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섣달 12일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해서, 오늘 3월 6일 하향했으니 일 주일 모자라는 석 달을 서울에서 산 샘이다. 그 사이에 딱 두 번 왔다 가기는 했다. 그 중에 참으로 황당한 일, 쪽팔리는(?) 일. 하나.
그간 비워 두었던, 아니 아들애가 거의 스무 날을 혼자 지내다 왔던 일이 있었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집을 한 번 돌아보려고 했는데,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갈재터널을 막 지나서야 생각이 미치니 원! 무슨 말인가 하면 집 열쇠 얘기다. 그만 깜박하고는 열쇠를 서울에 두고 왔지를 않은가!
모임을 마치고 집을 겉에서만 한 번 돌아보고는 발길을 돌렸었다. 원래는 하루 밤을 지내고 가려던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된 거다.
하루 자고 온다던 내가 그날 바로 올라오니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아내에게 시침을 뚝 따고 빙긋이 웃으며 그냥 왔지 뭐 하고 넘어갔다. 그러다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방에 잠자리에서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오늘 내려오는 길에 아내가 씨익 웃으며 하는 말씀. 열쇠는?
아버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실 터인데도 열쇠 챙겼냐고 물으신다. 우리 둘이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은다. 아내가 나를 놀린다. 뻥 터트리고 말아? 한다. 내 눈을 그냥 커지고..........
집에 오니 그많던 눈도 다 녹고 앞마당 잔디밭에만 그야말로 조금 덜 녹은 채 한 줄기만 남았다. 처마의 물받이는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그래서 저걸 또 수리해야 한다. 앞마당 화단에 올해는 참 늦게도 복수초가 피었다. 추운 탓이리라. 그것도 딱 한 송이다. 지난 해에는 설에 피었었으니 무려 한 달이나 늦은 거다.
집안은 온통 먼지투성이. 썰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내는 주방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찬물에 그 찬 공기에 일하느라 어쩔 줄 모른다. 3시 반에 시작한 일이 6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제서야 겨우 벽난로를 피울 생각을 해 내다니 참 나도 멍청하기 그지없다. 화목을 때도 따뜻해질 줄 모르고, 보일러는 고장 중이고.
꽁꽁 언 아내는 지금 전기요를 켜놓고 그 속에 푹 들어가 있다. 그만큼 추웠다는 얘기다.
서울에서 생활은 말 그대로 칩거다. 아버지는 거의 방에만 계셨고 워낙 추웠으니까. 아내는 내가 집에만 있다고, 어디를 같이 가고 싶어도 내가 싫다고 한다고, 서로 안 맞는다고 불평이지만 나는 아버지를 억지고 모셔다 놓고 방에만 계시는데 나가 돌아다닐 수가 없다. 가족들이 모두 바빠 집에 없는데,아버지 혼자서 그것도 문밖에도 나가시지 못하시는데 나라도 같이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다고 뭐 무료하신 아버지께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내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다. 아내여, 미안합니다. 나라고 어찌 산에도 가고 시골 장에도 가고 물안개 구경도 가고 눈꽃열차도 타고 겨울바다에도 가고 그러고 싶지 않겠읍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같이 놀아주지를 못해서 말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이제 아버지는 문밖에도 나가시고 뒷산에도 올라가시고 군불도 때시고 힘드시면 들어와 주무시다가 또 나가 돌아다니시다 들어오시고 이거저거 만지시고 그러실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께는 낙이실 거다. 며칠이 지나면 또 하얀 행주가 시커매질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손을 물로 씻으시는 게 아니라 물을 바른 손을 수건으로 씻으시는 거다.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다. 당신 생각에는 물을 아끼시는 거다. 어디선가 우리나라는 물부족 국가여서 물을 틀어놓고 뭘 씻지 말고 받아서 씻으라는 얘기를 들으신 거다. 수건이나 행주를 빠는 물이 손씻는 물보다 더 많이 들어간다고 여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자꾸 말씀 드리면 역정이 나시는 기색이 역역하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도 못 드린다. 그냥 행주 곁에 수건을 하나 매달아 드리고 만다. 그리고는 사흘이 멀다하고 수건을 빤다.
떨며 손이 벌겋게 되며 오후 내내 만들어 놓은 밑반찬을 아버지와 나는 한동안 맛있게 먹을 거다. 한식 요리사인 아내여 고맙구먼요. 요건 아주 작은 소리로 살짝하는 말.
마음에 안 들더라도 잔소리를 많이많이 줄여 주시옵고 타박하는 말씀을 거두어들이시는 은총을 내게 주시옵기를 앙망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랑하는 여보.

내일은 그 복수초를 한 컷 찰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