않은 것이니, 다하지 않으면 생성하고 생성하는 뜻이 있다. 괘(卦)됨이 이(離)가 위에 있고 감(坎)이 아래에 있어 불이 물 위에 있으니, 서로 쓰임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제(未濟)라 한 것이다.
未濟는 亨하니 小狐汔濟하여 濡其尾니 无攸利하니라.
미제(未濟)는 형통(亨通)하니, 어린 여우가 건넘에 용감하여 그 꼬리를 적시니, 이로운 바가 없다.
【본의】 거의 건너가,
【傳】 未濟之時엔 有亨之理요 而卦才復有致亨之道하니 唯在愼處라 狐能度(渡)水로되 濡尾則不能濟하나니 其老者多疑畏라 故로 履冰而聽하니 懼其陷也요 小者則未能畏愼이라 故勇於濟라 汔은 當爲仡이니 壯勇之狀이라 書曰仡仡 勇夫라 하니라 小狐果於濟면 則濡其尾而不能濟也라 未濟之時에 求濟之道를 當至愼이면 則能亨이요 若如小狐之果면 則不能濟也니 旣不能濟면 无所利矣라.
미제(未濟)의 때에는 형통(亨通)할 이치가 있고 괘(卦)의 재질이 다시 형통(亨通)함을 이룰 도(道)가 있으니, 오직 신중히 처함에 있을 뿐이다. 여우는 물을 건너갈 수 있으나 꼬리를 적시면 건너가지 못하니, 늙은 여우는 의심과 두려움이 많기 때문에 얼음을 밟으면서 물소리를 들으니 빠질까 두려워해서요, 어린 여우는 두려워하고 삼가지 못하기 때문에 건넘에 용감한 것이다. 흘(汔)은 마땅히 흘(仡)이 되어야 하니, 장용(壯勇)한 모양이다. 《서경(書經)》에 “흘흘용부(仡仡勇夫)”라 하였다. 어린 여우가 건넘에 과감하면 꼬리를 적시어 건너지 못한다. 미제(未濟)의 때에 이루기를 구하는 방도를 마땅히 지극히 신중히 하면 형통(亨通)할 것이요, 만일 어린 여우처럼 과감히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미 이루지 못하면 이로운 바가 없는 것이다.
【本義】 未濟는 事未成之時也라 水火不交하여 不相爲用이요 卦之六爻 皆失其位라 故爲未濟라 汔은 幾也니 幾濟而濡尾는 猶未濟也라 占者如此면 何所利哉리오.
미제(未濟)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때이다. 물과 불이 사귀지 못하여 서로 쓰임이 되지 못하고, 괘(卦)의 여섯 효(爻)가 모두 제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미제(未濟)라 한 것이다. 흘(汔)은 거의이니, 거의 건너가서 꼬리를 적심은 건너가지 않음과 같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으면 어찌 이로운 바가 있겠는가.
彖曰 未濟亨은 柔得中也요,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미제(未濟)가 형통(亨通)함은 유(柔)가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요,
【傳】 以卦才言也라 所以能亨者는 以柔得中也니 五以柔居尊位하고 居剛而應剛하여 得柔之中也라 剛柔得中하니 處未濟之時하여 可以亨也라.
괘(卦)의 재질로 말하였다. 형통(亨通)할 수 있는 까닭은 유(柔)가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니, 오(五)가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고 강(剛)에 거하여 강(剛)과 응(應)하여 유(柔)의 중(中)을 얻었다. 강(剛)·유(柔)가 중도(中道)를 얻었으니, 미제(未濟)의 때에 처하여 형통(亨通)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指六五言이라.
육오(六五)를 가리켜 말하였다.
小狐汔濟는 未出中也요,
‘소호흘제(小狐汔濟)’는 험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요,
【傳】 據二而言也라 二以剛陽居險中하니 將濟者也요 又上應於五하니 險非可安之地요 五有當從之理라 故果於濟를 如小狐也라 旣果於濟라 故有濡尾之患하니 未能出於險中也라.
이(二)를 근거하여 말하였다. 이(二)가 강양(剛陽)으로 험한 가운데 거하였으니 장차 건너야 할 이이며 또 위로 오(五)와 응(應)하니, 험함은 편안한 위치가 아니요 오(五)가 마땅히 따를 이치가 있다. 그러므로 건넘에 과감하기를 어린 여우와 같이 하는 것이다. 이미 건넘에 과감하기 때문에 꼬리를 적시는 근심이 있으니, 험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濡其尾无攸利는 不續終也라.
