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30분. 필암서원 서생 몇이서 붓글씨를 열심히 쓰고 있다. 거기서 나는 할일(체본을 써 주는 일)을 다 하고 나니 무료하다. 뭔가 재밌는 일이 없을까 하다가 돌쇠님이 생각이 나서 손전화를 가만히 해 본다.
"어딘가?"
"형님 댁 뒤 안골 산이요."
"뭐라구?"
""형님 할아버지 산소쯤 내려오고 있다구요."
"나 12시쯤 끝나는디 워짤란가?"
"듀리언님 댁에 있을랑께 글로 오시오잉."
"그럼세."
그때부터 나는 바쁘다. 마음이 온통 거기에 가 있다. 서예 뒷설거지하는 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평소에 모셔다드리던 노강선생도 버리고(?) 그냥 달아난다. 부리나케 집에 와 들어서니 우리집 입구에 웬 노란 마티즈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내 주차 공간은 용케도 남겨두셨다. 차를 대고 듀리언님 댁에 들어서니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신다.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아마 듀리언님과 돌쇠님이 있으리라. 목소리 큰 걸 보면 안다. 들어가 앉으며 보니 함담님이 아닌가? 평소에 쓰던 모자를 벗어서 내가 잠깐 할아버지로 착각. 함담님 실례했슴다. 용서하시기를............
주저앉으니 조그만 상에 부침개가 있고 가용주가 한 병 있다. 벌써 몇 잔씩 드셨나 보다. 후래자삼배라고 나는 세 잔을 자진해서 마신다. 그랬더니 듀리언님 장끼가 또 나온다. 세 잔으로는 안 되니 다섯 잔 홀수로 더 마시란다. 그럴 수밖에. 밥도 먹으란다. 내 대답 왈,
"저는 아침 저녁만 먹고 점심은 건너뛰거든요."
돌쇠님 말씀.
"듀리언님은 점심 건너뛰면 큰일 나요."
지난 여름, 월성계곡 탐사 때를 기억하시는 거다. 내가 곤역을 치룬 일 말이다. 그 토종닭이 빨리 익지를 않아서 참지 못하고 라면 끓이는 일까지 벌어졌지 않은가! 듀리언님은 지난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끼니를 건너뛴 적이 없다고 궁시렁궁시렁거렸지 않은가!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그걸 돌쇠님이 기억하시는 거다.
그래서 밥들을 먹는데, 나만 빼고, 그런데 함담님이 한사코 안 먹겠단다. 밥은 이미 왔는데........ 할 수 없이 그 밥이 내 차지가 되고 말아 나는 아뭇소리도 못하고 기냥 먹어 두었다. 나중에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우리 두령님 고생하시는데 위문공연 가 봅시다. 어때요?" 내 말.
돌쇠님 왈,
"좋지요. 가지요."
그런데 듀리언님과 함담님은 시큰둥이다. 함담님은 어부인과 선약이 있단다. 듀리언님은 결국 가기로 동의. 돌쇠님 의리의 사나이답게 마법사님을 챙기신다. 합류하러 출발하셨단다. 보해 공장 입구에서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드뎌 마법사님 도착 합류. 그래서 우리는 출발. 함담님께서 댁으로 가시는 동안 마음을 바꾸신 모양이다. 댁에 가서 허락을 받아얀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유명한 약술을 보러 상오리행. 약술 구경은 시켜 줘도 주시지는 않는단다. 그래서 일찍엄치 침 안 삼키기로 하고 나니 마음은 편하다. 욕심을 버렸으니까.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집단장이 깔끔하다. 마당에는 대추가 마르고 있고, 사과나무 한 그루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울타리쪽에는 적하수오가 한창 피어 있어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이거도 보고 저거도 보고 분재도 보고 뒷뜰에 갔더니 철 늦게 배초향이 만발해 있고, 듣고도 그만 잊어버린 귀한 꽃이 피어 있다. 함담님 어부인께서 주시는 몸에 좋다는 음료를 마시고는 마지막으로 보물창고행. 연 문 사이로 들여다보다가 눈이 화등잔만큼 커지고 말았다. 세상에나 값으로 칠 수도 없다는 유리병들이 저마다 뭔가를 안고서는 시위를 하는데 그저 탄성만 나올 뿐이다. 그래서 허락을 받고 찰칵을 두 컷만 했다. 염치가 없어서 더는 못하겠더만요. 그게 자유갤러리에 올라 있는 백하수오주와 동충하초주가 바로 그들이다.
