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날 때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고 이 세상과 처음 만날 때 내는 첫 마디는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앙'이나 '응아'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다. 어떤 이는 아기의 그 첫 울음소리를 듣고 우렁차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시원치 않다고 약골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내가 나일 때는, 타인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려는 생존의 본능으로 살아남으려 한다. 못된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를 비닐봉지에 넣어 물에 버려서 몇 시간을 물 위를 떠다녀도 타고난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거나, 한번 문 젖꼭지를 배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나일 때가 아닌가 한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첫 돌이 될 무렵부터는 나에게는 ‘너(엄마)’라는 대상이 생긴다. 인간으로서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어 나와 너라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무조건의 사랑을 무한정 준다. 그렇다고 내가 너로부터 공짜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일어선다든가, 그 밖의 재롱을 부려 나는 너에게 무한한 기쁨을 선물한다.
그 후 너라는 상대와 익숙해지고 나면 나는 ‘우리’라는 생활로 접어든다. 이 또한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을에 푸르던 감이 빨갛게 익어가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로 젖어드는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와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이면 ‘인내’를 배운다. 좋아도 좋은 표현을 하면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싫어도 내색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게 나는 너를 거쳐 우리라는 공동체를 맞이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이 되어 더불어 사는 법을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익히게 된다.
드디어 성인이 된 것이다 성인이 되면 ‘책임’이라는 무겁고도 반갑지 않은 단어와 가장 가까이 지내야 한다. 기본적인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까지도 나의 책임인 것이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야 하고, 너무 벌거벗어서도 안 되니 입는 책임도 져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간 책임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책임,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말해버린 책임, 특히 남녀 간의 책임은 정말 무겁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본인의 신체를 함부로 하여 누구와 상의할 자유도 없이 타인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일도 생길 수 있다.
세간에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성폭행 사건, 심지어는 어린이 성폭행 사건은 어른들이 나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어른들의 행동이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청소년들에게 비추어진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일요일(4월 29일)에 저녁 미사를 가기 위해 집을 나셨다. 성당까지 가는 길은 밝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아파트 단지 앞길이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너 밤에 뭐 할 거야?"
주저도 없이 금방 튀어나온 대답.
"섹스."
순간 나는 너무도 놀라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나는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얼마간을 더 걷다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고등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둘이서 길을 가며 나눈 대화이다.
그 남학생이 "섹스"라고 간단히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처럼 그대로 행동에 옮기려면 그와 함께하는 대상이 있으리라. 그 대상이 애인? 아니면 유부녀? 과부? 여대생? 여중고생? 그것도 아니면 초등학생 미만의 어린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긴 하나 현실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이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것인가?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은 아닐까? 나쁜 어른이 자기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 포르노 사진 수첩을 만들고, 음란 비디오테이프를 만들고, 이젠 청소년들이나 어린이까지도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해서 성행위 동영상을 올리다 못해 청소년 인터넷 회원을 모집하여 노래방에서 찍은 캠코더를 이용해 성 매매 대상을 고르기까지 한다니, 아연할 수밖에. 이 책임을 과연 누가 져야만 할 것인가?
'네 책임, 내 책임'하고 서로 강 건너 불 보듯이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이 심각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남의 일도, 이웃의 일도 아닌 바로 내 일이 아닌가!