꼬리를 적셔 이로운 바가 없음은 계속하여 끝마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傳】 其進銳者는 其退速하니 始雖勇於濟나 不能繼續而終之하니 无所往而利也라.
나아감이 빠른 이는 물러감도 속하니, 처음에는 비록 건넘에 용감하나 계속하여 끝마치지 못하니, 가는 곳마다 이로움이 없다.
雖不當位나 剛柔應也니라.
비록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나 강(剛)·유(柔)가 서로 응(應)한다.
【傳】 雖陰陽不當位나 然剛柔皆相應하니 當未濟而有與하니 若能重愼이면 則有可濟之理나 二以汔濟故로 濡尾也라 卦之諸爻가 皆不得位라 故爲未濟라 雜卦云 未濟는 男之窮也라 하니 謂三陽皆失位也라 斯義也를 聞之成都隱者로라.
비록 음(陰)·양(陽)이 자리에 마땅하지 않으나 강(剛)·유(柔)가 모두 서로 응(應)하니, 미제(未濟)를 당하여 응여(應與)가 있으니 만약 신중히 하면 이룰 수 있는 이치가 있다. 그러나 이(二)는 건넘에 용감하기 때문에 꼬리를 적시는 것이다. 괘(卦)의 여러 효(爻)가 모두 제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제(未濟)라 한 것이다. 〈잡괘전(雜卦傳)〉에 “미제(未濟)는 남자(男子)의 궁함이다.” 하였으니, 세 양(陽)이 모두 제자리를 잃었음을 이른 것이다. 이 뜻을 성도(成都)의 은자(隱者)에게 들었노라.
象曰 火在水上이 未濟니 君子以하여 愼辨物하여 居方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불이 물 위에 있음이 미제(未濟)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신중히 사물을 분별하여 제자리에 거하게 한다.”
【傳】 水火不交하여 不相濟爲用이라 故爲未濟라 火在水上은 非其處也라 君子觀其處不當之象하여 以愼處於事物하여 辨其所當하여 各居其方하나니 謂止於其所也라.
물과 불이 사귀지 못해서 서로 구제하여 쓰임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제(未濟)라 한 것이다. 불이 물 위에 있음은 제자리가 아니다. 군자(君子)가 처함이 마땅하지 않은 상(象)을 관찰하여 신중히 사물에 대처해서 그 마땅한 바를 분별하여 각기 그 방소(方所)에 거하게 하니, 제자리에 멈춤을 말한 것이다.
【本義】 水火異物이 各居其所라 故君子觀象而審辨之하나니라.
물과 불의 다른 물건이 각기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상(象)을 관찰하여 살펴 분별하는 것이다.
初六은 濡其尾니 吝하니라.
초육(初六)은 꼬리를 적셨으니, 부끄러우니라.
【傳】 六以陰柔在下하고 處險而應四하니 處險則不安其居요 有應則志行於上이라 然己旣陰柔요 而[一无而字]四非中正之才니 不能援之以濟也라 獸之濟水에 必揭其尾하나니 尾濡則不能濟니 濡其尾는 言不能濟也라 不度其才力而進하여 終不能濟면 可羞吝也라.
육(六)은 음유(陰柔)로서 아래에 있고 험함에 처하여 사(四)와 응(應)하니, 험함에 처하면 거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응(應)이 있으면 뜻이 위로 가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음유(陰柔)이고 사(四)가 중정(中正)의 재질이 아니니, 구원하여 구제하지 못한다. 짐승이 물을 건너갈 적에는 반드시 꼬리를 드는데 꼬리가 젖으면 건너가지 못하니, 꼬리를 적셨다는 것은 건너가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아가서 끝내 건너가지 못하면 부끄러울 만한 것이다.
【本義】 以陰居下하니 當未濟之初하여 未能自進이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음(陰)으로서 아래에 거하였으니, 미제(未濟)의 초기를 당하여 스스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濡其尾亦不知極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꼬리를 적심은 또한 알지 못함이 지극한 것이다.”
【傳】 不度其才力而進하여 至於濡尾는 是不知之極也라.
자신의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아가서 꼬리를 적심에 이름은 이는 알지 못함이 지극한 것이다.