대추가 퍼레이드 중
울금
차 두 대가 드뎌 두령님을 향해 출발. 한재골을 넘어 담양 외각도로를 타고 메타세콰이어가 늘어선 길을 지나 순창행. 제일 빠쁜 이가 돌쇠님이다. 아니 돌쇠님 손전화다. 돌쇠님 거 손전화 두령님 거 손전화가 한참 도킹 중. 함담님 차는 잘 달려서 늘상 저만치 달려가버린다. 그러다가는 길가에 대기하기가 여러 번. 겨우겨우 우리는 따라간다. 우여곡절 끝에 도로가에 도착하고 보니 산 중턱에 두령님 노가다<?>하시는 목재 구조물이 보인다. 그런데 앗차다. 길 찾는 데 정신들이 빠져서 출발하고는 챙기려던 위문품을 깜박하고 만 것이다. 두령님 체면이 있지 우리가 그냥 빈손으로 가서야 되겠냐는 말이다.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는 돌쇠님 함담님 차를 타고 담향행. 원래 머리가 나쁨 팔다리가 고생하는겨. 다섯이 다 머리가 못 따라갔으니 워쩌란 말인가!
입구에 주저앉아 나는 하늘을 보다가 코스모스를 보다가 무료해서 한 컷.
그리고는 천천히 걷는다. 걸어가기로 하고는 그야말로 신작로 가를 더듬어 간다. 행여 야생화가 있을까 하고.
피가 보이고
개여뀌가 보이고
입구엘 들어섰더니 유홍초가 반가이 맞아준다
돌벽 아래에는 백일홍도 보이고,
구절초도 보이고
설악초도 보이고
송엽국이 살포시 웃는다
왼쪽으로 돌계단 스물하나를 밟고 오르니 대웅전이 눈에 들어온다.
두령님 새까만(?) 얼굴이 웃고 있었다. 반갑다나 워쩐다나. 나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니 그런 줄 알지 뭐. 이때 함담님 궁시렁궁시렁. 이럴 줄 알았으면 듀리언님댁에서 밥을 먹어 둘걸 그랬다나 워쩐다나. 물을 한 버지기 마시더니 이제는 배가 불룩해서 안 고프시댄다. 증말일까?
바로 그 문제의 암자 건물 형체. 다그라스 목재에 육송 서까래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10월 보름쯤에는 일을 모두 끝내실 거란다. 그리고는 우리와 놀아주실런지 아닐런지? 곧바로 감에 붙잡히시는 거나 아닐런지.
시간이 두시반. 언뜻 들려오는 말씀. 대목이신 도편수께서 손님들도 오셨으니 오늘은 이거이거만 빨리 마무리하고 끝내자신다. 결국은 우리가 그분들의 일을 방해한 거다. 그래도 시간이 너무 이르다. 두령님께서 꽃이 있는 곳, 밤을 줍는 곳을 세세히도 가르쳐 주신다. 마지막 현수막에서 10미터 안쪽 계곡에 잔대가 피어 있단다. 잔대를 찰칵하러 올라가니 현수막이 두 개가 보인다. 마지막 현수막이라 했으니 여긴가 하고는 우리 다섯은 두리번두리번. 허나 허탕이다. 엉뚱한 곳을 오르다 그만 돌쇠도 나도 보지 못한 긴댕이를 보고는 누군가가 기절초풍. 나마저 나오고 말았다. 물봉선 한 컷을 겨우 건졌을 뿐이다. 위로 올라와 더듬다 드뎌 잔대 발견. 그런데 긴댕이 보고 놀란 데다가 잔대를 보려 내려가던 돌쇠님이 또 여기 긴댕이 있네 해 버렸으니 오금이 저려 그만 찰칵을 포기하시고 만다. 용감한(?) 우리 용감한 이들만 찰칵.