【本義】 極字는 未詳이라 考上下韻컨대 亦不叶하니 或恐是敬字니 今且闕之로라.
극자(極字)는 미상(未詳)이다. 상하(上下)의 운(韻)을 상고해도 맞지 않으니, 혹 경자(敬字)일 듯하니, 이제 우선 빼놓는다.
九二는 曳其輪이면 貞하여 吉하리라.
구이(九二)는 수레바퀴를 뒤로 끌듯 급속(急速)히 하지 않으면 정(貞)하여 길(吉)하리라.
【本義】 曳其輪이니 貞이라 吉하리라.
【본의】 수레바퀴를 뒤로 끎이니, 정(貞)하여 길(吉)하리라.
【傳】 在他卦엔 九居二 爲居柔得中하여 无過剛之義也로되 於未濟엔 聖人深取卦象以爲戒하여 明事上恭順之道하시니라 未濟者는 君道艱難之時也라 五以柔處君位하고 而二乃剛陽之才로 而居相應之地하니 當用者也라 剛有陵柔之義하고 水有勝火之象이라 方艱難之時하여 所賴者는 才臣耳니 尤當盡恭順之道라 故戒曳其輪則得正而吉也라 倒曳其輪하여 殺(쇄)其勢하고 緩其進이니 戒用剛之過也니 剛過則好犯上[一无上字]而順不足이라 唐之郭子儀, 李晟이 當艱危未濟之時하여 能極其恭順하니 所以爲得正而能保其終吉也라 於六五則言其貞吉光輝하여 盡君道之善하고 於九二則戒其恭順하여 盡臣道之正하니 盡上下之道也라.
다른 괘(卦)에 있어서는 구(九)가 이(二)에 거함이 유(柔)에 거하고 중(中)을 얻음이 되어 지나치게 강(剛)한 뜻이 없으나 미제(未濟)에 있어서는 성인(聖人)이 깊이 괘상(卦象)을 취하여 경계해서 윗사람을 섬김에 공손히 하는 도리를 밝히셨다. 미제(未濟)는 군주(君主)의 도(道)가 간난(艱難)한 때이다. 오(五)가 유(柔)로서 군위(君位)에 처하였고, 이(二)가 강양(剛陽)의 재질로 서로 응(應)하는 위치에 처하였으니, 마땅히 쓰여질 것이다. 강(剛)은 유(柔)를 능멸하는 뜻이 있고 물은 불을 이기는 상(象)이 있다. 간난(艱難)한 때를 당하여 의뢰할 것은 재주 있는 신하이니, 더욱 마땅히 공순(恭順)한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레를 뒤로 끌듯하여 급속히 하지 않으면 정(正)을 얻어 길(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수레바퀴를 뒤로 끌어 그 세(勢)를 줄이고 그 나아감을 늦춰야 하니, 강(剛)을 쓰기를 지나치게 함을 경계한 것이니, 강(剛)함이 지나치면 윗사람을 범하기 좋아하여 순함이 부족하다.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성(李晟)은 어렵고 위태로운 미제(未濟)의 때를 당하여 공순(恭順)함을 다하였으니, 이 때문에 정(正)을 얻음이 되어 끝내 길(吉)함을 보존한 것이다. 육오(六五)에 있어서는 ‘정길광휘(貞吉光輝)’를 말하여 군도(君道)의 선(善)함을 다하였고, 구이(九二)에 있어서는 공순(恭順)히 할 것을 경계하여 신도(臣道)의 바름을 다하였으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本義】以九二應六五而居柔得中하니 爲能自止而不進하여 得爲下之正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구이(九二)로서 육오(六五)에 응(應)하고 유위(柔位)에 거하며 중(中)을 얻었으니, 스스로 멈추고 나아가지 않음이 되어 아랫사람이 된 바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九二貞吉은 中以行正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구이(九二)의 정길(貞吉)함은 중(中)으로서 정(正)을 행하기 때문이다.”
【傳】 九二得正而吉者는 以曳輪而得中道乃正也라.
구이(九二)가 정(正)을 얻어 길(吉)한 까닭은 수레바퀴를 뒤로 끌 듯하여 중도(中道)를 얻음이 바로 정(正)이기 때문이다.
【本義】 九居二는 本非正이로되 以中故로 得正也라.
구(九)가 이(二)에 거함은 본래 정(正)이 아니나 중(中)이기 때문에 정(正)을 얻은 것이다.
六三은 未濟에 征이면 凶하나 利涉大川하니라.
육삼(六三)은 미제(未濟)에 가면 흉하나 대천(大川)을 건넘은 이롭다.
【傳】 未濟征凶은 謂居險하여 无出險之用하니 而行則凶也니 必出險而後可征이라 三以陰柔不中正之才而居險하여 不足以濟하니 未有可濟之道出險之用而征은 所以凶也라 然未濟는 有可濟之道요 險終은 有出險之理라 上有剛陽之應하니 若能涉險而往從之면 則濟矣라 故利涉大川也라 然三之陰柔 豈能出險而往이리오 非時不可요 才不能也라.
‘미제정흉(未濟征凶)’은 험함에 거하여 험함을 벗어날 도구가 없으니, 가면 흉함을 말한 것이니, 반드시 험함을 벗어난 뒤에야 갈 수 있다. 삼(三)은 음유(陰柔)이고 중정(中正)하지 못한 재질로 험함에 거하여 구제할 수 없으니, 구제할 수 있는 방도와 험함을 벗어날 수 있는 용(用)이 없으면서 감은 흉한 소이(所以)이다. 그러나 미제(未濟)는 구제할 수 있는 도(道)가 있고, 험함이 끝남은 험함을 벗어날 이치가 있다. 위에 강양(剛陽)의 응(應)이 있으니, 만약 험함을 건너고 가서 따른다면 구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삼(三)의 음유(陰柔)가 어찌 험함을 벗어나 갈 수 있겠는가. 때가 불가(不可)한 것이 아니요, 재주가 능하지 못한 것이다.
【本義】 陰柔不中正으로 居未濟之時하니 以征則凶이라 然以柔乘剛하고 將出乎坎하니 有利涉之象이라 故其占如此라 蓋行者可以水浮요 而不可以陸走也라 或疑利字上에 當有不字라.
음유(陰柔)이고 중정(中正)하지 못함으로 미제(未濟)의 때에 거하였으니, 그대로 가면 흉하다. 그러나 유(柔)로서 강(剛)을 타고 장차 감(坎)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섭(利涉)의 상(象)이 있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길을 가는 이는 수상(水上)으로 떠갈 것이요 육지(陸地)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혹자는 이자(利字) 위에 마땅히 불자(不字)가 있어야 한다고 의심한다.
象曰 未濟征凶은 位不當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미제정흉(未濟征凶)’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傳】 三이 征則凶者는 以位不當也니 謂陰柔不中正하여 无濟險之才也라 若能涉險[一无險字]以從應이면 則利矣리라.
삼(三)이 가면 흉한 것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니, 음유(陰柔)로 중정(中正)하지 못하여 험함을 구제할 수 있는 재주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험함을 건너 응(應)을 따른다면 이로울 것이다.
九四는 貞이면 吉하여 悔亡하리니 震用伐鬼方하여 三年에야 有賞于大國이로다.
구사(九四)는 정(貞)하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지리니, 진동하여 귀방(鬼方)을 정벌해서 3년에야 대국(大國)에 상(賞)을 내리도다.
【傳】 九四는 陽剛으로 居大臣之位하고 上有虛中明順之主하며 又已出於險하고 未濟已過中矣니 有可濟之道也라 濟天下之艱難은 非剛健之才면 不能也라 九雖陽而居四라 故戒以貞固則吉而悔亡하니 不貞則不能濟니 有悔者[一无者字]也라 震은 動之極也라 古之人用力之甚者는 伐鬼方也라 故以爲義하니라 力勤而遠伐하여 至于三年然後에 成功而行大國之賞이니 必如是라야 乃能濟也라 濟天下之道는 當貞固如是니 四居柔라 故設此戒하니라.