쑥부쟁이
그 잔대
밤 주우러 올라가는 길에는 엉겅퀴가 지고 있었다. 포자만 하나 덜렁 걸려 있다.
돌쇠님 열심히 찰칵하는 걸 재빨리 찍으려다 그만 초점을 듀리언님 등에다 맞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밤을 주우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먼저 함담과 마법사가 가고 숲 밖에서 들으니 사람을 안 보이고 말소리만 들려온다.
"안 들어오세요?" 마법사 말씀.
내려오던 의리의 사나이 돌쇠님과 듀리언님은 용감하게 뛰어들어 가신다. 밤을 좀 주워 드려야 한단다. 그게 남자가 할일이란 듯이 웃으며 기꺼이 뛰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걸어서 내려오며 길가를 살핀다. 억새란 녀석이 귀를 쫑긋 세우고 뭔가를 듣고 있나 보다. 뭘 들을까? 바람도 없는데.............
내려오는 길은 실망 실망 또 실망. 다 내려오니 길가에 방울도마도 익어가고 있다. 그거나 따서 입에 넣으니 달콤하다. 야생이라서 더 싱싱한가 보다. 한 켠에 곱게 벌초되어 있는 묘엘 가 본다. 행여나 뭐 하나 건질까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돌아 나오는 길에 밤 네 알과 애호박 하나를 얻었다. 딱 부침개용으로 안성맞춤이다. 혹시 이거 절도죄는 아닌지?
두령님 일이 마무리되고 출발. 메기탕집엘 갈거냐? 과수원집에 갈거냐?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과수원집행으로 낙착. 그런데 마법사님 차에 기름이 달랑달랑이시란다. 주유소야 나와라. 길을 달리다가는 두령님이 옆 차선에 오시는 바람에 물었다. 시내로 들어가라신다. 그런데 그 지점이 바로 신호등 앞. 서로 묻고 대답하느라고 적색등에서 그냥 통과. 한 오십미터나 갔을까? 경찰이 보고 가란다. 두령님은 갓길 앞에 멈추고 우리 마법사님 뒤에 차를 댄다. 그러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 때문에 두령님이 딱지 떼게 생겼다고. 경찰. 뭔가를 열심히 두령님께 설명하더니 뭘 확인한다. 그리고는 우리차로 경찰이 다가선다. 면허증을 보잔다. 없다고 주민등록번호로 확인하고는 딱지가 아니고 경고장이란다. 그러며 안전운전하시란다. 돌아서는 경찰 뒤통수가 그렇게 예쁠 수가. 감사.
담양 시내에서 주유를 하고는 출발하니 손전화로 설명하시고도 우회전 지점에서 두령님 대기하신다. 역시 우리 두령님이시다. 선도차로서 선도를 제대로 하신다. 얼마를 가다가는 두령님 따르던 걸 그만두신다. 우리는 그 길로 갈 필요가 없단다. 두령님을 약수행이고 우리는 과수원행이니까. 그러더니 어느 지점에선가 요상한(?) 유턴을 하신다. 재수가 있는 날이다.(그 차에 타신 이들은 뭔 소린지 아실겨)
과수원에 오니 벌써 준비가 다 되어 있다. 돌쇠님의 그 착한 둘째 공주님께서 서빙하느라 분주하다. 우리가 배를 거의 채워갈 무렵에서야 댁에 들러 오신다던 두령님이 합석하신다. 삼겹살에 소주에 맥주에 물소리에 함담님의 너털웃음에 그렇게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도 다들 뭐가 아쉬운지 발길을 얼른 떼지를 못한다. 잔디밭을 서성이다가 나는 또 횡재를 한다. 돌쇠님 어딘가로 잽싸게 달려가더니 잔디깎이를 소리도 요란히 굴리고 오신다. 우리집에 딱이래나. 나는 못이기는 척하고 함담님의 차에 싣는다. 돌쇠님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잔디깎이 주었다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돌쇠님 사진 한 컷만 빌려옵니다. 무단으로 전재합니다. 용서하시기를.
이렇게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했답니다. 지누랑이. 모든 이에게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