구사(九四)는 양강(陽剛)으로 대신(大臣)의 지위에 거하고 위에 마음을 비운 밝고 순한 군주(君主)가 있으며 또 이미 험함에서 벗어났고 미제(未濟)가 이미 반을 지났으니, 구제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천하(天下)의 간난(艱難)을 구제함은 강건(剛健)한 재질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구(九)가 비록 양(陽)이나 사(四)에 거했으므로 정고(貞固)하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진다고 경계하였으니, 바르지 못하면 구제하지 못할 것이니,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진(震)은 동(動)하기를 지극히 함이다. 옛사람이 힘쓰기를 심히 한 것은 귀방(鬼方)을 정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뜻으로 삼은 것이다. 힘이 수고롭고 멀리 정벌하여 3년에 이른 뒤에야 성공하여 대국(大國)의 상(賞)을 행하니,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天下)를 구제하는 도(道)는 마땅히 정고(貞固)함이 이와 같아야 하니, 사(四)가 유(柔)에 거했으므로 이 경계를 베푼 것이다.
【本義】 以九居四는 不正而有悔也로되 能勉而貞이면 則悔亡矣라 然以不貞之資로 欲勉而貞인댄 非極其陽剛, 用力之久면 不能也라 故爲伐鬼方三年而受賞之象이라.
구(九)로서 사(四)에 거함은 정(正)이 아니어서 뉘우침이 있으나 힘쓰고 바르게 하면 뉘우침이 없어진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자질로 힘써 바르게 하고자 할진댄 양강(陽剛)을 지극히 하고 힘쓰기를 오래함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귀방(鬼方)을 정벌한 지 3년만에 상(賞)을 받는 상(象)이 된 것이다.
象曰 貞吉悔亡은 志行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정(貞)하면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짐은 뜻이 행해진 것이다.”
【傳】 如四之才 與時合而加以貞固면 則能行其志하여 吉而悔亡이라 鬼方之伐은 貞之至也라.
사(四)와 같은 재질이 때와 합하고 정고(貞固)함을 가하면 능히 그 뜻을 행해서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어질 것이다. 귀방(鬼方)을 정벌함은 정고(貞固)함이 지극한 것이다.
六五는 貞이라 吉하여 无悔니 君子之光이 有孚라 吉하니라.
육오(六五)는 바르므로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으니, 군자(君子)의 빛남이 진실함이 있다. 길(吉)하다.
【傳】 五는 文明之主로 居剛而應剛하고 其處得中하여 虛其心而陽爲之輔하니 雖以柔居尊이나 處之至正至善이니 无不足也라 旣得貞正이라 故吉而无悔라 貞은 其固有니 非戒也니 以此而濟면 无不濟也라 五는 文明之主라 故稱其光이라 君子德輝之盛而功實稱之는 有孚也라 上云吉은 以貞也니 柔而能貞은 德之吉也요 下云吉은 以功也니 旣光而有孚면 時可濟也라.
오(五)는 문명(文明)의 주체로 강(剛)에 거하고 강(剛)에 응(應)하며 그 처함이 중(中)을 얻어서 마음을 비워 양(陽)이 보필해 주니, 비록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였으나 처하기를 지극히 바르게 하고 지극히 선(善)하게 하니, 부족함이 없다. 이미 정정(貞正)함을 얻었기 때문에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정(貞)은 고유(固有)한 것이니 경계함이 아니니, 이와 같이 하여 구제하면 구제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오(五)는 문명(文明)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 빛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덕휘(德輝)가 성하고 공(功)이 실제로 이에 걸맞음은 진실함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길(吉)함은 정(貞)하기 때문이니 유(柔)하면서 정(貞)함은 덕(德)의 길(吉)함이요, 아래에 말한 길(吉)함은 공(功) 때문이니, 이미 빛나고 진실함이 있으면 당시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以六居五는 亦非正也나 然文明之主 居中應剛하여 虛心以求下之助라 故得貞而吉且无悔하고 又有光輝之盛하여 信實而不妄하니 吉而又吉也라.
육(六)으로서 오(五)에 거함은 역시 정(正)이 아니나 문명(文明)의 주체로 중(中)에 거하고 강(剛)에 응(應)하여 마음을 비워 아랫사람의 도움을 구한다. 그러므로 정(貞)을 얻어 길(吉)하고 또 뉘우침이 없으며, 또 광휘(光輝)의 성함이 있어 신실하여 망령되지 않으니, 길(吉)하고 또 길(吉)하다.
象曰 君子之光은 其暉吉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군자(君子)의 빛남은 그 빛이 길(吉)한 것이다.”
【傳】 光盛則有暉니 暉는 光之散也라 君子積充而光盛하여 至於有暉는 善之至也라 故重云吉하니라.
빛남이 성하면 휘(暉)가 있으니, 휘(暉)는 빛의 발산이다. 군자(君子)가 쌓고 충만하여 빛남이 성해서 휘(暉)가 있음에 이름은 선(善)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 길(吉)하다고 말한 것이다.
【本義】 暉者는 光之散也라.
휘(暉)는 빛의 발산이다.
上九는 有孚于飮酒면 无咎어니와 濡其首면 有孚에 失是하리라.
상구(上九)는 믿음을 두고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지만 머리를 적시듯 지나치면 유부(有孚)에 옳음을 잃으리라.
【本義】 有孚于飮酒니 无咎어니와 濡其首면 有孚하여,
【본의】 믿음을 두고 술을 마심이니 허물이 없지만 머리를 적시듯 지나치면 너무 자신(自信)하여
【傳】 九以剛在上하니 剛之極也요 居明之上하니 明之極也라 剛極而能明이면 則不爲躁而爲決이니 明能燭理요 剛能斷義라 居未濟之極하여 非得濟之位면 无可濟之理니 則當樂天順命而已라 若否終則有傾은 時之變也요 未濟則无極而自濟之理라 故止爲未濟之極이니 至誠安於義命而自樂이면 則可无咎라 飮酒는 自樂也니 不樂其處면 則忿躁隕穫이니 入于凶咎矣요 若從樂而耽肆過禮하여 至濡其首면 亦非能安其處也라 有孚는 自信于中也요 失是는 失其宜也니 如是則於有孚爲失也라 人之處患難에 知其无可奈何而放意不反者는 豈安於義命者哉리오.
구(九)는 강(剛)으로서 위에 있으니 강(剛)함이 지극하고, 밝음의 위에 거하였으니 밝음이 지극하다. 강(剛)함이 지극하면서도 밝으면 조급함이 되지 않고 결단함이 되니, 밝으면 사리를 밝힐 수 있고 강(剛)하면 의리(義理)로 결단할 수 있다. 미제(未濟)의 극(極)에 거하여 구제할 수 있는 지위를 얻지 않으면 구제할 수 있는 이치가 없으니, 마땅히 하늘을 즐거워하고 명(命)을 순히 할 뿐이다. 비(否)가 끝나면 기욺이 있는 것은 때가 변했기 때문이요, 미제(未濟)는 극(極)이 되었다고 하여 스스로 구제할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미제(未濟)의 극(極)이 되니, 지성(至誠)으로 의(義)와 명(命)을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즐거워하면 허물이 없을 수 있다. 술을 마심은 스스로 즐거워함이니, 그 처함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분하고 조급하여 곤궁할 것이니, 흉함과 허물에 들어갈 것이요, 만약 방종하여 즐거움을 따라 즐기고 방사하여 예(禮)를 지나쳐서 머리를 적심에 이르듯 한다면 역시 처함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유부(有孚)’는 스스로 마음속에 믿는 것이요 ‘실시(失是)’는 그 마땅함을 잃는 것이니, 이와 같으면 유부(有孚)에 잃음이 된다. 사람이 환난(患難)에 처함에 어찌할 방도가 없음을 알고서 뜻을 방탕히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어찌 의(義)와 명(命)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겠는가.
【本義】 以剛明으로 居未濟之極하여 時將可以有爲而自信自養以俟命하니 无咎之道也라 若縱而不反하여 如狐之涉水而濡其首면 則過於自信而失其義矣라.
강명(剛明)으로 미제(未濟)의 극(極)에 거하여 때가 장차 할 수 있으며 스스로 믿고 스스로 기르면서 명(命)을 기다리니, 무구(无咎)의 도(道)이다. 만약 방종하고 돌아오지 아니하여 여우가 물을 건너다가 머리를 적시듯이 한다면 스스로 믿기를 지나치게 하여 의리(義理)를 잃을 것이다.
象曰 飮酒濡首 亦不知節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술을 마셔 머리를 적심은 또한 절제를 모르는 것이다.”
【傳】 飮酒至於濡首는 不知節之甚也라 所以至如是는 不能安義命也니 能安則不失其常矣리라.
술을 마셔 머리를 적심에 이르는 것은 절제할 줄을 모름이 심한 것이다. 이와 같음에 이른 까닭은 의(義)와 명(命)을 편안히 여기지 못해서이니, 편안히 여긴다면 그 평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64. 미제(未濟)
드디어 괘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